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스전 >
“얘들아! 내가 말했지? 나 영도랑 친하다니까? 한 경기 출장 정지 징계 떨어진 게 오늘 오후였는데, 징계 떨어지자마자 전화했더니 한 경기 못 나가는 김에 오늘 오겠다고 바로 왔잖아. 내가 이런 선배야! 영도가 존경하는 선배라고!!”
ㄴ 올... 아재... 진짜였네? 진짜 오늘 전화했는데 오늘 왔다고?
ㄴ 유영도 착하다... 영도 형, 미안해. 우리 아재가 철이 없어서... 대체 현역 선수한테 시즌 중에, 그것도 당일 전화해서 섭외하다니 이게 무슨 실례야?
ㄴ 아재도 현역 출신이면서 이건 좀 심한 거 아님?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떠나서 아재 대단하긴 하네. 그동안 했던 말이 거짓말은 아닌가 봐.
ㄴ 진짜 존경하는 선배냐고 물어보자. 불쌍해서 온 걸 수도 있잖아.
“존경... 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선배님입니다. 고마운 것도 많고. 다들 이쯤 되면 눈치채셨을 텐데, 제가 야구 외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아요. 일도 선배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정중하게 거절했을 겁니다.”
“이거 봐! 보라고! 내가 이 정도다, 이 말이야! 현재 리그 홈런 1위, 타점 1위, 장타율 1위, OPS 1위, WAR 1위의 어마어마한 선수가 내 이름만 딱 보고 시즌 중에 방송 출연까지 해주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수많은 선수들을 내던졌지만, 원인 제공을 타이탄스 쪽에서 한 피해자이기도 했고, 직접적인 타격 행위가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벌금 200만원, 한 경기 출장정지라는 비교적 가벼운 징계가 떨어졌다.
일요일 경기였고, 월요일은 원래 리그가 쉬는 날이기에 갑자기 생긴 이틀의 휴식.
영도는 KBO 진출이 결정된 순간부터 방송 출연을 부탁했던 오일도의 개인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다.
“일도 선배님께는 중학교 시절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죠. 학연, 지연, 혈연 같은 게 부정적인 측면도 많고, 그런 부분이 많이 강조되긴 하지만, 전 학연 덕분에 선배님 덕을 많이 봤습니다.”
“뭐... 학연이 문제되는 건 피해자가 있다는 것 때문이니까. 내가 영도를 도와준 것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본 것도 아니니 이건 순기능이라고 해야겠지? 너희도 인정하지?”
ㄴ 인정. 오히려 아재가 있어서 다행이네. 아재 아니었으면 한국에 완전 정나미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아니, 뭐... 내가 한 게 그렇게 대단한 것까진 아니었는데...”
“한국에서의 좋은 기억도 꽤 많습니다. 한국의 모든 선배나 지도자들이 전부 나쁜 기억으로 남은 것도 아니고요. 저한테 피해 준 사람이 누군지 명확한데 굳이 한국 야구계 전체에 악감정을 가질 필욘 없죠. 그러면 저만 피곤합니다.”
“크으... 어때? 우리 영도 완전 성숙하고 어른스럽지? 얘가 이렇다니까?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오히려 그 나이답게 구김살 없이 맑은 성격이었지만, 지금 모습도 나쁘진 않아요. 한참 선배인 입장에선 나쁘지 않지만...”
“선배님이 비교적 젊게 사시니까요. 저라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ㄴ 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아재, 한 방 먹었죠? 아프죠?
ㄴ 유영도 생각보다 윾쾌한데? 뭐가 진짜 모습이지?
ㄴ 사람한테 한 가지 모습만 있겠냐?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는 거지.
ㄴ 내 상상이랑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보기 좋네. 아직 20대 중반이면 한창 젊은 나이인데, 너무 진지하기만 한 것도 안 좋아.
ㄴ 그래도 내 생각보다 밝은 것 같아 다행이네. 너무 어릴 때 안 좋은 꼴을 겪어서 걱정했는데.
“선배님은 제가 그 꼴 보기 전부터 친했던 분이니까 그 시절 성격이 어느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구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 여러분들 걱정처럼 우울하고 그렇진 않아요.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무슨 와이번스 편파 방송인데 제츠 선수한테 이렇게 너그러워? 나는 그래도 너희는 그러면 안 되지!”
ㄴ 다 아재 때문이잖아!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애초에 여기가 제츠 편파 방송인 줄 알 텐데!
ㄴ 본인이 제일 심하면서 이 악물고 억울한 척하는 거 역겹죠? 어이가 가출하죠?
ㄴ 진짜 이번 시즌 시작하면서부터는 와이번스 다루는 컨텐츠랑 유영도 다루는 컨텐츠랑 거의 반반인 듯...
ㄴ 유영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제츠까지 다뤄버리니...
ㄴ 진짜 아재랑 의리 때문에 본다니까?
“하하하... 이왕 이렇게 된 것, 와이번스 응원하시면서 두 번째 팀으로 우리 제츠도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꼭 제츠 응원 안 해도 유영도라는 선수 개인은 응원해주실 수 있으시죠? 믿겠습니다.”
꾸준히 영도를 다뤄온 덕분에 오일도의 개인방송 시청자들은 영도에게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러 이유로 한국 야구팬 대부분이 영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 시청자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안 그래도 요즘 제가 리그에서 활약해서 그런지 처음 왔을 때보다 저한테 장난스레 뭐라 하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도 좀 예쁘게 봐주세요.”
아무리 유영도 개인을 응원하더라도 그 선수가 내가 응원하는 팀을 폭격하면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대충 잘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리그 MVP급 활약을 선보이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MVP급 활약이어서 이 정도지, 약 먹은 배리 본즈급으로 폭격했으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점점 리그에 적응하는 것 같은데, 후반기엔 그 정도 해보고 싶네. 궁금하기도 하고.’
리그를 아예 박살 내버리면 지금보다 더 얄미워할까,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더욱 응원해줄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그 정도 활약이면 KBO 출신 메이저리거 한 명 늘어나는 게 거의 확정되는 것과 다름없으니 더욱 응원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그래. 받고 와.”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잠시 나온 영도는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왜?”
[야!! 너 지금 뭐해!?]
“일도 선배님 개인방송에 잠깐 나와달라고 하셔서 나와있는데?”
[그러니까 네가 거길 왜 가냐고! 내가 방송 한 번 출연해달라고 했을 때는 훈련하느라 바쁘다고 거절했으면서!! 심지어 나는 제츠 자체 방송팀인데도 거절했잖아!!]
전화의 주인공은 서울 제츠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리포터 겸 PD로 재직 중인 고교 동창이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이긴 했지만, 당시 소위 말하는 ‘인싸’였던 영도는 친구가 꽤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친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네가 오일도 선수랑 친한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네가 제츠 소속인데 제츠 자체 제작 방송이 먼저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넌 이번에 부탁 안 했잖아. 징계 받은 김에 시간이 나서 나온 건데. 평소에 나 어떻게 사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아니, 그런... 에휴... 내가 말을 말지. 시간이 되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던가! 너랑 같이 찍으려고 준비한 컨텐츠가 얼마나 많은데!! 네가 없어서 다 내 컴퓨터 안에서 자고 있다고!]
“그래. 그럼 나중에 나 징계받으면 그때 찍자. 그땐 시간 내 볼 테니까.”
[... 그래도 징계는 좀... 이번 시즌 우리 분위기 좋은데...]
“야... 초희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시즌 끝나고 너 메이저리그 돌아가기 전에...?]
“시끄러워. 그럼 할 말 다 끝났지? 나 빨리 가봐야 하니까 끊는다?”
[... 그래라... 나중에 밥이나 한 끼 하면서 또 이야기하자고. 그냥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나 삐졌으니까 거절할 생각도 하지 마! 나와서 도시락 처먹더라도 일단 나와!]
“아니, 친구한테 단어 선택이 그게 뭐냐? 제츠 방송국의 얼굴이라더니 ‘제츠 여신’이 입이 그렇게 거칠어서 쓰겠어?”
오일도도 그렇고, 신초희도 그렇고...
오늘따라 티 없이 맑았던 과거의 인연들을 계속 만난 덕분에 오랜만에 옛날 기억도 나고 옛날의 밝은 성격도 나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삶이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몸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빠지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나이 먹고도 어릴 때 친구를 계속 만나는 이유가 있었다.
“야! 누구냐? 여자냐? 여자랑 전화한 거야?”
“예? 예... 뭐... 일단 여자이긴 합니다만...”
“오오오오!! 얘들아! 우리 생각이 맞았어! 역시 유영도는 기만자였다, 이거야!!”
ㄴ 기만자다, 매우 쳐라!!
ㄴ 그치... 저 얼굴로 우리랑 동지일 리 없었어...
ㄴ 괜한 기대였다... 저렇게 생기면 저렇게 재미없게 살아도 여자친구가 있는 거구나...
ㄴ 여자? 여자와의 전화통화라는 게 실제로 가능한 거였어? 전설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ㄴ ???????? 유영도 겁나 재미없게 사는 거 아니었냐? 연애를 한다고!?!?
“아니, 여자친구가 아니고...”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했다.
잠깐 뭐가 씌어서 이상한 생각을 했지만, 역시 친구놈들은 하등 쓸데없었다.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베스트 3를 뽑으면 무조건 들어가는 게 어릴 때 친구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혔다.
***
[어린이날 3연전 스윕 이후 완전히 분위기 탄 서울 제츠! 파죽의 10연승 달성!!]
[5월 한 달간 20승 6패! 서울 제츠, 38승 18패로 승률 0.679로 내달리며 리그 1위 등극]
[“이번에야말로 다르다!” 23년을 기다려온 서울 제츠의 염원, 이번에는 진짜 다를까?]
어린이날 시리즈 승리의 효과는 굉장했다.
어린이날 시리즈 역대 전적에서 27승 26패로 한 걸음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벤치 클리어링을 통해 기선 제압까지 성공했으며, 그 기세로 3연전 스윕까지 달성한 완벽했던 시리즈.
그 이후 완벽하게 분위기를 탄 제츠는 ‘분위기만 타면 우승후보’라는 별명을 좋은 의미로 증명하며 10연승을 달려버렸다.
5월이 끝난 지금 서울 제츠의 순위는 1위.
리그 2위 수원 매지션즈가 두 게임 차로 따라붙으며 그나마 가까이 있었고, 3위 대전 에이스는 여섯 게임, 4위 서울 타이탄스는 일곱 게임까지 뒤떨어졌다.
전체 시즌의 40% 정도를 소화하며 슬슬 중반에 접어드는 지금, 우승이나 최종 순위까진 몰라도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었다.
[리그 일정 40% 소화한 현재, ‘비운의 메이저리거’ 유영도의 성적표는? 장타율 0.632(1위), OPS 1.009(1위), 19홈런(1위), 59타점(1위), WAR 3.3(1위)...]
[유영도의 2040시즌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5월 초중순 들어 상대 투수들의 급격한 견제로 잠깐 고전했지만, 다시 살아나는 모습 보여...]
[리그 적응 마친 유영도, 과연 풀타임 메이저리거의 KBO 진출 후 성적 의문 풀릴까?]
타율 0.308(12위), 출루율 0.387(13위)는 그렇게 높은 편까진 아니었지만, 어차피 영도에게 기대하는 건 타율과 출루율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에 비해 높았으면 높았지, 낮진 않았고, 기대했던 장타 부분은 기대치를 훨씬 초월했다.
중국식 계산으로 풀시즌 홈런 기대치는 48개였고, 이 기세대로라면 WAR도 8.5까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성적.
심지어 최근 들어 점점 성적이 좋아지는 추세였기 때문에 지금 예상 성적보다 훨씬 좋은 스탯을 기록할 확률도 절대 낮지 않았다.
서울 제츠의 질주에 영도의 활약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건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홈런타자 한 명만 있어도 제츠 타선의 무게감이 확 달라질 거라던 전문가들의 말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고, 제츠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분위기빨’도 쉽게 탈 수 있었다.
어지간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KBO에 오게 된다면 바로 MVP급 활약이 가능하다던 메이저리그 팬들의 말도 이쯤 되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만난 KBO 대표 에이스와 메이저리거! 수원 매지션즈, 서울 제츠와의 6월 첫 3연전 중 2차전 선발로 유형근 확정!]
[KBO를 대표하는 젊은 피, 좌완 에이스 유형근은 과연 정말로 메이저리그급일까?]
[풀타임 3년 차에 맞이한 메이저리그 쇼케이스? 유형근, 유영도 잡고 2년 뒤 포스팅 준비 돌입하나]
KBO를 대표하는 우완 에이스가 안성흠이라면 좌완 에이스는 유형근이었다.
올 시즌 한국 나이로 25세, 풀타임 3년 차인 유형근은 첫 시즌 신인왕을 수상한 이후 지난 시즌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KBO 선발 NO.1 자리를 꿰찼다.
유일하게 같은 급으로 평가되는 선수가 안성흠이었으나, 안성흠도 굳이 따지자면 반수 정도 아래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
덕분에 다음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자격을 얻게 됨에도 2년을 더 기다려 FA를 기다릴 것이란 평가가 우세한 안성흠과 달리 2년 뒤 포스팅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어때? 형근이가 성흠이보다 좀 더 까다롭나?”
“저와의 대결로 메이저리그 성공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유형근 선수도 굉장히 좋은 투수라.”
“오? 그건 뭐야? 유형근도 너한테는 상대가 안 된다는 뜻?”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성흠이가 훨씬 까다롭습니다. 같이 힘으로 붙어주면 오히려 고맙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영도는 승부가 그리 치열하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걱정이었다.
정교한 커맨드와 수 싸움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안성흠과 달리 유형근은 전형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투수였는데...
영도가 힘에서 누구한테 밀리거나 눌릴 리 없었으니까.
< 보스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