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나홀로 > (52/200)

< 나홀로 >

“이거 큰일인데...”

‘확실히 좋지 않아. 진짜 여름 되면 귀신같이 떨어지네.’

미친 듯이 달리던 제츠의 기세가 한풀 꺾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략 6월 중순에서 6월 말 정도부터 승률 자체는 나름대로 유지했지만, 승패를 떠나 어떤 상황에서든 패배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기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도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 지금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지 않아? 메이저리거 눈에는 좀 다르게 보이나?”

“... 선배는 그대로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내가 이 성적에 기복까지 있으면 되겠냐?”

‘여름 잔혹사’의 예외 중 한 명인 조규영은 여름에 6할 중후반 OPS로 오히려 시즌 성적보다 높았다.

다만, 6할 초중반 OPS가 6할 중후반 OPS로 올라간다고 한들 팀의 부진을 막아내기엔 턱도 없었고, 그냥 영향력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팀 분위기 어떤데?”

“뭐... 밖에서 하는 말이랑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불안 요소가 많죠.”

영도를 제외한 팀 내 주축 타자 손성호-한영훈의 나이, 굉장히 추운 지방에서 온 2선발 에디 렉스의 불안한 여름, 평균 연령 22세 한류듀오의 불확실성 등.

제츠는 기본적으로 상수든 변수든 여름 성적이 걱정되는 팀이었고, 이는 누가 봐도 명확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곧 제 타석이라서.”

“아... 그렇네. 와... 성호 형이랑 영훈이 형도 많이 힘드신가 보네. 점점 공격 시간이 짧아지는 것 같아.”

손성호-한영훈이 안 좋을 때 보여주는 모습은 일정했다.

선구안이 무너지고, 스윙 빈도가 높아지고, 한껏 잡아당기는 영웅 스윙이 많아져 결과적으로 2루 땅볼이 급격히 늘어났다.

덕분에 영도의 앞에 주자가 없는 경우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지.’

주자 없는 2아웃 상황.

사실, 어떻게 생각해도 해결사 앞에 주자가 없는 게 좋은 일이 될 순 없었다.

해결사는 타점을 올려줘야 하는 위치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팀의 입장이고, 영도 개인으로서는 조금 달랐다.

동료들의 부진이 시작될 낌새가 보이면서 집중견제에 시달리는 중인데, 주자 없는 2아웃 상황에선 투수들도 굳이 볼넷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리그에서 손꼽히는 우완 에이스 중 한 명이고.’

5선발에 그 자리가 확고한 것도 아닌 채성명은 주자 없는 2아웃이기에 오히려 1루를 내줘도 좋다는 생각으로 던졌다.

선수에 따라서, 특히 하위 선발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투수들은 아무리 영도가 상대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피해가진 않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맞아봤자 1실점’인 상황이었으니까.

[초구 스플리터가 스트라이크 존 아래쪽에 걸쳐 들어갑니다! 완벽하게 허를 찌르는 피칭! 유영도 선수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김유선의 최대 장점이죠. 평균 이상으로 구사하는 공만 포심 포함 4개고, 자주 활용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사할 줄 아는 구종이 세 개가 더 있어요.]

[그 구종 세 개를 중요할 때, 한 경기 3, 4번만 활용해도 타자와의 심리전에서 10%는 완벽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주요 구종이 4개에 기타 구종 3개. 아무리 대단한 타자여도 수 싸움에서 7개 구종을 전부 고려할 순 없어요. 뒤의 3개는 그냥 버려야 하는데, 투수 입장에선 정말 유리해지죠. 결국, 수 싸움이고 타이밍 싸움이거든요?]

147km까지 구속은 나오지만, 140km대 극초반으로 구속을 맞추고 대신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들을 농락하는 기교파 투수.

굉장히 수준 높은 투심을 포심 대신 던지며, 커브, 체인지업을 주 무기로 삼고 커터, 슬라이더, 스플리터를 아주 가끔 섞어주는 투수.

‘후우... 뒤에 세 구종을 아예 무시해야 하는 건지, 그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건지... 답이 안 나오네.’

사실, 이런 투수는 그냥 본능으로, 뭐가 오든 칠 수 있는 건 다 치겠다는 마인드로 상대하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이 가능한 타자는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어떤 공이든 들어오면 다 친다?

타고난 배트 컨트롤 능력, 배트 스피드, 동체 시력 등 축복받은 재능이 없으면 공갈포, 막스윙어 되기 딱 좋은 마인드였다.

하지만...

[3구 타격! 빠른 타구! 좌익수 뒤로, 좌익수 뒤로!!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 유영도 선수, 34호 홈런을 터뜨리면서 지난 두 타석에서의 패배를 되갚아줍니다!]

[김유선 선수의 변화무쌍한 피칭 스타일은 굉장히 강력하죠. 하지만 유영도 선수의 피지컬도 절대 무시할 수 없거든요? 그렇다고 피지컬만 믿는 선수도 아니고요.]

[이로써 1-4로 추격하는 서울 제츠! 6회에 드디어 첫 득점이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추격을 시작해야겠죠. 아직 안 늦었거든요?]

영도가 KBO에서 갖는 가장 큰 이점은 어떤 투수를 상대하든 적당히 잘 때리기만 하면 장타가 나온다는 것.

김유선도 수 싸움에서의 장점에 비해 스터프가 뛰어난 투수는 아니다 보니 다른 타자들보다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특히 배트 스피드와 동체 시력은 KBO에 오기 전부터 수준급으로 평가받던 선수였기에 타격폼 변경으로 배트 컨트롤 능력이 어느 정도 보완된 지금은 그 ‘적당히 잘 때리는’ 게 가능했다.

“후우... 잘했어!!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아직 할 수 있어!”

비록 타석에선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지만, 손성호는 덕아웃에서나마 제 역할을 해내려 노력했다.

6월 중순쯤 정점을 찍었던 기세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를 최대한 늦추면서 팀을 추스러야 하는 상황.

손성호와 한영훈, 조규영 등 이 팀의 분위기메이커들은 비록 자신들이 직접 분위기 반등의 계기를 만들진 못하지만, 영도의 활약을 앞세워 타석 밖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진짜. 너마저 마지막까지 침묵했으면 내일 경기에 후반기 초반까지 고생할 뻔했어.”

“너무 늦게 해내서 아쉬울 뿐입니다. 역시 저런 투수들은 영상으로 보는 것과 너무 다르네요.”

“수많은 변화구를 던지면서도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는다니... 솔직히 반칙이지. 저 정도 수준의 변화구 5, 6개씩 못 던지는 투수가 어디 있어? 근데 그걸 실전에서 해내는 게 말이 안 되잖아.”

“하아... 이번이 두 번째 맞대결 정도만 되었어도 경기 초반에 뭔가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역시 아쉽습니다.”

첫 타석 삼진, 두 번째 타석 큼지막한 중견수 플라이.

홈런을 때려내긴 했지만, 영도에게도 김유선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국가대표로 올림픽, WBC, 프리미어 등 다양한 대회에 출전해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던 만큼 현역 메이저리거라 해도 첫 타석부터 공략하긴 어려운 투수였다.

그래서 영도는 오늘 이미 본인의 몫을 충분히 해주었다.

아무리 해결사라 해도 모든 경기에서 직접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

야구에서 리그를 파괴하고 상상을 파괴하는 타자가 한 시즌에 기록하는 WAR, 즉,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는 10.0 전후.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가져오는 승리는 10승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2040년 여름, 시련과 어려움 전문가인 영도에게 또 한 번의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

“아이... 이게 왜 지금 넘어가냐...”

서울 제츠와 대전 에이스의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중계하던 제츠 공식방송 ‘TV 스피릿’의 신초희.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니지, 아니지. 솔직히 홈런이 나온 타이밍은 좋았죠?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을 뿐...”

- 홈런에 타이밍이 어디 있어... 유영도가 오늘 못한 것도 아니고...

- 하아... 진짜 답답하네? 진짜 여름이 오는 건가?

- 여름이 오긴 오나 봐. 우리 선수들 대신 프로 조무사들이 나온 걸 보니까.

- 종인이가 아직 어려서 기복이 있는 건 어쩔 수 없긴 한데...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냐.

- 3연전에서 3번 타자가 홈런 5개를 때렸는데 1승 2패.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 무슨 일은... 그냥 제츠의 여름인 거지.

“우리 팬 여러분들도 말씀하시네요. 유영도 선수는 이번 홈런으로 이번 3연전 동안 홈런 5개, 그것도 두 경기 연속 2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하아...”

6월 첫 시리즈에서 유형근과의 맞대결 이후 영도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경기 전까지 56경기에서 19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이후 37경기에서 기록한 홈런은 18개.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는 무려 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이했다.

“유영도 선수한테는 진짜 더 바라는 게 없어요. 전반기 끝났는데 37홈런? 지금 홈런 2위가 세일러스의 박우용 선수인데 26홈런이에요. 뭘 더 바라겠어요?”

- 크으... 제츠 선수가 전반기 끝났을 때 홈런 1위라니...

- 이거 믿어도 되는 거냐? 몰카 아니지?

-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홈런은 잘 칠 줄 알았어. 근데 타율/출루율/장타율 어쩔? 수비 어쩔?

- 이번 시즌 외국인 선수 농사는 대박 났다. 유영도 인기도 옛날부터 많았고, 이제 더 엄청나져서 관중 수도 세일러스, 타이탄스 다 저 밑에 있음

- 절대영도, 가즈아!! 제츠 빼고 다 얼려버렷!!

“그런데 지금 팀이... 하아... 어제도 2-6, 오늘도 3-7... 유영도 선수는 솔로 홈런만 3개에 투런 홈런 1개, 볼넷도 3개예요. 이틀 동안 팀의 득점은 전부 유영도 선수가 책임진 거예요.”

- 앞에 주자도 안 쌓이고, 가끔 쌓여도 1명 있으니 상대를 제대로 안 해주고...

- 우희운도 X발 X나 답답하지만, 손성호-한영훈이나 박윤형도 X나 문제야. 젠장... 속 터져 뒤진다.

- 한류, 이 자식들은 어떻고...

- 걔들은 스물넷, 스물이야. 그 어린 애들 둘이 상수처럼 활약해주길 바라야 하는 우리 팀 마운드가 문제지. 걔들은 그렇게 종종 흔들리는 게 당연한 거.

- 불펜이라도 생각보다 잘해줘서 다행이지...

- 대타는? 대타 요원 없는 것도 문제 아니냐?

제츠는 애초에 구멍이 있는 팀이었지만, 팀이 잘 나갈 때는 구멍이 보이지 않는 법.

여름이 오고 연례행사처럼 침체기가 오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팀이 잘 나가니 적당히 메워진 것 같았던 구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진짜 걱정이네요. 올스타 브레이크 동안 팀을 잘 추슬러서 이번만큼은 잘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그렇잖아요? 이번 시즌에는 유영도 선수, 타선에서 확실하게 중심을 잡아줄 무시무시한 선수가 있으니까 잘 지나갈 수도 있잖아요?”

- 응. 기대하지 마. 여름 제츠는 과학이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쵷 건드리지 마라. 잘못하면 운다니까?

- 왜들 그래요? 혹시 알아? 절대영도가 옆에 있으니 다들 여름인줄 모를 수도 있잖아.

- 아... 덕아웃에 같이 있으면 춥긴 하겠네.

- 제발. 제발 덕아웃은 추웠으면 좋겠다. 절대영도가 영하 273도 정도였던가?

“자, 좋아요. 좀 나중에 공지하려고 했는데, 지금 딱 공지하면 될 것 같네요. 우리 그거는 직접 물어보자고요. 올스타전 끝나고 이틀 뒤, 그러니까 17일에 유영도 선수를 모시고 함께 방송할 거거든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댓글에 공지로 남겨주세요!”

- ... 뭐!? 인게임 마이크도 안 달고 들어가는 유영도가 방송에 나온다고!?

- 뒷북 노노해. 이미 옆집 창원 아재 방송에는 한참 전에 나왔었는데, 뭘...

- 와... 아니, 공식방송이니까 당연한 건가? 근데 왜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

- 뭐 먹고 자란 거냐고 꼭 물어봐야지. 인간의 피지컬이 아닌데...

- 피지컬은 그냥 타고난 거지. 그게 훈련으로 되는 거였으면 다들 홈런 50개씩 치지 않겠냐?

- 와... 말도 안 돼! 유영도가 방송에 나오다니!

- 제발 인게임 마이크도 쓰고 방송도 좀 종종 나와줬으면...

- 에이! 그런 소리 하지도 말어!! 야구선수가 야구 잘하면 됐지... 그리고 제츠에 그런 선수 너무 많음. 한 명 정도는 야구만 열심히 하는 것도 괜찮잖아!!

- 그게 왜 유영도냐고!! 야구만 열심히 해도 모자랄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 타이탄스냐? 요즘 세상에 선수라고 야구만 하게?

< 나홀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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