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클러치 > (48/200)

< 클러치 >

[초구 타격! 아! 높게 뜨고 말았습니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타구, 3루수 유영도 선수가 잡아냅니다. 원 아웃!]

[타이밍이고 방향이고 다 어긋났어요. 상체와 하체도 분리되고... 김진형 선수... 개인적으로 분명 부활할 거라 확신했지만, 지금 보니까 생각보다 이거... 위험하겠는데요?]

힘이 잔뜩 들어간 김진형의 스윙은 전혀 정교하지 못했다.

높이와 방향이 다 틀렸고, 타이밍도 맞지 않았다.

스윙 자체에서 욕심이 보이고, 그 욕심 때문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니...

메커니즘 상 당연히 좋은 타구가 나올 리가.

‘저 선배는 왜 저러지. 저런 선수가 아닌데...’

영도가 본 김진형은 굉장히 훌륭한 타자였다.

전체적으로 정교하다고 하긴 모호하지만, 손목 힘을 활용하는 메커니즘만큼은 감탄이 나올 정도.

물론, KBO MVP급 선수인 만큼 정교함이 떨어지는 선수도 아니었다.

‘어린이날 시리즈 마지막 경기쯤부터 느꼈는데 요즘 왜 날 저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네.’

김진형과 친한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옛 대표팀 동료였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과거에 동감하며 마음으로나마 응원하는 사이.

하지만 지난 시리즈 이후 유독 김진형에게서 강한 투지가 느껴졌다.

“좋아, 좋아!! 첫 타자 이렇게 잡았으면 됐어! 가뿐하게 막고 역전 가자!!”

일단 그 생각은 뒤로 미뤄두었다.

조규영의 외침처럼 무사 3루, 무사 만루와 같은, 누가 봐도 점수가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첫 타자가 허무하게 물러나면 득점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멘탈적인 문제인데, 주자 없는 원 아웃에서 1사 3루가 된 것과 무사 3루에서 1사 3루가 된 것은 후속 타자가 받아들이는 부담감의 크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진형 선수가 이렇게 물러나면... 뒷 타자인 뉴컴이 느끼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뉴컴은 거의 시즌 개막부터 부진했다가 요즘은 좀 살아나는 느낌이거든요? 김진형 선수보다 좀 먼저 부진했다고 먼저 빠져나오는 느낌은 있어요.]

[타이탄스가 지난 몇 시즌 동안 영원한 우승후보일 수 있었던 건, 실제로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이럴 때 이런 선수들이 해내줬기 때문입니다.]

[이윤지, 김진형, 홍인주 고정에 외국인 타자. 여기서 구멍이 난다면 그래도 이제 노장이 된 홍인주 선수부터 시작될 줄 알았는데, 참 의외거든요? 타이탄스로서는 홍인주, 이윤지 두 선수의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몇 번 더 우승하고 싶을 텐데, 그러려면 뉴컴이 꼭 부활해줘야죠.]

급격한 부진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뉴컴이 막스윙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영도와 비슷했다.

약한 코스를 버려 부족한 컨택을 숨기고 장타력을 살리는.

시즌 초반 부진의 이유는 간단했다.

메이저리그 시절 영도와 비슷한 영웅스윙어가 선구안이 무너져버린 것.

슬럼프가 없다는 선구안이 너무 급격히 무너져 일시적인 부진일 뿐, 무조건 부활할 수 있을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생각보다 길었던 초반의 부진, 그리고 김진형의 예기치 못한 동반 부진이 타이탄스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잘 맞은 타구, 3루 강습! 아! 멋지게 한 바퀴 돌면서 걷어내는 3루수 유영도! 여유 있게 투 스텝 후 1루로, 아웃입니다!]

[역시... 좁은 범위에서의 수비만 놓고 보면 유영도 선수의 수비는 KBO 정상급이에요. 전진, 후진에 대한 판단, 좌우 수비범위는 좀 아쉽지만, 저런 정면으로 오는 강습타구는 정말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죠.]

3루 쪽으로 강하게 날아온 뉴컴의 강습 타구.

처리하기 어려운 타구였지만, 영도는 글러브로 깔끔하게 걷어내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깔끔하게 처리해냈다.

[지금도 저 글러브질 보세요. 유영도 선수가 글러브를 다루는 거 보면 정말 깔끔합니다. 수비가 약점이라고 평가받던 선수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죠.]

[메이저리그 기준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신하건대 유영도 선수의 수비는 메이저리그 시절과 지금, 분명 달라졌습니다.]

[많이 성장했다는 말씀이시죠?]

[당연하죠! 선수는 결국 경기를 뛰어야 성장하는 거거든요? 3루수로 드디어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3루 수비도 성장했다. 이렇게 보는 게 맞아요. 아무리 날고 기는 메이저리그라 해도 이 정도 수비가 평균 이하도 아니고 낙제점이다? 그건 말도 안 되죠.]

“오!! 유영도!! 이걸 잡았다고!? 미쳤는데!?”

“나이스, 유영도!”

영도의 수비는 확실히 성장해 있었다.

조규영과 이재준의 감탄, 그리고 강이현이 조용히 들어 올린 엄지 척까지.

적어도 이제 제츠 선수들은 영도의 수비를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것도 팀의 핵심이라는 김진형-뉴컴 쪽에서 3루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했습니다.]

[정말 치명적이죠. 홍인주 선수가 아무리 클러치 히터로 유명한 선수라지만... 이걸? 여기서?]

[홍인주 선수도 이제 좀 편안하게 야구하고 싶을 텐데, 믿었던 김진형-뉴컴 듀오의 부진이 참... 아쉽겠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여기서 추가 득점이 없으면 9회 초가 너무 불안해지거든요? 홍인주가 해줘야죠. 미스터 타이탄스 아니겠습니까?]

무사 3루가 4번과 5번, 팀 내 최고 타자들의 잇따른 삽질로 2사 3루로 변해버린 상황.

1점 차, 불안한 리드에 최고의 기회를 잡고 이를 날려버리기 직전인 최악의 위기.

타이탄스 입장에서는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점수를 뽑아내야만 했다.

[제대로 걸린 잘 맞은 타구가 3루 쪽으로! 아! 유영도 선수가 훌쩍 뛰어오르면서 타구를 낚아챕니다! 안타를 훔쳐낸 유영도! 이걸로 실점까지 막아냅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유영도 선수의 연속 호수비라니! 그 타격에 이 수비? 그냥 혼자 다 해먹는 거죠, 이건!!]

이제는 유명해진 영도의 서전트 점프.

타이탄스 입장에서는 더럽게 운이 없었다.

정말 잘 맞은 타구가 하필이면 영도 쪽으로 향했고, 그것도 수직 방향 정면.

좌우도, 전후도 움직일 필요 없이 점프만 제때, 높게 해주면 잡을 수 있는 타구.

영도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수비였다.

“좋아!!!!!”

“유영도, 이 자식!!”

“나이스! 나이스 플레이!!”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에 조용히 피칭에만 집중하던 강이현이 포효했다.

조규영과 이재준은 영도에게 달려와 매달리며 기쁨을 표출했다.

“좋아! 이대로 역전까지 가자고!!”

덕아웃 밖으로 나와 돌아오는 선수들을 격려하는 최고참 손성호.

야구계의 절대 진리, ‘위기 뒤 기회’

최악의 위기를 영도의 호수비 두 개로 넘겨버린 제츠는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인 9회 초,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

***

“제발... 제발... 제발... 한 명만! 한 명만 나가라!!”

“한 명만 나가면 유영도 선수까지 타석이 돌아오죠? 제발 한 명만 출루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유영도 선수는 분명 한 건 해줄 거거든요!? 한 명, 한 명이면 돼요!”

“어차피 이제 윤하운 선수도 내려갈 것 아니겠습니까? 타이탄스 클로저는 누가 나와도 안 무서워요!”

제츠 공식방송 ‘TV 스피릿’의 한준영과 신초희.

이미 두 사람은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이젠 끝났다...’라고 생각했던 무사 3루의 위기를 호수비 두 개로 극복한 상황.

팬이라면 ‘위기 뒤 기회’를 부르짖으며 광분할 수밖에.

“자, 자... 흐읍, 후우... 좀 진정하고. 초희야! 너도 좀 진정해! 그래도 중계 중인데, 아무리 팬들이랑 친근하게 지낸다고 해도 중계는 해야지.”

“스읍, 스읍, 후우... 그렇죠? 자, 저는 좀 진정하고 있을 테니 오빠가 일단 말 좀 하고 계세요.”

“에휴... 그래요. 자, 9회 초 우리 공격은 9번 타자 조규영 선수부터 시작인데, 아마 대타가 들어서겠죠? 문제는 우리 대타 요원들은 전부 장타력에 비해 컨택이 많이 떨어지는 선수들이라 출루 목적의 대타가 없다는 건데...”

“여기선 무조건 박태원 선수죠! 요즘 어경준 선수한테 조금씩 밀리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경모 선수보다는 빠따가 좀 더 나은 편이니까.”

9번 타순부터 시작하는 9회 초 제츠의 공격.

한 명만 출루에 성공하면 영도까지 타순이 이어지기 때문에 제츠 팬들은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제발 한 명만 출루에 성공해주기를...

“근데 참 웃겨. 9-1-2 타순이면 손성호 선수랑 한영훈 선수가 다 나오는 타순이잖아?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우리가 제일 믿었던 선수들 아닌가?”

“... 그러네? 그런데 우리가 왜 출루만 성공해주길 바라고 있는 거죠?”

- ... 헐... 소름! 지금 두 선수가 딱히 부진한 것도 아닌데!

- 그만큼 이번 시즌 유영도가 미쳤다는 거지.

- 그건 그래. 둘 다 대단한 선수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서의 한 방은 유영도 쪽이 훨씬 낫지.

- 그래도 잘하면 그 둘 쪽에서 끝나지 않을까?

- 둘 다 두 자릿수 홈런 정도는 가능하잖아? 출루 말고 장타를 기대해보자!

“타이탄스도 참 신기해요. 좋은 불펜투수가 분명 있는데, 이 투수들이 클로저 자리에만 가면 불안해집니다.”

“윤하운은 국내 불펜투수 중 TOP 5 안에 무조건 들어가는 선수고, 안한영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 좋은 투수잖아요. 근데 둘 다 클로저 자리에만 가면 10개 구단 중 평균급, 아니면 그 이하의 클로저가 돼요.”

“야구의 신님께서 참 공평하신 게 타이탄스 같은 팀에도 이런 아킬레스건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대할 수 있는 거겠죠? 어휴... 제발, 제발... 매 경기 이길 순 없지만, 타이탄스만큼은 제발...”

타이탄스 불펜의 에이스는 윤하운이었지만, 클로저는 안한영이었다.

윤하운을 클로저로 보내 준수한 셋업과 평범한 클로저를 활용하기보단 안한영을 보내 특급 셋업과 평범보다 약간 아래인 클로저를 활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9회에만 올라가면 갑자기 약해지는 불펜투수들.

타이탄스의 오랜 고민은 이번 시즌에도 여전했다.

[8회 초, 서울 제츠 공격]

선수 교체 : 투수 윤하운 -> 안한영

<9번 타자 조규영(유격수)>

선수 교체 : 9번 타자 조규영 -> 박태원

1구 : 스트라이크(147km, 포심)

2구 : 스트라이크(149km, 포심)

3구 : 볼(127km, 슬러브)

4구 : 헛스윙 삼진(132km, 포크)

<1번 타자 손성호(지명타자)>

1구 : 볼(148km, 포심)

2구 : 볼(125km, 슬러브)

3구 : 좌익수 뒤 2루타(145km, 포심)

“됐어! 됐어! 갔어! 갔어! 이거지! 이게 손성호지!!”

“손성호! 손성호! 손성호!! 2루 가지, 이거!? 2루 가는 거지!?”

- 갔다! 그렇지, 이거지!!

- 언제부터 유영도였다고!! 제츠는 손성호라고!!

- 야, 개소리하지 마... 2루타야. 안타 하나 더 필요하다니까? 혹시 지금 영도 무시한 거 아니지?

- ... 당연히 아니지. 누가? 내가 좀 흥분했네, 미안.

- 이게 손성호지! 박태원이야 그냥 당연히 아웃 되는 거고, 손성호!! 하린이 아부지!!

박태원이 무기력하게 아웃 되긴 했지만, 역시 본편은 그다음부터였다.

손성호-한영훈-유영도로 이어지는, 제츠가 자랑하는 상위 타순.

선봉장이자 제츠의 상징, 손성호가 이름값에 어울리는 활약으로 포문을 열었다.

“평균 구속 150km에 가까운 패스트볼을 뻥뻥 던져대는데 안한영이 왜 불안한 클로저냐!? 초희! 왜 그렇지?”

“간단하죠. 세트 포지션이 좋지 않고, 견제 능력도 떨어지니까요. 그걸 본인이 알아서 주자만 내보내면 불안해지는 것도 있고.”

“더해서 9회에 올라오면 원래 7, 8회보다 못합니다. 결국 뭐... 멘탈 문제죠.”

“프로 선수들이 이 정도 레벨까지 올라오면 역시 멘탈로 모든 게 갈리더라고요. 아니, 꼭 선수만 그런 것도 아니죠. 어디서든 높이 올라가려면 마지막엔 멘탈이 제일 중요해요.”

물론, 10개 구단 클로저 중 평균, 혹은 그보다 살짝 아래라지만, 정말 못 써먹을 수준이면 타이탄스 정도의 팀에서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어쨌든 평균 세이브 성공률 80%는 된다는 뜻.

“아... 한영훈 선수는 아쉽게도 잘 맞은 타구가 우익수 정면으로 가면서 물러났습니다. 그래도 괜찮게 맞은 것 같은데... 많이 아쉽네. 어쨌든 손성호 선수가 3루까진 갔으니 안한영이 포크볼은 못 던지겠네요.”

“자! 여러분! 그래도 이번이 진짜입니다. 유영도, 유영도 선수가 나오잖아요!? 다들 한 번 소리 지르고 갑시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 유영도! 소리 질러!!

- 29호 홈런 가자!! 이번 3연전에서 30홈런 찍자!!

- 김진형 따위 상대도 안 된다는 거 보여줘야지!?

- 이미 보여준 거 아님? 무사 3루 내야 플라이?

- 우리 영도는 2사라도 주자 3루면 절대 안 놓치지.

- 홈런홈런홈런홈런홈런홈런홈런홈런...

- 근데... 이러면 영도랑 뭐하러 승부함? 2사 3루면 영도 거르고 우희운 잡겠지.

제츠 팬들의 모든 염원을 등에 지고...

영도가 타석에 들어섰다.

< 클러치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