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여 >
[야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현재 리그 1위와 2위를 달리는 서울 제츠와 수원 매지션즈의 주말 3연전의 2차전! 중계를 맡은 캐스터 한윤중입니다. 도움 말씀에 SBC 스포츠 해설위원, 김유신 의원님 나와계십니다.]
[안녕하세요, 김유신입니다.]
[어제 시리즈 1차전에서 수원 매지션즈가 강희중 선수의 호투를 앞세워 5-3으로 승리하면서 승차를 한 경기로 좁혔습니다. 그리고 오늘, 매지션즈에서는 절대적인 에이스, 유형근 선수를 출격시켜 공동 1위 등극을 노리는데 경기의 향방,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래도 오늘 경기는 매지션즈가 유리하다고 볼 수 있겠죠. 매지션즈는 유형근 선수가 등판하는데, 제츠는 로테이션이 살짝 꼬이면서 오늘 임시 선발, 윤한태 선수가 다시 한 번 2군에서 올라왔거든요?]
[윤한태 선수라면 지난 어린이날 3연전 1차전에 출전해 타이탄스를 상대로 굉장히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른 고졸 신인 투수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무게감 차이는 있죠. 윤한태 선수도 정말 재능있는 선수고, 앞으로 제츠와 한국 야구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에이스의 재목이지만, 아직 1군에서 보여준 게 너무 적어요.]
[이번 시즌 유형근 선수는 지금까지 12경기에 등판해 8승 2패, 방어율 2.17에 FIP 2.25로 리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탈삼진은 무려 113개, 피홈런은 고작 3개에 불과합니다.]
[사실, 오늘 경기의 화두는 유형근 선수와 윤한태 선수의 선발 맞대결이 아니라 유형근 선수와 유영도 선수의 통산 첫 번째 맞대결이죠. 힘과 힘의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 야구인으로서 굉장히 궁금합니다.]
“영도야! 어휴, 어제는 내가 선발 등판 날이라 인사를 못 했네. 잘 지냈냐?”
“잘 못 지냈습니다. 어제 선배한테 막히는 바람에 기분이 좀 나빠서요.”
“와... 이 양심 없는 새X... 타자가 투수한테 2루타 하나 가져갔으면 할 만큼 한 거지, 대체 날 얼마나 졸로 봤길래...”
“하하하, 제가 요즘 좀 날리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만족 못 하죠.”
서울 드래곤스의 롱릴리프 겸 마당쇠 김재훈이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였다면, 어제 경기에서 수원 매지션즈 선발로 등판했던 강희중은 2선발이었다.
대회 직전 부상을 당해 본의 아니게 영도의 불행에 일조한 바로 그 투수.
다만, 침묵했던 김재훈과 달리 강희중은 사건이 기사화됨과 동시에 영도에게 연락해 본인 잘못이 아님에도 사과를 전했고, 이후에도 종종 안부를 전해왔다.
어떻게 보면 그 어린 나이에 그들도 당황했을 테고, 김재훈처럼 침묵하는 게 나이에 맞는 행동이었을 텐데, 그만큼 강희중은 성격이 좋았다.
영도 역시 동생인 승도나 오일도, 신초희 같은 지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강희중 앞에서 역시 어느 정도 과거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너 한국 온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냐? 무조건 우리 팀으로 오라고 했지!? 내가 고등학교 때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괴물이라고 생각했다니까?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하는 거야. 투수만 잘하고 타자만 잘하고 이런 거 없다니까?”
“선배. 매지션즈는 고든 레녹스랑 일찌감치 재계약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매지션즈로...”
“아마 너랑 계약 안 될 것 같으니까 재계약한 걸로 아는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4선발이 뭘 알겠냐.”
“에이, KBO에서 4선발이면 귀한 몸 아닙니까? 그것도 투수 왕국 매지션즈의 4선발인데.”
강희중도 부상 후유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활에 성공하면서 매지션즈의 4선발로 활약 중이었다.
유망주 풀에 비해 지나치게 프로팀이 많아 만성적인 선수 부족, 특히 선발투수 부족에 시달리는 KBO에서 투수 왕국 매지션즈의 4선발이면 충분히 귀한 몸이었다.
“진짜 귀한 몸은 오늘 선발인 형근이지. 그래, 너도 형근이는 좀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 자식 공은... 진짜 장난 아니거든.”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유형근 선수 공략하려고 정말 엄청나게 많이 준비했거든요.”
“... 음? 그렇게 나오면 또 불안한데... 우리도 올해는 우승해야 해. 정준이 형이랑 경우 형이랑 박진영 선배님까지 영입하느라 돈 많이 썼는데, 이건 무조건 우승하겠다는 거거든.”
“박진영 선배님이면 우리 손성호 선배님보다 한 살 어리시죠? 아쉽지만, 우리가 좀 더 급합니다.”
투수 육성 전문 감독과 코치 듀오를 선임, 투수진을 안정시키자마자 갑자기 쌓여있던 타자 유망주들이 폭발한 매지션즈는 이번 시즌을 우승 적기로 보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먼저 지난 시즌 시작 전에 KBO 최고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우익수 나정준에게 5년 120억, 역대 FA 계약 규모 4위에 달하는 금액을 안겨주었다.
올해는 팀의 마지막 약점이자 커다란 구멍이었던 유격수와 포수 포지션에 수비형 유격수로서 조규영과 NO.1을 다투는 손경우, KBO 역대 포수 순위를 매기면 TOP 5안에는 들어간다는 베테랑 박진영을 영입, 우승할 준비를 마쳤다.
“한 번 보자고. 우승? 일단 우리 형근이부터 넘어서야 할걸.”
“그렇게 믿고 있는 유형근 선수, 오늘 한 번 공략해보겠습니다.”
사실, 손성호가 계속 세뇌하다시피 주입해서 우승 욕심이 조금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우승? 하면 좋지.’ 정도였다.
다만, 유형근은 공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영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굉장한 투수긴 하지만, 나도 준비 열심히 했다고. 지금의 나라면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유형근은 정말로 좋은 투수일 것이고, 분명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도의 페이스도 대단했다.
이 정도 자신감은 충분히 내보일 자격이 있었다.
***
[서울 제츠가 자랑하는 테이블 세터진을 가볍게 잡아내는 유형근!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가볍게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올렸습니다.]
[역시 대단한 선수예요. 좌완 투수인 유형근 선수에 대비해 좌타자 한영훈 선수에게 휴식을 주고 우타자 박윤형 선수를 2번으로 올렸는데, 일단 첫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은 제츠가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원래 올라갈 때 우와아악! 하고 올라갔다가 내려갈 때 우와아악! 하고 내려가는 게 제츠의 팀 컬러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분위기가 좋을 때 최대한 다른 팀들과 승차를 벌리고 싶을 텐데, 한 경기 앞서는 것 가지고는 많이 불안하거든요?]
[유형근 선수가 등판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넘기기엔 그렇게 되면 2연패가 되거든요. 제츠는 연패에 굉장히 약한 팀이고, 또, 여름에 약한 팀이라 분위기 좋을 때의 한 경기, 한 경기가 매우 중요해요.]
‘내가 대기타석에서 봐서 그런 건가... 생각보다 공이 눈에 좀 들어오는데.’
손성호와 박윤형이 맥없이 무너지고 3번 타자 영도의 타석이 돌아왔다.
두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주의 깊게 유형근을 관찰한 결과...
생각보다 공이 눈에 들어온다는 결론이 나왔다.
영도 본인도 놀랄 정도였는데, 개인적으로 판단한 유형근의 수준은 최소한 메이저리그 4, 5선발급, 컨디션 좋은 날은 3선발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 4, 5선발급 투수만 만나도 브레이킹볼에 허공만 붕붕 가르던 영도였기에 꽤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옆에서 봐서 그런 걸 수도 있어. 투수들의 공은 타석에 선 타자들을 속이기 위해 발전한 공이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절대 방심하지 않고, 처음 유형근의 영상을 분석할 때부터 느꼈던 위압감을 잊지 않고 타석에 섰다.
공 좀 보인다고 무시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드디어 이번 시즌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가 만났습니다. 시즌 첫 맞대결이자 통산 첫 맞대결!]
[안성흠 선수는 유영도 선수에게 일단 1패를 기록했거든요? 과연 유형근 선수는 KBO의 매운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평균 구속 149km, 최고 구속 157km.
마일로 환산했을 때, 평균 구속 93.1마일로, 메이저리그 좌완 선발 평균 구속인 91.7마일보다 1마일 이상 빨랐다.
타자를 힘으로 찍어누를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역시 훌륭해. 이 정도면 KBO 내 외국인 선수는 물론이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 이상, 상위 30% 안에는 충분히 드는 패스트볼이겠지.’
초구는 역시 자신 있는 포심을 선택한 유형근.
영도 역시 예상했지만, 실투가 아닌 이상 쉽게 건드리긴 어려웠다. 특히나 경기 초반에는.
그걸 알기 때문에 유형근도 최소한의 로케이션만 가져가면서 자신 있게 포심으로 찌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패스트볼은 때릴만해. 메이저리그에서도 패스트볼 대처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결국, 이 맞대결의 핵심은 유형근의 위력적인 포심 패스트볼 사이에 섞이는 훌륭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영도가 골라내거나 때려낼 수 있느냐였다.
메이저리거 시절에는 이걸 못해서 지명할당 후 방출이라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이야! 기가 막히게 휘어져 들어오는 139km짜리 백도어 슬라이더가 다시 한 번 스트라이크 존에 걸쳤습니다. 순식간에 0-2, 유리한 볼카운트를 만들어내는 유형근 선수!]
[유형근 선수의 주 무기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20-80 스케일에서 60점은 줄 수 있는 슬라이더라고 했는데, 그 정도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수준급이에요.]
‘보인다!’
워낙 절묘한 코스로 들어온 백도어 슬라이더라 어떻게 대처할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눈에 보였다는 것이었다.
브레이킹볼에 대처하기 위해 배트가 출발하는 타이밍을 최대한 늦췄고, 볼을 지켜보는 시간을 최대한 늘렸지만, 이게 맞는 건가, 하는 불안감이 아직까진 있었다.
하지만 타격폼 변경 후 이번 시즌 성적 자체가 굉장히 훌륭해서 점점 자신감이 쌓이는 중이었는데...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유형근의 슬라이더가 이제는 눈에 보였다.
‘카운트 몰린 건 중요하지 않아. 이 정도 급 투수의 슬라이더가 눈에 보인다고!’
천하의 유영도라도 이 순간만큼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잠시나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킹볼을 공략하지 못해 휘두른 스윙이 수만 번이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 보낸 시간이 수백, 수천 시간이었다.
KBO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잠시 경쟁이 덜한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얻어내려 했던 것 역시 브레이킹볼 대처 능력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영도를 괴롭혀 온 문제가 드디어 해결될 기미를 보인 이 순간.
천하의 유영도가 경기 중 빈틈을 보였다.
[바깥쪽!! 삼진! 삼진입니다! 유형근 선수, 유영도 선수와 첫 맞대결에서 바깥쪽 패스트볼로 삼구 삼진을 잡아내며 먼저 웃었습니다.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선발투수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1회 초를 마무리한 유형근! 오늘도 유형근은 굉장합니다.]
[이번에는 유영도 선수가 생각보다 너무 무기력했네요. 스타일상 삼진이 적은 타자가 아니고, 오히려 많을 수밖에 없는 타자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죠.]
‘아무리 기다려온 순간이라지만, 그래도 빈틈을 보이다니... 나답지 않았어.’
유형근이 자세를 취한 순간 뒤늦게 집중력을 되찾았지만, 확실히 150km의 포심은 빨랐다.
첫 대결은 아쉬운 패배로 끝났지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영도의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이제 겨우 한 타석. 다음 타석부터는 조금 더 제대로 상대해봐야겠어.’
브레이킹볼이 눈에 보이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이제는 그 보이는 브레이킹볼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할 시간이었다.
‘다음 타석에 보자고.’
그런 의미에서 유형근은 이제 막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 영도가 다양한 고민과 시도를 실험해볼 만한 최고의 상대였다.
유형근은 그저 팀의 승리와 개인적인 자존심으로 영도를 상대하려 하겠지만, 영도는 달랐다.
오늘 경기 승리? 영도에게 팀의 승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 마찬가지로 영도는 자신이 자존심을 세울 만큼 대단한 선수라고 아직은 생각하지 않았다.
영도에게 이번 대결은 선수로서의 성장과 앞으로의 커리어를 가늠해볼 만한 대결이었다.
커리어가 걸린 대결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차원이 달랐다.
타자가 불리한 상황에서 처음 만난 투수를, 그것도 메이저리그 3, 4선발급 투수를 상대로 첫 타석 삼진?
10타석에서 3번의 안타만 쳐내도 합격인 타자에게 첫 타석 삼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공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 보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