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 탄생의 필수요소 >
"공 두세 개씩 확실하게 빼버려. 여기서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면 한영이 놈은 영점도 못 잡고 우희운한테까지 처맞을지도 모르니까. 투수는 공을 던져야 영점을 잡고 컨디션을 올리는 법이지."
타이탄스 김근수 감독이 자동 고의사구가 아닌, 고전적인 고의사구를 선택한 이유였다.
"해결사라는 놈들은 이럴 때 냉정할 수가 없는 법이지. 그러니 두세 개씩 확실하게 빼는 건 빼는 건데, 그렇다고 일어서라고 하진 말고."
냉정하게 말해서 김근수 감독은 절대 나쁜 감독이 아니었다.
타이탄스는 꾸준한 우승후보였고, 최근 몇 시즌의 사령탑은 김근수 감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대단한 명장도 아니었다.
타이탄스의 팀 컬러를 싫어하는 팬들은 김근수 감독 역시 이미 만들어진 팀을 받은 것뿐이라며 평가절하했고, 이는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김근수 감독은 실수도 적잖이 저질렀고, 이는 대부분 그의 극단적인 올드스쿨 성향에서 기인했다.
‘젠장, 젠장, 젠장... 대체 왜 자동 고의사구가 아닌 건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영도가 타석에 들어서다니...
김진형은 제발 영도에게서 타점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다.
그의 이런 기분을 알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김진형은 절대 영도를 싫어하지 않았다.
친하진 않아도 청소년 대표팀 시절 두 살 많은 형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에이스 역할을 맡아 힘들어하던 그를 위로해준, 몇 안 되는 선배 중 한 명이 김진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던 영도가 마이너리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비교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름 라이벌이라고 언급되다가 급격하게 차이가 벌어진 지금의 상황은 버티기 힘들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MVP급 활약을 보인 게 두 시즌, 이전의 세 시즌은 가능성만 보여준 욕받이, 혹은 감독의 양아들.
자신감과 자부심이 붙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영도에게 밀렸을 때, 부진에 빠졌을 때, 부진이 길어졌을 때...
조금씩 흔들리던 멘탈은 어느새 3년 전 욕받이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울 타이탄스의 중심타선, 해결사인 김진형과 뉴컴, 홍인주는 무사 3루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과연 2사 3루에서 등장한 유영도 선수는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이거... 만약 해낸다면 3연전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커요. 무사 3루를 살리지 못한 클린업과 2사 3루를 살려낸 에이스? 이건 오래가죠.]
이게 또 하필이면 양 팀의 해결사들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타이탄스는 이윤지의 3루타부터 시작해 김진형-뉴컴-홍인주 등 핵심 4인방이 전부 나섰고, 제츠 역시 손성호의 2루타부터 한영훈에 이어 영도의 차례.
골고루 나눠진 타이탄스 핵심 4인방의 무게감과 영도에게 쏠린 제츠 3인방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영도에겐 안 그래도 높은 위상을 한층 더 끌어올릴 기회였다.
[초구는 볼입니다. 146km의 강속구였습니다만, 많이 높았습니다.]
[손성호 선수의 2루타 이후 구속이 2, 3km 정도 떨어졌어요. 아... 세트 포지션에서의 약점을 무슨 일이 있어도 극복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고쳐지네요.]
[9회를 삼자범퇴로 끝냈을 때와 주자를 한 명이라도 내보냈을 때. 안한영 선수의 통산 세이브 성공률은 20% 이상 차이 납니다.]
[쉽게 말해서 주자 안 내보내면 세이브 성공률 90%가 넘어요. 근데 내보내면 70%도 위험하죠.]
어느 시대에나 위력적인 강속구, 어느 순간 스플리터에 밀려나 이제는 타자들이 낯을 가리게 된 포크볼.
안한영의 장점은 이 두 가지였고, 이를 앞세워 타이탄스 불펜의 믿을맨이 되었다.
필승조 시절에는 배짱도 나쁘진 않다는 평가를 받아 윤하운의 클로저 울렁증 재발 이후 클로저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클로저 울렁증이라는 게 전염병이었을까?
마지막이라는 부담감, 8회를 맡을 때보다 강해진 타자들의 집중력, 본인도 느끼던 세트 포지션의 단점까지.
안한영은 시소게임에서 주자만 내보내면 구속이 떨어지고 제구가 흔들리며 자멸하는.
주자를 잘 내보내지 않아서 세이브 성공률은 나쁘지 않지만, 정작 필요할 땐 불안한 클로저가 되었다.
[2구도 볼이 됩니다. 아... 유영도 선수는 홈런타자답지 않게 헛스윙 빈도가 그리 높지 않은 선수입니다. 1-0에서 슬러브로 유인구는 좀 아니죠.]
[그러니까 제가 볼 땐 이거 거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1, 2구 다 스트라이크존에서 꽤 벗어났거든요? 오늘 우희운 선수의 성적도 좋지 않으니 여기서 유영도 선수랑 승부할 이유가 없어요.]
‘이거 좀 애매하지 않아?’
거르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지 않는 걸 보면 요행에 대한 기대감도 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해결사들의 영웅 심리를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영도처럼 팀 내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가진 해결사들은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홈런타자들일수록 삼진이 많은 것처럼 인상 깊은 클러치 장면을 만드는 타자들은 그만큼 실패도 많았다.
타이탄스의 볼 배합은 그 부분을 노리고 있었다.
‘어설퍼.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하지만 영도는 그런 무리한 타격과 거리가 멀었다.
조이 보토를 롤모델로 삼은 것에서부터 지향점은 분명했다.
[손성호 선수에게 2루타를 허용한 볼 카운트도 2-0이었습니다. 잘 치는 타자들이 대놓고 노리는 카운트 아니겠습니까?]
[그런 볼 카운트가 몇 개 있죠. 2-0, 3-1. 투수는 알아도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합니다. 근데 거를 것 같죠?]
‘하지만... 이 정도면 욕심을 좀 내도...’
조금 전 손성호와의 대화에서 시작된 고민.
KBO 수준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공을 골라 칠 이유가 있는가?
다음 시즌부터 시작될 메이저리그 복귀를 위해 이번 시즌 KBO에서의 가능성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가?
‘이건...’
바깥쪽으로도 공 한 개 정도 빠지고, 위로는 공 두세 개 이상 빠진 볼.
많이 빠진 공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때리지 못할 건 또 없는 공.
아마 투수의 제구가 흔들려 분명하게 빼라는 벤치나 포수의 요구보다는 존에 가깝게 들어왔을 그런 공.
‘에이, 씨... 몰라. 한 번 해보고 생각하면 되지!!’
이 순간을 회상하면 영도 본인도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조금씩 커지던 자신감이 순간적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숨은 게 아닐까 상상할 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후로도 시간이 꽤 흐른 뒤였지만, 이 순간이 데뷔전이었다.
[바깥쪽 높은 코스! 아! 이걸 건드렸습니다! 우중간! 우중간! 중견수와 우익수가 따라가다가, 따라가다가! 멈췄습니다!! 외야수들의 발이 멈추고, 홈런! 홈런입니다! 유영도의 투런 홈런! 역전 홈런!! 4-3! 서울 제츠가 드디어 역전에 성공합니다!!]
바깥쪽으로도, 높은 코스로도 빠진 공.
당연히 제대로 된 타격폼으로 때릴 순 없었다.
하지만 어떤 타자든 언제나 완벽한 폼으로 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법.
재능 있는 타자는 커리어가 어느 정도 쌓이면 무너진 자세에서도 최대한 힘을 싣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100%는커녕 70%도 제대로 싣기 힘들었지만...
영도의 경우, 70%면 충분했다.
[이게 드디어 넘어갑니다. 4타석 1타수 무안타 3볼넷! 하지만 마지막 타석에서는 대놓고 거르려 했던 투수의 한참 빠진 공을 받아쳐 홈런으로 연결, 팀에 역전을 안겨주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거를 거였으면 확실히 걸렀어야죠. 대체 왜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타이탄스 벤치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해결사의 영웅 스윙으로 인한 요행, 혹은 아예 확 빠진 공을 던지는 동안 안한영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어쨌든 둘 중 하나는 노렸겠지만, 타이탄스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돌아왔다.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이번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아마 한동안은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스타 탄생, 명장면 탄생의 필수 요소 중 하나는 상대방의 실수였고, 영도는 그 기회를 잘 살린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유영도 선수가 이렇게까지 한참 빠진 공에 휘두르는 건 처음 본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그동안은 그래도 다른 괴물 타자들과는 다르게 근거가 있는 플레이, 다른 말로 이해가 가는 플레이만 보여줬죠. 그래서 예측 불가능에서 오는 두려움이라도 없었는데... 이러면 앞으로 유영도 선수를 상대하기 훨씬 더 어려워지죠. 이쪽의 상상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원래 모르고 얻어맞는 게 가장 아픈 법 아니겠습니까?]
[예측 가능한 50홈런 타자보다 예측 불가능한 35홈런 타자가 어쩔 땐 더 무섭고 위협적인 법이죠. 스트라이크만 치는 3할 초반 타자보다 원바운드 볼을 걷어내 안타로 연결하는 2할 후반 타자가 어쩔 땐 더 무섭고요.]
“으아아아아아아!!!!!”
“좋아!! 좋다고!! 대체 어떻게 생겨먹으면 이런 걸 해!!”
“그걸 넘겨!? 그걸!? 대체 어떻게!?”
8회 말 수비부터 한껏 치솟은 채 유지된 제츠의 팀 분위기.
영도의 역전 홈런이 터진 순간 덕아웃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아니, 아까 잠깐 이야기했던 건데 그걸 이렇게 바로 적용한다고? 대체 넌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메이저리그에서 왜 실패한 거야? 그 재능으로 실패할 수가 있어? 그런 세계야, 거긴?”
“...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게 되어야 이런 것도 하는 거죠. 저도 요즘 놀랍니다. 내가 이런 게 되는 놈이었나, 하고.”
“허허... 무섭다, 야. 나도 고등학교 때 살짝 찔러본 메이저리그 팀이 있었는데... 이제 확신이 드네. 안 가길 잘했어.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었다, 야.”
“가셨어도 잘하셨을 겁니다.”
대충 빈말 한 마디 던져주고 음료수 한 잔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다시 생각해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배트를 돌린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마 다시 그 순간이 되면 절대 배트를 돌리지 않겠지.’
뭔지 모를 희열과 흥분이 영도를 감쌌다.
괴물들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던 상상을 뛰어넘는 플레이, 그것을 해냈다는 것에서 전율이 올라왔다.
‘흥분하지 말자.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스트라이크존에서 한참 벗어난 공을 때렸는데 홈런이야. 그래서 또 하자? 그러다가 무너진 예비 괴물들 수도 없이 봤잖아.’
하지만 영도는 금방 냉정을 찾았다.
흥분하는 법은 잊었지만, 모든 것을 냉정하게, 냉소적으로,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은 이미 전문가였다.
이런 걸 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대단한 거고, 그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거지, 항상 이런 걸 노린다면 성적은 물론 모든 게 다 엉망이 될 것이었다.
‘이 짜릿함은 잊지 말자. 내가 해낼 수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고. 하지만 홈런은 잊어야지. 어쩌다 나온 해프닝일 뿐이니까.’
어쩌다 해낸 것뿐이고, 다시 같은 걸 노릴 생각은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없었다.
상대의 실수가 언제나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얻은 건 분명히 있었다.
이런 것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
프로에게 자신감과 확신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보면 이번에 얻은 자산은 정말 값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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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들의 수준 차이? 무사 3루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진 중심타선 vs 1점 차 2사 3루에서 역전 홈런 터뜨린 해결사]
[해줘야 할 선수가 해줄 수 있는가? 여기서 갈린 KBO 최대 라이벌들의 자존심 대결]
[‘절대영도’, 1 대 4의 대결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은 압도적 클러치 본능!]
[“또 침묵!!” LKRJ포 중 L, 이윤지 제외 전원 침묵! 윤한태, 유형근에 이어 조지 스넬까지 잡아내며 자이언트 킬러 등극!!]
[핵심타자 활약에 갈린 3연전... 김진형, 3연전 동안 11타수 무안타 2삼진 3내야플라이. 유영도는 8타수 4안타 2홈런 5타점 5볼넷으로 스윕 이끌어...]
- 절대영도! 좋다! 그렇지! 절대반지 같은 거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항상 표정도 없고 냉철한 거 보면 절대영도라는 별명도 잘 어울리네.
- 김진형? 뉴컴? 홍인주? 그나마 이윤지는 인정한다. 영도에 비하면 X도 아니지만...
- 이런 기분인가? 중심타선에 저런 괴물 한 명 있으면 이런 기분으로 야구 보는 건가? 왜 이렇게 편하지?
- 이기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냐?
- 이 좋은 걸 그동안 지들만 알고 있었다니... 타이탄스, 이 이기적인 놈들!!
- 으아아악!! 야구 쉽다아악!!
- 이것이 홈런입니까? 편-----안...
< 스타 탄생의 필수요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