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품격 >
[8회 말, 2사 주자 3루의 위기를 맞이한 서울 제츠. 마운드에는 이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 올라온 이창우 선수가 5번 타자 고윤수를 2루 땅볼로 돌려세운 뒤 6번, 박진영 선수를 상대합니다.]
[지난 시즌 막판 혜성처럼 등장해서 평균 구속 150km에 달하는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을 앞세워 단숨에 제츠의 필승조 자리를 차지한 이창우 선수인데요.]
[아무래도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배트 스피드가 느려진 박진영 선수 입장에선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초구, 크게 헛치는 박진영! 역시 151km에 달하는 패스트볼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전성기에는 0.270 정도의 타율에 30개 근처의 홈런을 때려내던 강타자였지만, 이젠 나이가 들면서 타율을 포기하고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스타일로 타격폼을 바꿨거든요? 그래서 강속구 투수를 상대로는 약점을 노출하는 편이죠.]
7회 초 영도의 동점 홈런 이후 1-1 균형이 이어진 채 맞이한 8회 말 매지션즈의 공격.
먼저 등판한 박이현이 고든 레녹스를 잡아낸 뒤 김정현에게 2루타를 허용했고, 이어 등판한 이창우가 실점 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나섰다.
[3루 쪽으로 잡아당긴 타구! 윤무열이 잡아서 1루로... 어어!!]
‘이 자식이...’
매일 방탕하게 놀면서 훈련도, 야구도 제대로 안 할 거면 경기에 나왔을 때 실수라도 하지 말던가.
영도는 방향도, 높이도 엉망인 송구를 받아내기 위해 팔다리를 한껏 뻗었다.
[일단 멋지게 받아낸 1루수 유영도! 시스템의 판단은... 아웃! 아웃입니다! 유영도 선수의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야... 정말 손톱만큼 대고 있었네요. 유영도 선수의 신체 조건이 좋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팔다리가 아주 긴 편은 아닌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있는 대로 몸을 늘려 실점을 막아냈습니다.]
[만약 여기서 박진영 선수가 1루를 밟았다면 3루 주자 김정현 선수가 홈을 밟지 않았겠습니까? 경기 막판에 다시 한 번 리드를 빼앗길 뻔했는데, 유영도 선수가 정말 중요한 수비를 해냈습니다.]
[윤무열 선수 수비는 아직도 많이 발전해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에러도 한 개 있었고, 지금처럼 불안한 수비는 몇 개나 더 있었어요. 유영도 선수가 아니라 한영훈 선수가 1루수였다면 최소한 에러 한 개는 더 나왔을 것 같은데요.]
[유영도 선수가 수비를 잘한다는 걸 오늘 윤무열 선수의 3루 수비와 유영도 선수의 1루 수비를 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하긴... 네가 완전히 이긴 거였는데. 네가 다 한 걸 야수 실수로 날려 먹을 뻔한 거지, 넌 잘했어.”
“하하하, 아닙니다. 그래도 선배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래, 뭐... 굳이 감사하다면야.”
영도는 지나가며 눈을 흘기는 윤무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영도가 싫어하는 선수의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였고, 굳이 그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윤무열은 이미 팀에서도 반쯤은 포기한, 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나이 든 유망주였고, 영도는 팀의 중심이자 핵심이었다.
“천하의 유형근도 이쯤 되면 힘 빠진다! 어쩌면 9회는 다른 투수가 올라올 수도 있고! 다들 힘내서 한 점만 내면 나머지는 믿음직한 우리 클로저, 송하경이가 알아서 해줄 거야!!”
“어이, 한영훈이. 너도 언제든 대타 나갈 준비 해야지? 나한테만 부담 주지 말고 너나 준비 잘해라.”
“넵... 클로저님...”
이제 남은 정규이닝은 9회, 딱 1이닝.
양 팀 모두 뒤를 보지 않고 남은 전력을 모두 쏟아낼 타이밍이었다.
오늘 경기의 결과가 내일 있을 시리즈 마지막 경기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살얼음판의 승부.
9회 초, 제츠의 공격은 2번 타자 박윤형부터 시작이었다.
[서울 제츠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매지션즈의 마운드는 어느새 103개의 투구 수를 기록 중인 유형근이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유형근 선수가 오늘은 무리를 좀 하는데요? 그만큼 중요한 경기이기도 하고, 어쩌면 자신에게서 홈런을 뽑아낸 유영도 선수와 한 번 더 붙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2번 타자 박윤형 선수부터 타석에 들어서기 때문에 3번 타자인 유영도 선수는 무조건 타석에 들어서는 상황입니다.]
[지난 타석에서 유형근 선수에게 홈런을 뽑아내며 20호 홈런 고지에 먼저 올라섰거든요? 그 분위기 그대로 살려서 한 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거예요.]
매지션즈의 김서준 감독과 장문호 투수코치는 투수 육성 전문 듀오라는 별명답게 투수에게 절대 무리를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유형근은 지난 시즌을 기점으로 KBO 현역 NO.1 자리를 차지한 절대적인 에이스.
그가 고집을 부리면 아무리 감독과 코치라 하더라도 에이스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붙어보자고. 당신이 대단한 타자인 건 인정하겠지만, 전 타석 홈런은 솔직히 반칙이었어.’
분명 자신의 체인지업이 영도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은 걸 확인했다.
하지만 결과는 억지로 때려낸 홈런.
유형근은 다시 한 번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147km의 포심 패스트볼이 박윤형 선수의 몸쪽 깊은 곳을 파고듭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걸로 오늘 경기 탈삼진 12개째!]
[9회에도 공이 살아있네요. KBO 최고의 투수다운 집념이 보이는 공이에요.]
[이러면서 타석에는 바로 전 타석에서 동점 홈런이자 시즌 20호 홈런을 기록한 유영도 선수가 들어섭니다.]
[여기서 유형근 선수가 이기면 아마 높은 확률로 승부가 연장에서 갈릴 테고, 유영도 선수가 이긴다면... 제츠가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될 겁니다. 그만큼 중요한 승부예요.]
김유신 해설위원의 당연한 말과 함께 시작된 유형근과 영도의 마지막 승부.
마운드에 서서 영도를 노려보는 유형근의 눈빛도, 담담히 이를 받아넘기는 영도의 눈빛도 이보다 강렬할 순 없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본데... 정신력으로 신체,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건 벌써 50년도 더 전의 이야기야.’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투구 수가 100개를 넘어갔는데 경기 초반과 같은 위력을 보일 순 없었다.
같은 선수로서 분한 마음과 한 번 더 상대해 갚아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는 쪽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십수 년 더 이 바닥에 오래 있었던 선배 입장에서 그걸 가르쳐주지. 가르쳐주는 게 하나라도 있어서 마음이 좀 편하네.’
유형근이 아무리 지쳤어도 어지간한 투수들보다는 훨씬 더 위력적인 투수였다.
하지만 오늘 영도의 컨디션 역시 최고였다.
일시적인 각성효과가 아니길 바라지만, 어쨌든 오늘의 유영도는 자신의 최대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한 최신 버전이었다.
[초구는 147km가 나왔습니다. 온 힘을 다해 던지는 게 표정에 보이는데도 150km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분명 지치긴 지쳤어요. 과연 저 지친 몸으로 유영도 선수의 파워를 이기는 공을 던질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어쨌든 저 집념과 의지는 인정해야겠습니다.]
경기 내내 팽팽한 분위기로 이어진 1-1의 살얼음판 승부.
여기까지 팀을 이끌고 온 에이스 유형근과 동점 홈런의 주인공 유영도는 마지막 집중력까지 끌어올렸다.
[기습적인 체인지업에 크게 헛스윙을 돌리는 유영도 선수. 유형근 선수의 체인지업이 유영도 선수를 완벽하게 속여냈습니다.]
[전 타석에서 홈런을 허용한 그 구종이죠? 확실히 유형근 선수, 전 타석의 홈런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역시 내 생각보다 내가 더 성장했고, 유형근은 지쳤어도 쉽진 않구나.’
당연한 말이지만, 브레이킹볼 대처 능력이 영도 본인의 생각보다도 많이 좋아졌고, 오늘 컨디션도 좋다고는 하지만,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을 간파할 순 없었다.
‘... 위험했다.’
마지막 집중력까지 끌어낸 유형근의 공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 위력적이었다.
가까스로 걷어내긴 했지만, 이번 백도어 슬라이더는 특히 대단해서 까딱 잘못했으면 삼진으로 맥없이 물러날 뻔했다.
‘그래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분명 내가 유리해진다.’
커트로 투수를 괴롭히는 건 영도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다.
컨택 능력이 대단한 선수들도 의도적으로 파울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고, 영도에겐 그 정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공 하나, 하나 최선을 다해 따라갈 뿐이었다.
[결정구로 던진 몸쪽 하이 패스트볼마저 파울로 걷어내는 유영도 선수. 이렇게 되면 유형근 선수가 많이 답답해질 것 같습니다.]
[투수 입장에선 계속해서 결정구가 빗나가면 던질 공이 없어져요. 지금 슬라이더와 패스트볼을 계속 걷어냈는데, 이렇게 되면 체인지업 타이밍이거든요? 과연 이전 타석의 잔상을 지워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몰렸다!!’
전 타석 홈런의 잔상 때문이었는지 유형근은 다시 한 번 슬라이더로 승부해왔다.
하지만 지쳐서 그런 건지 백도어 슬라이더의 가장 위험한 코스,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서 한가운데로 흘러들어오는 코스로 날아왔고, 영도는 이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
그러나 이는 실투가 아니었다.
영도를 한 번 잡아내기 위해 아직 미완성의 무기를 꺼낸 것인지 유형근의 슬라이더는 평소와 달리 횡적인 변화가 완전히 배제된 채 아래쪽으로만 떨어졌다.
낙차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아 미완성인 티가 났지만, 딱 한 번의 승리를 따내기엔 충분한 공이었다.
[배트 끝에 걸린 타구, 하지만 유영도 선수의 타구입니다! 떨어질 때까지는 아무도 이 공의 비거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지금도 굉장히 멀리 날아가고 있거든요!]
[원바운드로 펜스 직격! 이 타구가 펜스까지 날아갑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타력! 유영도 선수는 2루에 도착합니다!]
[와... 이야... 대단하네요, 정말.]
배트 끝에 걸려 완전히 먹힌 타구였지만, 영도의 장타력은 이번에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유형근이 고집을 버리고 다른 경기에서, 새로운 경기에서 이 무기를 꺼내들었다면 모를 수도 있긴 했다.
다만, 결과는 유형근이 아끼고 아끼다 필살기로 꺼내 든 종슬라이더가 영도에게 얻어맞아 2루타가 되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대주자를 투입하는 서울 제츠. 유영도 선수를 대신해 어경준 선수가 2루에 들어가고 동시에 매지션즈의 장문호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두 선수 모두 이대로 교체될 것 같네요. 네 번 만나서 삼진, 단타, 홈런, 2루타... 이렇게 되면 이번 맞대결은 유영도 선수의 완벽한 승리죠.]
‘그냥 제 잘난 맛에 놀고먹는, 그저 그런 천재는 아니다, 이거지?’
새로운 구종이 필요 없을 만큼 리그를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서 새로운 구종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니.
슬라이더의 약점인 반대 손 타자를 상대하려 꽁꽁 숨겨두었던 신무기를 자신한테 보여준 게 꽤 기분 좋았다.
그걸 2루타로 연결한 건 더욱 기분이 좋았고.
영도와 유형근은 각자 덕아웃으로 돌아가면서 한 번씩 서로를 바라보았다.
2루를 밟았고, 오늘 맞대결에서 분명 승리한 영도의 표정은 당연히 밝았고...
허탈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의외로 유형근의 표정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
“풀타임 메이저리거 출신으로서 조언 한 마디만 부탁해도 될까요? 메이저리거 입장에서 제 공은 좀 어때요?”
경기는 매지션즈의 투수 교체에 맞춰 대타로 출전한 한영훈의 천금 같은 적시타가 터지면서 제츠의 2-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영도는 생각지도 못한 선수의 방문을 받고 잠시 퇴근을 미룬 상태였다.
“음... 구위와 슬라이더 외의 무기가 하나 정도 더 있으면 좋을 겁니다. 마지막 타석에서 보니까 본인이 알아서 잘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아... 아무래도 슬라이더는 반대 손 타자를 상대하기 까다롭잖아요. 흐흐흐... 그래서 준비 중이에요. 아직 완성은 못 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공이지만, 여기서와는 달리 유형근 선수의 힘으로도 찍어누르지 못하는 타자들이 생각보다 많을 겁니다. 구위 말고 다른 무기들을 많이 준비해두면 도움이 되겠죠.”
“음... 고맙습니다. 구위를 더 키울지, 다른 다양한 무기들을 더 장착할지 고민해볼게요. 고민이 끝나면 그때 한 번 더 붙어보자고요. 단타는 몰라도 장타는 다신 내주지 않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시고요.”
“글쎄요. 그때 열심히 하면 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발전을 위해, 목표를 위해 직접 상대 선수까지 찾아와 조언을 구하다니...
영도의 안에서 유형근에 대한 평가가 또 한 번 높아졌다.
KBO 소속 선수지만, 역시 최고에겐 최고다운 품격이 있는 듯했다.
‘과연 내게도 최고의 자리에 어울리는 품격이 있는 걸까.’
오늘 경기 중에도 확인했듯 점점 커져가는 욕심과 목표를 느끼며 영도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점검했다.
이젠 슬슬 목표를 상향조정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 품격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