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된다 > (43/200)

< 된다 >

[유형근 선수의 호투야 누구나 다 예상한 부분이겠습니다만, 윤한태 선수의 호투가 굉장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4회말 2아웃까지 안타 한 개만 내주고 오히려 병살타까지 유도해내면서 삼진 4개를 빼앗아냈습니다.]

[수원 매지션즈가 사실 투수진이 너무 완벽해서 그렇지, 타선은 유망주와 노망주들이 한 번에 폭발했다고는 해도 평균 이하긴 해요. 투수진이 차려주는 밥상을 엎어버리진 않는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그래도 아주 강력한 편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프로팀 10팀 중 하위권까진 아니에요. 스무 살의 순수 고졸 신인이 상대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제츠의 최대 라이벌, 절대 패배해선 안 되는 상대인 타이탄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러 6이닝 1실점 호투, 한 게임 차로 1위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매지션즈전에, 그것도 유형근을 상대로 등판해 3.2이닝 무실점... 굉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해서 기회를 줘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츠도 선발진이 강한 팀은 아니기 때문에 윤한태 선수 정도면 자리가 있을 거예요.]

유형근도 그렇지만, 윤한태 역시 힘을 앞세운 파워 피처였다.

유형근과 비교하면 아직 투박한 부분이 많고, 힘도 조금은 부족하지만, 전혀 분석된 게 없는 순수 신인이라는 점을 과감하게 이용해 씩씩한 피칭으로 매지션즈 타선을 잠재웠다.

[레녹스, 3구 타격! 1루 파울라인 쪽 장타 코스!!]

나정준과 함께 매지션즈의 공격력을 담당하는 3번 타자 고든 레녹스는 중견수 포지션의 호타준족이었다.

플라이벌 혁명 이후 밀어치기의 가치가 많이 낮아졌는데, 밀어치기 비중이 30% 가까이 되는 유니크한 타구 비율을 보이면서도 지난 시즌 2할 후반의 타율과 8할 중반의 OPS로 22홈런 31도루를 기록한 독특한 스타일의 타자였다.

즉, 밀어치기 전문가로, 밀어친 타구로 내야 수비를 뚫어내는 전문가란 뜻이었다.

특히 제츠의 1루는 노쇠화로 운동능력이 많이 떨어진 외야수 둘이 번갈아 맡는 포지션이었기에 레녹스의 장점이 드러나기 좋은 팀이었다.

하지만...

‘3루 수비에 집중한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네.’

오늘 제츠의 1루는 영도가 지키고 있었다.

정상급 좌완에 약한 감이 있는 한영훈이 유형근을 피하면서 휴식까지 취하기 위해 빠졌고, 대신 3루수 윤무열이 출전했기에 멀티 포지션이 가능한 영도가 1루로 옮겨온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반응한 유영도! 몸을 날려 잡아내고 윤한태에게 손을 들어 직접 해결하겠단 사인을 보냅니다. 그대로 1루를 밟으면서 쓰리 아웃! 윤한태 선수, 유영도 선수의 도움을 받아 4회 말도 삼자범퇴로 마무리합니다.]

[확실히 유영도 선수의 수비력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1루 수비가 조금 더 안정적이네요. 3루 수비도 KBO 기준 평균 정도까지 올라왔는데, 1루 수비는 유영도 선수보다 명백히 더 잘하는 선수가 바로 생각나지 않아요.]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 혹은 그 이상이라 평가받은 수비력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특히 우익수 출신 한영훈 선수나 중견수, 좌익수 출신 손성호 선수가 나이가 들면서 1루로 옮겨온 만큼 제츠의 1루 수비는 그동안 조금 불안했거든요? 유영도 선수가 나오니까 송구도 아주 쫀득하게 척척 받아주고 안정감이 달라요.]

“이야... 우리 꼬맹이... 이러다가 드랲 첫 시즌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알 박겠는데?”

“크으... 우리 성호 형, 입꼬리가 귀에 걸린 거 봐라. 영도도 오고 한태까지... 진짜 성호 형 우승시키려고 하늘이 도와주는 건가?”

“야! 이제 팬들이 조심하니까 네가 직접 젤레발 떠는 거냐? 넌 1루 수비 연습이나 좀 해!”

“맞아요! 영훈 선배, 영도가 송구 딱딱 받아주는 것 좀 보세요. 오랜만에 송구할 때 생각 없이 던져도 되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네.”

“... 조규영... 그렇게 편하면 오늘은 타석에서 한 방 기대해도 되겠지?”

“어우... 생각해보니까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6월의 시작을 패배로 장식하긴 했지만, 여전히 제츠의 팀 분위기는 좋았다.

아슬아슬하게나마 1위 자리를 지키는 중이기도 했고, 필요할 때마다 홈런이 터지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다 보니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신나 있었다.

성적이 좋으니까 신이 나고, 신이 나면서 제츠 특유의 분위기 야구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그러면서 또 성적이 좋아지고...

제츠가 잘 나가는 시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자, 자!! 막내가 이렇게 해주는데 이제 형들이 해줘야지! 타자들, 알아들었지!?”

“옙! 아저씨!!”

“넌 오늘 출전도 안 했으면서 왜 대답하냐...?”

“주장인 내 대사를 형한테 빼앗겨서 대답이라도 하려고 그랬지. 잘했지?”

아무리 제츠의 분위기가 좋고, 분위기를 타면 무서운 팀이라고 하지만, 유형근은 그 이상으로 위협적인 투수였다.

하지만 이제 막 프로가 된 막내가 그런 유형근에 맞서 씩씩하게 대등한 승부를 이어나가는 상황.

형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도야! 부탁한다!”

“부탁한다!”

“유영도 파이팅! 영도야, 가라!!”

한영훈이 갑자기 영도의 두 손을 포개 잡았고, 손성호와 조규영을 필두로 나머지 선수들 역시 영도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다음 이닝을 준비하던 영도는 당연히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저한테... 제 타석 돌아오려면 멀었습니다.”

“나도 알지. 그런데 오늘따라 더 괴물 같은 형근이한테 안타 친 선수가 너밖에 없어. 네가 해줘야지.”

매지션즈도 4이닝 동안 1안타 빈공에 허덕였지만, 제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츠의 유일한 안타는 바로 지난 이닝인 4회 초 2아웃 상황에서 영도가 때려낸 단타 하나.

다른 선수들은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기합이 더 들어간 유형근에게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으하하하!! 영도야! 일단 네가 홈런치는 게 제일 빠를 것 같다! 아니면 최소 2루타로 형근이 좀 흔들어줘!”

“그래, 그래. 형근이가 의외로 경험은 별로 없어서 주자 나가면 그나마 좀 해볼 만하거든? 일단 네가 나가고 생각하자!”

“믿습니다, 유영도 선생님!!”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영도를 어려워하던 동료들이지만, 손성호와 조규영, 한영훈이 시작한 ‘유영도 놀려먹기 챌린지’와 타이탄스전 벤치 클리어링을 계기로 그전보다는 확실히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연스러운 친분까지 거부할 생각은 없었던 영도 역시 자연스럽게 동료들과 어울렸다.

유형근은 분명 위협적이고 까다로운 타자였지만, 그게 제츠의 팀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 이 분위기면 제 다음 타석은 7회입니다. 최소한 6회에는 나갈 수 있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다만, 오늘의 영도는 시즌 초반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웠다.

유형근과의 승부를 통해 한 계단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지난 두 타석으론 부족했다.

최소한 두 번 정도는 더 상대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6회 말 공격에서 매지션즈가 드디어 윤한태 선수를 공략해 1점을 만들어냈습니다. 윤한태 선수는 임시 선발로 등판해 5.2이닝 1실점으로 역할을 120% 이상 수행했습니다만, 아쉽게도 0-1 리드를 내준 채 마운드를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윤한태 선수는 정말 잘해줬어요. 그러니 슬슬 경기 종반으로 접어드는 7회 초인데도 유형근 선수 등판 경기에서 제츠가 여전히 승리를 노려볼 수 있는 거거든요.]

[다만, 제츠는 아직 유형근 선수에게 안타 두 개를 뽑아낸 게 전부입니다. 산발적인 안타였고, 둘 다 단타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찬스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닝이 그래서 중요해요. 유영도라는 제츠 타선의 해결사가 선두타자로 나서거든요? 안성흠 선수에게도 홈런을 뽑아냈고, 19홈런으로 리그 홈런 선두를 달리는 만큼 유영도 선수의 장타를 기대해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형근 선수도 6회까지 투구 수 75개, 굉장히 경제적인 투구를 보여줬습니다. 평균 투구 수가 104개에 달하는 선수인 만큼 아직 힘도 충분히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승부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세 번째 타석인 만큼 처음 만나는 투수의 유리함도 어느 정도 사라졌을 거거든요?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입니다.]

‘149km라... 이건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경기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조금 떨어졌던 유형근의 구속은 타석에 영도가 들어서자마자 다시 빨라졌다.

유형근도 영도와의 승부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형근 선수도 이번 승부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다시 페이스를 끌어올립니다. 슬라이더가 정말 오랜만에 140km를 찍었습니다.]

[시즌 내내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유영도 선수... 확실히 많이 성장했어요. 유형근 선수라면 패스트볼이나 변화구나 전부 메이저리그급이라고 평가받는 선수인데, 유형근 선수가 좋은 슬라이더를 던져도 속질 않아요. 끝까지 지켜보면서 골라내는 모습이거든요?]

[유영도 선수는 변화구에 아주 큰 약점이 있다고 평가받지 않았습니까? 이번 시즌에는 좀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변화구가 좋은 선수를 만나면 골라내는 데 집중하고 웬만해선 스윙을 참았습니다.]

[그러니까요. 선구안이 많이 좋아졌구나, 했는데, 오늘 보니까 변화구도 끝까지 지켜보는 것 같거든요? 유영도 선수가 변화구에까지 자신감을 갖는다면 리그가 또 한 번 요동칠 것 같은데... 한 번 지켜봐야겠어요.]

‘보여. 이제 남은 건 이걸 때릴 수 있느냐인데...’

변화구 궤적이 어느 정도 보인다는 건 분명 거대한 발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변화구를 골라내는 걸 넘어 때려내는 것까지 해내야 진정한 성장이었다.

‘변화구에 속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년간 바라왔지만, 인간인지라 이제 또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쪽에서 체인지업으로 떨어뜨렸습니다만... 구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존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컴퓨터의 판단! 3-2, 풀 카운트 승부가 이어집니다.]

[이번에도 체인지업을 굉장히 잘 떨어뜨렸는데... 이걸 참네요. 메이저리그 시절의 유영도 선수였다면 분명 여기서 돌아가면서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텐데... 분명히 성장했어요.]

‘본인에게 집중하면 패스트볼, 나한테 집중하면 슬라이더 혹은 체인지업.’

풀카운트에서 본인의 장점을 믿는다면 포심을 던질 것이고, 자신의 약점을 노린다면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던질 것이다.

영도는 유형근이라는 선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형의 투수.

‘패스트볼일 확률이 높겠지.’

여기서 왠지 유인구는 던지지 않을 듯한 이미지였다.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건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반대 손 타자에게 슬라이더를 존안에 꽂아넣는 건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특히나 장타자를 상대할 땐 더더욱.

‘... 유인구!?’

하지만 유형근의 선택은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패스트볼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영도는 이를 악문 채 기를 쓰고 스윙 스피드를 늦추려 노력했다.

‘이제 나도 이런 거 할 수 있다고!!’

대책 없이 크게, 가능한 한 크고 호쾌하게 돌렸던 과거의 타격폼으로는 한 번 나간 스윙을 멈추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시즌 내내 개조한 지금의 타격폼은 하체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 안정적이고, 타격폼과 스윙 자체가 콤팩트해서 한 번 출발한 배트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게 비교적 쉬웠다.

덕분에 배트 컨트롤에 재능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영도마저 어느 정도 괜찮은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하체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허리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최대한 팔 스윙을 늦춰 일단 공을 맞추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

정교한 회전에 부자연스러운 힘이 더해지면서 허리와 엉덩이 회전으로 만들어낸 힘이 타구에 전달되지 못했고, 상체 힘만으로 때려낼 수밖에 없었다.

[배트가 먼저 출발했지만, 억지로 타이밍을 맞춰 때려낸 타구! 그런데 역시나 유영도 선수의 타구입니다! 언제나처럼 생각보다 멀리 뻗고 있습니다!]

[여기 수월 일루션 스타디움이거든요? 파크팩터에서 잠실 올림픽 파크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인 투수 친화 구장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듯한 유영도의 타구! 계속 뻗습니다! 계속! 좌익수 고윤수가 따라가면서 파울라인 바로 옆, 그리고 펜스 바로 앞에 멈췄습니다! 잡히나요? 파울? 아니면... 홈런!! 홈런입니다!] 

[이건... 진짜 유영도 선수만이 가능한 홈런이죠. 아무리 체인지업이라는 구종 자체가 타이밍을 빼앗는 용도에 집중하느라 맞으면 생각보다 멀리 뻗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그래도 반칙이죠! 이 펀치력은 반칙이에요.]

[유영도의 괴력이 또 한 번 말도 안 되는 홈런을 만들어냈습니다! 펜스를 아주 살짝 넘어가는 타구, 1-1! 리드를 빼앗기자마자 바로 균형을 맞춰냅니다.]

‘나도 이런 게 되는구나...’

영도는 허탈하게 웃는 유형근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묵묵히 베이스를 돌았다.

하지만 속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브레이킹볼을 끝까지 지켜보고 골라내는 것도 모자라 한 번 나간 스윙 타이밍을 억지로 조절해서 홈런까지 만들어내다니, 이런 걸 내가 해내다니...

오늘 경기에서 영도는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 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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