소설리스트

< 언제든 일어났을 일 > (54/200)

< 언제든 일어났을 일 >

<여어! 유영도!! 너는 여기 와서도 혼자 그 깽판을 치냐?>

<... 선배는 여기 와서도 그렇게까지 절 괴롭히고 싶으십니까?>

<응! 완전! 이번 시즌은 진짜 네 덕에 심심할 틈이 없다. 성적도 잘 나오고... 크으, 말년이 풀리네!>

<...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제 자리에 데려다주기만 하세요.>

올스타전인 만큼 영도도 인게임 마이크를 거절하지 않았다.

KBO와 방송사 관계자들이 전부 나서서 설득하는 바람이 거절할 수 없던 것도 있었다.

올스타전인데 팬들을 위해 한 번만 달아달라는 그들의 설득을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으니...

[손성호 선수와 오늘 올스타전 경기 내내 저런 식으로 장난치시는 장면, 음성이 나갔습니다. 실제로 소속팀에서도 손성호 선수와 많이 친하신가요?]

“예, 아무래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제츠로 오라고 계속 설득하던 분이라서 친한 편입니다. 이번에 팀에 합류했을 때도 합류하자마자 찾아오셔서 팀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아쉽게도 올스타전 MVP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어차피 올스타전은 축제.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날이다 보니 이닝이 끝날 때마다 두세 명의 선수와 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영도의 차례는 경기 종료 직후 인터뷰를 진행한 MVP 나정준 바로 다음.

올스타전 MVP가 아닌 영도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림이 되어버렸지만, 현재 리그 내 위상이 압도적이고 취재하기 어려운 선수로 유명한 영도이기에 KBO와 방송사는 이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늘은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번 시즌 유영도 선수의 이름은 홈런과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전반기 93경기에 37홈런. 물론, 산술적인 계산이지만, 시즌 57홈런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페이스로 달리고 계시거든요? 이번 시즌 목표가 어떻게 되십니까?]

“음... 구체적인 숫자로 목표를 정해두진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누가 봐도 그 시즌의 유영도는 최고다, 대단했다, 응원할 가치가 있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아... 응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전반기를 끝낸 지금! 한국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또, 한국 야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나?]

“한국 팬... 듣기만 해도 울컥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단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한국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이너리거 시절 유망주로 크게 인정받을 때부터, 이후 메이저리거로 데뷔했을 때부터 영도는 한국 팬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여러 요건을 감안해 미국 국적을 선택하긴 했지만, 국적이 미국일 뿐, 정체성은 100%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한국 팬들과 멀어졌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꼈는데, 서글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건...

“예전부터 사랑해주신 우리 제츠의 팬 여러분, 항상 감사합니다. 시야를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시야를 돌려서까지 절 살펴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돌아오자마자 옛날보다 더 큰 사랑과 응원을 주시고...”

[제츠 팬들이 보내주는 유영도 선수에 대한 사랑과 응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죠?]

“예... 이제는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항상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적인 활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번 시즌은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영도는 정말 KBO 진출 이후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성적과 기량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성향과 성격까지.

급격하고 급진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도착과 동시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손성호 선배님, 그리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밖에 없는 팬 여러분. 이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생깁니다.”

[아... 그건... 손성호 선수와 제츠 팬들이 기뻐할 일은 하나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제가 내년을 약속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 시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영도가 공식적으로 우승 도전 의사를 밝힌 건 처음이었다.

KBO 역사에 남을 레전드이자 해보지 못한 게 하나밖에 없는 손성호의 간절함, 23년을 기다린 제츠 팬들의 숙원.

생각지도 않았던 사랑과 응원, 그리고 도움을 준 이들의 너무나도 간절한 바람.

이 간절함은 그동안 개인 성적에만 집중했던 영도의 생각까지 바꿔버릴 만큼 강력했다.

물론, 커리어 최초로 개인 성적과 위상, 팀 내 입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활약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번 시즌은 영도의 커리어에 있어서 거대한 전환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영도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열심히 살아온 만큼 누구보다 단단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좋든 싫든 자신의 가치관, 야구관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완성되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선수.

하지만 그 단단한 세계가 조금씩 무너진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고, 거대한 변화였다.

“제츠 팬 여러분들에게만 말씀드렸지만, 모든 한국팬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이런 기회가 있기를 바랐는데,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그렇죠. 응원하는 팀과는 별개로 한국의 모든 팬들이 유영도 선수를 많이 응원하셨고, 지금도 많이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정말로 제가 올스타전 최다 득표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게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 언제가 되었든 꼭!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수 있는 플레이, 커리어를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진심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진 않네요. 한국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방법은... 간단하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영도 본인을 위해서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영도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팬들을 위해서라는 말이 틀린 것도 절대 아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메이저리그를 챙겨보고, 해외 언론에서 우리 선수를 찬양하는 영상을 시청하면서 뿌듯해 하는 것도 결국 팬들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였으니까.

사랑받는 선수가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건 선수 본인도, 팬들도 행복할 수 있는, 모두가 행복한 일이었다.

***

“여러분!! 제가 말씀드렸죠!? 드디어 왔습니다! 그가 왔습니다!! 서울 제츠 최고의 선수, 서울 제츠의 역사를 넘어 KBO의 역사를 새로 쓰려 하는 유영도 선수를 소개합니다!”

“...? 뭔데? 그거 진심 맞지?”

“야! 이거 공식방송이라니까? 반말하면 어떡해!”

“반말하면 좀 어때. 우리 팀 공식방송이긴 한데 이거 어쨌든 뉴미디어잖아. 인터넷 방송. 좀 가볍게 해도 되는 거 아냐?”

후반기 시작 이틀 전, 영도는 약속한 대로 제츠 공식방송, ‘TV스피릿’에 출연했다.

그렇게 졸랐던 만큼 당연히 함께 출연한 진행자는 고등학교 동창인 신초희.

당연히 시작부터 헬파티였다.

“아, 초희랑 왜 반말하는 거냐고요? 초희랑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오래 다니진 않았지만, 시간과 관계없이 아주 깊게 친해진 친구죠.”

“제가 당시부터 야구기자, 칼럼니스트,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야구계에서 벌어먹고 살겠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야구계에서 벌어먹고 살겠다는 꿈이랑 나랑 친해진 건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그때부터 난 네가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거든. 타자로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지만...”

신초희는 정말로 야구를 사랑해서 야구판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분명히 아름다운 외모이긴 했지만, 다른 야구여신들에 비하면 약간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여전히 야구기자가 최종 목표이고, 칼럼니스트를 꿈꿨을 정도로 전문가적인 식견을 자랑했기에 야구 여신 중 1, 2위를 다투는 인기를 자랑했다.

특히 그녀의 최대 장점은 유망주를 보는 눈.

공식방송의 PD 역할을 겸하는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전문적인 컨텐츠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칭찬한 유망주들은 대부분 터지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유영도는 그녀가 찍은 최초의 유망주라고 할 수 있었다.

“와, 뭐냐? 그러면 그때 순수하게 나랑 친해진 게 아니었다는 거야?”

“에이... 당연히 순수하게 마음에 들어서 친해진 거지만, 그런 생각도 있었다는 거지. 솔직히 내가 너 미국에 있을 때도 꾸준히 연락하면서 응원했잖아. 그게 쉬워?”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연락올 때마다 얼마나 고마웠는데... 와... 배신감...”

“야, 솔직히 양심이 있어라. 우리가 시간과 관계없이 빠르게, 그리고 깊게 친해진 건 맞지만, 그래도 반년이야. 네가 야구선수고 성공할 것 같다는 판단도 아주 조금은 있었지. 물론, 친구로서 널 좋아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영도는 한국 시절부터 친했던 사람들과 함께할 때와 아닐 때의 성격, 이미지 차이가 심한 편이었다.

오일도 방송에 출연했을 때도 그런 모습이 살짝 보이긴 했지만, 띠동갑도 넘게 차이 나는 오일도와 동갑 친구 신초희는 또 많이 달랐다.

따지자면 신초희와 있을 때는 훨씬 더 평범한 20대 초반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 와... 유영도 되게 신나 보이네.

-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겼다. 쵷이랑 같이 있으니까 잘 어울린다.

- 선남선녀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친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친하다? 킹리적 갓심 발동하는 거 정상이지?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 유영도 이런 모습 처음이다. 되게 진지하고 재미없게 변한 줄 알았는데, 아직 옛날 모습 있네.

- 너네도 그렇잖아.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랑 만나면 갑자기 그때로 돌아가는 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옛날 유영도는 딱 이런 성격이었지.

- 난 지금 모습이 더 좋지만, 가끔 이런 것도 좋다.

- 근데 둘이 사귐? 필요 이상으로 친한 것 같은데?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여러분,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여러분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그 알, 계란친구라니까요? 계란친구한테 사귀느니 뭐니 하는 끔찍한 소리는 좀 참아주시죠.”

“야... 계란친구... 와... 초희야, 나랑 같이 있다고 해서 여기가 학교인 게 아니야. 보고 있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 맞다... 나 야구여신이었지?”

“응. 아마 오늘부로 은퇴하게 되겠지만.”

영도는 모르겠지만, 야구계에 몸담은 이후 영도와 야구 관련 활동을 함께하는 게 신초희의 목표 중 하나였다.

오늘이 딱 목표를 이루는 날이다 보니 살짝 흥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평소의 신초희가 야구여신처럼 단아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아니, 이 친구가 말이죠, 고등학교 다닐 땐 얼마나 날라리였는지 아세요? 아, 아시는 분들도 많지, 많으시죠? 다들 아시잖아요? 완전 놀자판이었다니까요?”

“어릴 때 한때 그랬던 거지. 그리고 그때도 그렇게까지 놀자판은 아니었어. 야구도 열심히 했으니까 내가 그 정도로 인정받았던 거지.”

“와... 내가 아는 네 여자친구만 대체 몇 명...”

“그만! 그만! 너 진짜 그런 식으로 할 거냐? 나도 해?”

“... 우리 대승적인 차원에서 휴전하자. 휴전하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야.”

“그래. 안 그래도 난 아까부터 후회 중이었어.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 으하하하, 진짜 멸망전이네?

- 누가 멸망하는지 진짜 끝까지 한 번 해보자! 왜 멈춰? 노잼!!

- 쵷은 가끔 정줄 놓는 거 보면 이런 성격인 게 아주 놀랍진 않은데, 유영도는 완전 의외네...

- 유영도도 옛날 유망주 시절 기억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놀랍진 않음. 저런 모습이 아예 없어진 줄 알았는데 남아있는 게 놀라우면 놀라웠지.

- 오늘 뱅송 알차다... 그래, 유영도도 이런 거 좀 해야지! 다른 선수들은 개인방송 하면서 개인 브랜드 가치도 쭉쭉 올리는데, 유영도는 너무 야구만 함.

- 옛날 유영도였으면 난리 났지...

- 난리만 났겠냐? 스포츠 신문 1면에 매일 나왔을걸? 연예면도 넘봤겠지. 딱 6개월 같이 지낸 신초희가 여자친구만 몇 명씩이나 알고 있다는데...

고등학교 친구 둘이 함께하는 방송.

당연하게도 방송은 점점 멸망전, 폭로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올스타 브레이크에 딱 어울리는 가볍고 즐거운 예능성 방송.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 쵷!! 영도!! 혹시 이거 들었음? 윤무열 음주운전으로 잡혀갔다는데!?

< 언제든 일어났을 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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