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비를 넘어 >
‘나는 기주랑 달라. 네가 사라지고 우리 학년 에이스는 기주였지만, 나도 투수에 집중하는 시기가 늦었는데도 마지막엔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영도의 고교 동기들은 대한민국 NO.1을 다투는 명문고 야구부 출신답게 프로에 꽤 많이 진출해 있었다.
그중 창원 와이번스의 5선발 후보 중 한 명으로 활약 중인 유경윤은 영도가 이탈한 덕을 제대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
영도와 성기주에 밀려 학년 NO.3 투수였던 그는 영도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우익수 백업에 그치며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지만, 영도가 이탈한 2학년 시절부터 성기주와 함께 조금씩 기회를 잡아나갔다.
팀의 핵심이 된 3학년 때는 상대에 따라 번갈아 등판하며 성기주와 동등한 입지를 구축했다.
프로 7년 차가 지나 중견급이 된 지금도 두 선수 모두 소속팀의 하위 선발로 자리 잡으며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141km의 패스트볼이 존 바깥으로. 역시 유경윤 선수에게도 유영도 선수는 무서운 상대인가 봅니다. 구속이나 구위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배짱 두둑하게 스트라이크를 뻥뻥 꽂아대는 게 이 선수의 특징 아니었습니까? 그게 안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밖에 할 줄 모르면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죠. 유경윤 선수는 안 그래도 비교적 낮은 피안타율, WHIP에 비해 피장타율이 너무 높아 상위 선발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데, 유영도 선수에게까지 정면으로 들어간다? 아이고, 그건 무리예요.]
영도는 분명 KBO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그나마 흠을 좀 잡자면 3할 초반의 타율과 3할 후반대의 출루율은 전체 타자 중 10위권 초반대로 약간 아쉬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투수들이 영도에게 절대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변화구와 바깥쪽 공 공략이 완성된 건 아니었는데, 그걸 스트라이크도 아니고 볼로 공략해오니 페이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바깥쪽 공략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모든 타자가 까다로워하는 코스였다.
꼭 영도만 그 코스를 어려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특히 영도와 같은 풀히터, 당겨치기 위주의 타자들이 이 코스를 조금 더 어려워하는 건 있었다.
[계속해서 바깥쪽, 변화구 위주의 승부를 이어가는 유경윤 선수. 볼 카운트는 3-1로 이어집니다.]
[투수들이 유영도 선수를 상대할 때마다 집요하게 바깥쪽을 후벼 파고 좋은 공, 특히, 패스트볼을 던져주지 않으면서 살짝 고전했던 건 맞아요.]
[그 정도를 고전이라 한다면 다른 선수들이 화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고전했다고 할만합니다.]
[하하하, 그렇죠. 다른 선수들이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유영도 선수의 3, 4월 성적과 5월 성적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6월 초를 기점으로 그 ‘유영도 공략법’이 슬슬 유영도 선수에게 역으로 공략당하는 느낌이에요. 시즌 초반의 말도 안 되는 기세가 슬슬 다시 돌아오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유경윤은 살짝 운이 없었다.
성기주도 그랬지만, 유경윤 역시 너무나도 뛰어난 고등학교 동기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자존심, 자부심인 맞더라도 꽂아넣는 배짱까지 포기한 채 ‘유영도 공략법’을 따랐다.
그나마 하나 있는 장점까지 버리고 영도를 잡아내려 올인한 유경윤의 피칭.
언뜻 보기에는 어느 정도 영도를 억제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유형근의 브레이킹볼도 눈에 들어온다. 반응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이야.’
5월의 영도와 6월의 영도는 달랐다.
6월 1일부터 3일에 걸친 6월의 첫 시리즈, 그중에서도 특히 유형근과의 맞대결 이후 영도는 달라졌다.
비시즌 동안 이어진 변신을 위한 처절한 노력과 KBO 진출 후 계속된 성공, 그로 인해 쌓인 자신감이 자신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자신의 몸으로 직접 확인한 뒤였다.
자신 없던 브레이킹볼이 눈에 들어왔고, 배트도 어렵게나마 이를 따라갔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 진출해도 하위 선발은 문제없다는 KBO 최고의 에이스, 유형근을 상대로.
[떨어지는 공을 받쳐놓고 걷어 올립니다! 멀리멀리 날아가는 타구! 이건 뭐 따라갈 것도 없습니다! 거의 제자리에 멈춰선 중견수 이아진! 유영도 선수의 타구는 관중석 상단에 꽂힙니다! 시즌 28호 홈런!]
영도의 전체적인 타석 접근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깥쪽 공은 어지간하면 때리지 않고, 몸쪽 공이나 상대의 실투를 기다리다가 카운트가 몰린다, 싶으면 바깥쪽에도 배트를 휘두르는 전략.
달라진 건 타석에서의 접근이 아닌 영도, 그 자체였다.
[유영도 선수의 홈런은 대부분 좌익수 쪽이나 중견수 쪽에서 나오거든요? 5월까지는 분명 좌익수 쪽 홈런이 더 많았는데, 6월에는 거의 비슷해요. 그리고 유영도 선수가 바깥쪽 공을 잡아당기면 중견수 쪽 홈런이 나옵니다.]
[그렇다는 건 6월 들어 바깥쪽 공을 받아친 홈런이 많이 나왔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메이저리그에서 건너온 괴물이 거기서 성장까지 하는 거예요. 유영도 선수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유영도 공략법’? 웃기지 마! 그걸 내가 다시 공략해주지! 지금 괴물이 이러면서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유형근과의 대결 이후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해졌다.
그리고 상대의 공이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먼저, 일찍 눈에 들어왔고, 판단이 빨라졌고, 휘두르는 배트에 자신감이 실렸다.
바깥쪽 공은 여전히 까다롭지만, KBO 수준의 브레이킹볼은 이제는 그렇게까지 까다롭진 않았다.
코스의 까다로움 정도는 힘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바깥쪽 공을 한껏 끌어당겨 타석에서 가장 먼 중견수 뒤 담장을 넘겨버리는 홈런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바깥쪽 공을 끌어당겨 중앙 펜스를 넘겨버리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좌측 펜스를 넘기는 홈런이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현재까지 70경기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 28홈런이거든요? 전반기의 끝을 알리는 올스타전까지도 대략 3주 정도 남았는데, 거의 30홈런을 눈앞에 두고 있어요.]
[5월까지 20홈런이면 50홈런 페이스였습니다. 그런데 6월 들어 이 페이스를 확 끌어 올린 느낌입니다.]
[이러면... KBO 한 시즌 역대 최다 홈런인 56홈런은 물론이고, 아시아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인 60홈런도 한 번 노려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게... 이게 넘어간다고?’
자신의 스타일까지 다 버리고 어떻게든 영도를 잡아내려 노력했던 유경윤.
바깥쪽보다는 살짝 가운데로 몰리긴 했지만, 아래쪽 스트라이크존에서 볼로 떨어지는 완벽한 포크볼이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투수의 기본인 표정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유경윤의 이러한 반응, 이러한 표정은 영도를 상대하는 평범한 KBO급 투수들의 그것과 같았다.
‘내가 이 정도였다고? 6월 말에 28홈런?’
유형근과의 맞대결을 통해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자각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영도는 계속 놀라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2040년 6월은 매일매일 자신의 성장에 놀라고 자신의 현재 기량과 위치를 자각하는 한 달이었다.
‘이 정도면... 진짜 기록 한 번 노려봐도 되는 거 아닌가?’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게 평가했던 영도는 5월까지 홈런, 장타율, OPS, 타점 등에서 리그 1위, 그것도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중에도 자신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엄격하고 냉정하게 평가해도 자신이 KBO 수준은 넘어섰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부상 전, 한창 잘 나가던 유망주 시절에나 꿈꾸었고, 이후에는 차마 그런 꿈조차 꾸지 못했던 목표.
전생에서의 궁극적인 마지막 목표, 하지만 지금은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갈 자격을 막차가 아닌 시드, 나아가 초청권으로 얻어내기 위한 이정표.
KBO, 잘 풀리면 아시아 야구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 엄격하고 자신에게 냉정한 영도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
[‘디펜딩 챔피언’ 서울 타이탄스, 이대로 괜찮나? 3강 중에서도 압도적인 1강이라던 평가와 다르게 어느새 5위까지 떨어져...]
[‘허울만 좋은’ 1R3J포, 김진형-뉴컴 동반 부진으로 개점휴업 상태]
[‘시즌 1호 외국인 교체’, 서울 타이탄스, 호르헤 루고와 계약 해지하고 새 외국인 투수 찾는다]
한쪽이 웃으면 한쪽은 우는 게 이 세상의 섭리.
서울 제츠가 영도의 말도 안 되는 질주와 함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리그 1위를 달리는 동안 본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모두가 1위를 예상했던 서울 타이탄스는 어느새 4위까지 떨어져 있었다.
부진의 원인으로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고질적인 약점이자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불펜진, 외국인 투수 의존도가 큰 상황에서 부진한 조지 스넬의 파트너 호르헤 루고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난 시즌 각각 36홈런과 33홈런으로 69홈런을 합작한 김진형-레오나르도 뉴컴의 동반 부진이었다.
그나마 뉴컴은 어린이날 시리즈까지 OPS 7할에 4홈런이라는 극도의 부진에 시달렸지만, 이후 48경기에서 9홈런을 추가하며 OPS를 0.760까지 끌어올렸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해도 부활을 기대는 할 수 있었다.
결국, 그중에서도 김진형의 부진이 너무 심각했다.
어린이날 시리즈 전까지 11홈런을 기록하며 산술적으로 50홈런도 넘기는 페이스로 달리던 그는 어린이날 시리즈 이후 48경기에서 5홈런에 그치며 OPS 8할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윤지-김진형-뉴컴-홍인주로 이어지는 타이탄스의 홈런군단 중에서도 핵심은 김진형과 뉴컴, 그중에서도 김진형이었다.
당연히 팀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 아니, 김진형 이 새끼는 대체 뭐가 문제야? 어린이날 시리즈에서 유영도한테 제대로 한 번 발리더니 시X, 계속 빌빌대네?
- 이 새끼는 진짜 멘탈이 제일 문제야. 멘탈이 그따위로 약해서 뭐가 되겠어? 실력만 MVP급이면 뭐하냐? 진짜 탑클래스들은 멘탈이 더 중요하다
- 야! 사람이 어떻게 맨날 잘하냐!? 그래도 우리 형이 벌써 몇 시즌째 잘해줬는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기에 48경기는 너무 길다... 시즌 1/3인데
- 우리 형도 우리 형인데, 뉴컴은 어쩔 건데? 뉴컴 안 바꿔? 루고도 루고지만, 차라리 뉴컴을 바꿔!!
- 이 시점에 영입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 중에는 타자보다 투수가 더 나은가 보지. 뉴컴은 그래도 어린이날 시리즈 이후엔 최악은 아니잖아.
- 천하의 타이탄스가 최근 48경기 20승이라니!! 벌써 시즌 절반도 더 지나갔는데, 41승 40패라니!!
‘제길... 제길... 제길...’
김진형은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입술을 짓이겼다.
자신의 부진이 팀에 치명타를 입혔다는 것, 그것 때문에 우승후보 0순위라던 팀이 5위까지 떨어졌다는 것, 그로 인해 팬들의 슬픔과 분노가 쌓였다는 것이 전부 그의 가슴을 헤집었다.
포텐셜이 터지기 전, 욕받이 시절이 떠오를 정도였고, 성향상 그럴수록 부담감이 커져 더욱 가라앉았다.
- 만약 김진형 이 새끼... 유영도 의식하느라 부진한 거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지금 이 새끼랑 유영도가 비교가 되냐? 수준이 달라, 수준이. 되도 않는 라이벌 의식은 갖다 버리고 하던 거나 좀 잘해라. 메이저리그는 개뿔...
"유영도... 유영도... 유영도... 유영도!!!!!”
그중에서도 가장 김진형의 가슴을 후벼 파는 건 이런 댓글들이었다.
사실, 김진형의 부진은 어린이날 3연전에서 벌어졌던 영도와의 맞대결이었다.
타자들의 승부를 3경기로 가를 순 없겠지만, 둘은 각자 팀의 핵심이자 에이스, 승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선수들이었고,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할 수 있었다.
결과는... 개인 성적에서의 완패, 벤치 클리어링에서의 궤멸, 그로 인한 시리즈 스윕패였다.
어린이날 시리즈 이전에도 영도를 의식했던 김진형은 눈앞에서 패배한 그 날 이후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후배가, 그것도 자신이 알기로는 투수였던 후배가,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끽해야 자신과 비슷한 수준인 줄 알았던 그 후배가.
어린이날 시리즈 때는 자신의 앞에서 타고난 피지컬과 기량 차이를 보여주었고, 이후에는 KBO 역사에 남을 페이스로 홈런을 쌓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그리고 다시 한 번 제츠와의 3연전이, 영도와의 맞대결이 다가왔다.
KBO 최고의 타자로서, 라이벌인 타이탄스 타선의 핵심으로서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기량과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벼르는 김진형의 눈빛은 뜨거웠다.
그러나 지금 김진형은 그 뜨거운 열정과 의욕을 컨트롤할 핸들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 고비를 넘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