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어린이가 행복한 날 > (39/200)

< 어린이가 행복한 날 >

“꺄하하하하!!”

“아빠! 아빠! 나 봐봐! 나 하는 거 봐!!”

“엄마! 나도 저거, 나도 저거 할래애!!”

경기 시작 수 시간 전부터 잠실 올림픽 파크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합동 사인회에 참여하지 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미션 릴레이, 줄다리기, 캐치볼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렸고, 아이들은 부모들을 따라다니며 어린이날 찾아온 선물을 즐겼다.

“저는 요기! 요기에 해주세여!!”

영도는 손성호, 타일러 로즈, 김진형, 박봉균, 장진규와 함께 합동 사인회에 나섰다.

경기 직전 다른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어린이날이기에 예외였다.

“여기에? 왜? 왜 꼭 여기에 해야 하니?”

“으음... 잘 몰라여! 그래도 요기에 해주세여.”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는 정확히 야구공의 실밥과 실밥이 가장 가깝게 마주 보는 곳, 소위 말하는 스윗 스팟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사인볼이 제값을 받으려면 꼭 사인이 그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자리였다.

“하하... 그래. 알았다. 형도 여기가 제일 멋있다고 생각해.”

아마 어딘가의 얼뜨기 콜렉터가 아이를 데리고 온 듯했다.

사인을 스윗 스팟에 받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선 자신의 사인이 판매되는 것에 거의 강박적인 거부감을 가진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선수가 스윗 스팟에 사인해준다는 걸 모르는 초짜.

“저 아이랑 같이 온 부모... 체크해두세요.”

“예. 알겠습니다.”

노련한 콜렉터는 보통 몇몇 선수들과 친분까지 쌓아둘 정도로 선수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보통 진심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팬인 경우가 많고, 재판매하는 경우보다는 개인소장하는 경우가 많기에 굳이 나쁘게 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저런 초짜들은 유의해야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팬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선수들의 팬서비스가 중요한 만큼, 팬들의 예의도 중요했다.

일례로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노트 한 장 스윽 펼쳐서 사인해달라고 하는 건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에게 사인은 말 그대로 자신을 대신하는 것인데, 그걸 대충 찢은 연습장 한 페이지에 해달라고 하면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초짜 컬렉터들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선수에 대한 예의 측면에서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에휴... 하여튼 저런 사람들이 꼭 나중에 정중하게 거절해도 SNS 같은 데다가 헛소리나 찍찍 갈겨댄다니까.”

“타일러. 저 사람이 아직 무슨 일을 한 건 아니야. 정말 순수한 팬인데 오늘은 어린이날 사인회라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보낸 걸 수도 있다고.”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그냥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지,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브로.”

“... 조지 스넬은 경기 준비한다고 거절했다는데, 넌 어떻게 된 거야.”

“훗. 진정한 에이스는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컨디션이 흔들린다거나 해서는 안 되는 법.”

“그거 미안하군. 나만큼 경기 전 행동에 강박적인 선수도 거의 없을 텐데.”

“크흠, 브로... 이것도 그냥 그렇단 이야기야...”

그 어떤 경기보다 치열한 어린이날 시리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기 전 분위기는 그 어떤 경기보다 훈훈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모든 선수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국내에서 제일 넓은 이 올림픽 파크를 가득 메운 어린이 팬들...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승리를 선물하고 싶은 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

[4구 쳤습니다! 유격수 쪽 깊은 타구! 조규영! 조규영이 다이빙 캐치로 건져내 스텝 없이 1루우우!! 아웃! 아웃입니다! 조규영의 전매특허, 다이빙 캐치 후 노스텝 송구! 1루에서 박봉균을 잡아냈습니다!]

[이야... 박봉균 선수는 타이탄스의 돌격대장이거든요? 5시즌 연속 40+도루를 기록 중인 대도 중 한 명인데, 저 깊은 타구로 다른 선수도 아니고 박봉균을 잡아내네요.]

[역사와 전통의 어린이날 시리즈다운 수비입니다. 첫 아웃 카운트부터 심상치 않은 오늘 경기! 역시 두 팀의 어린이날 시리즈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어린이 팬들이 결국 구단의, 나아가 리그의 미래거든요? 어린이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야구가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을 수 있는 겁니다. 선수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죠.]

안 그래도 절대 패배해선 안 되는 라이벌전.

거기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어린이 팬들의 기대 어린 눈망울.

언제나와 같은 어린이날 시리즈였다.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눈에 띄게 달아오른 모습이었고, 조규영이 1회 초 첫 아웃 카운트부터 멋진 수비를 보여주며 일찍이도 장작을 넣었다.

[어린이날 시리즈는 그냥 한 경기가 아닙니다. 라이벌전? 어린이 팬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어린이날 시리즈의 승패가 양 팀의 시즌 초반을 결정하는 분기점이었습니다.]

[매 시즌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가 꽤 있었죠. 잘 나가다가 여기서 지고 분위기가 축 처지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고... 그만큼 중요한 경기라는 거예요.]

‘이제 이 정도는 끊을 수 있어.’

타일러 로즈는 박봉균과 최형두를 가볍게 잡아낸 뒤, 좌타자 이윤지에게도 절묘하게 붙인 몸쪽 공으로 내야 땅볼을 끌어냈다.

다만, 빗맞은 타구가 높게 튀면서 처리하기 쉽진 않았다.

[3루수가 빠르게 반응해서 끊어내고 1루 송구! 아웃! 서울 제츠 내야진에서 또 한 번의 좋은 수비가 나왔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타구라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절대 쉽지 않은 수비예요. 지금 유영도 선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침착하게 처리해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조급하거나 서두르면 볼집 안에서 공이 돌아버리거든요? 아주 안정적인, 좋은 수비였어요.]

“오올... 당연히 뒤로 흐를 줄 알고 레이저 송구 한 발 장전 중이었는데... 이걸 잡았네? 웬일?”

“연습을 그렇게 죽어라 하는데, 인간이면 저도 성장이란 걸 해야지 않겠습니까.”

“에이, 재미없게.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나도 솔직하게 말해줘야 하잖아.”

“칭찬 감사합니다.”

아무리 장난기가 넘치고 요즘 영도 놀리기에 맛 들린 조규영이라지만, 영도가 수비에 쏟는 노력을 알기에, 그 욕심과 간절함을 알기에 장난이라도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특히 조규영 본인의 수비력은 영도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보니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래. 많이 늘었네. 원래 수비는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안정적으로 잡는 게 가장 중요한 거거든. 못 잡을 걸 화려하게 잡아내는 게 멋은 있지만, 그건 보너스 같은 거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수비는 좋았어. 많이 성장한 게 보여.”

“선배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뿌듯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게 틀리진 않았나 봅니다.”

에이스의 위력적인 호투와 야수들의 인상적인 수비.

1회 초부터 서울 제츠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12-6 커브! 유영도 선수, 정말 오랜만에 스탠딩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완전히 허를 찔리면서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원상, 뜁니다! 앉은 채로 그대로 던져버리는 이성효 선수, 2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역시나 또 한 번 강한 어깨를 보여주는 저격수 이성효!]

[3구 타격! 어? 이거 애매한데요? 중견수, 좌익수, 유격수까지 한 자리에! 이 타구는... 박봉균!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몸을 날려 걷어내는 중견수 박봉균의 엄청난 호수비!]

서울 타이탄스는 팀 분위기 그대로 탄탄하고 물샐 틈 없는, 인간미 없는 플레이를 보여주는 팀이었다.

주전 라인업의 대부분이 두 자릿수 홈런이 가능한 묵직한 타선과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안 보이는 탄탄한 수비력이 타이탄스의 최대 장점이었다.

오늘 역시 언제나처럼 정교하게 딱딱 맞춰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경기 중반까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타일러 로즈! 전매특허, 하이 패스트볼로 김진형을 돌려세웁니다! 너희가 우리 영도를 삼진 잡았어? 그럼 나도 김진형 잡는다! 왼손을 불끈 쥐고 하늘로 뻗어 보이면서 호쾌한 세리머니를 보여줍니다. 타일러 로즈는 이런 게 매력이죠. 조지 스넬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선수입니다.]

[레오나르도 뉴컴, 오랜만에 장타성 타구! 중견수, 중견수 뒤로! 어!? 살짝 중심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만, 쓰러지면서 걷어냅니다. 뭔가 애매모호한, 하지만 분명한 호수비! 본인도 민망한지 멋쩍게 웃습니다. 하하하, 동료들이 달려와서 엉덩이를 걷어차 버립니다.]

[3구 타격, 높이 뜹니다. 벌떡 일어나서 쫓아가는 포수 유희운. 계속 쫓아가고, 계속 쫓아갑니다! 다이빙 캐치 시도, 성공합니다! 공이 미트에 다소곳이 앉았습니다. 우희운의 멋진... 아, 또 맞네요. 제츠에선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면 엉덩이를 걷어차여야 하는 건가요?]

반면, 제츠는 1회 말부터 분위기를 끌어올린 덕분에 평소보다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선수들도 평소보다 더 밝았고, 서로 장난까지 치면서 제츠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성적은 보통 약간이나마 타이탄스가 더 우위고, 연고지도 같은데, 인기는 제츠가 더 많은 이유였다.

하지만 경기 중반인 5회 초.

양 팀이 뽑아내는 계속된 명장면으로 인한 팽팽한 흐름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9번 타자 쪽에서 안타가 나오면서 1사 1루의 찬스를 잡았거든요? 주자를 두고 세 바퀴째 타순이 돌게 되었는데, 그동안 산발적으로 출루하긴 했지만, 이건 느낌이 또 달라요. 다른 팀도 아니고 타이탄스의 상위타순인데요.]

[지금 승부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타일러 선수도, 박봉균 선수도 신중하게 서로를 노려보고... 투수 와인드업, 3구 던졌습니다! 쳤습니다! 힘을 잃고 굴러가는 타구, 어!? 그런데 이거!!]

[어? 이거 분위기가 묘해지는데요? 지금 완전히 밀린 타구였는데, 코스가 너무 절묘했어요! 저 느린 타구가 데굴데굴 굴러서 외야의 시작을 표시한 잔디까지 굴러갔어요!]

현재 타율이 2할도 안 되고 OPS가 5할을 겨우 넘은 9번 타자 박준상의 안타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박봉균의 하늘이 도운 안타.

1사 1, 2루. 양 팀 통틀어 오늘 경기 최고의 찬스가 찾아왔다.

“됐어, 됐어!! 나만 믿어!!”

“저 인간은 대체 저런 말을 어디서 배우는 거야? 안녕하세요도 제대로 못하면서...”

타일러도, 조규영도 평소처럼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긴장감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시즌 초반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경기,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팽팽하게 이어져 온 분위기...

그 모든 게 걸린 승부처였으니 긴장을 안 하는 게 이상했다.

‘다들 날카로운데...’

경기 시작 전부터 달아올랐던 양 팀 선수들은 계속된 살얼음판 승부에 예민해지고 흥분한 상태였다.

워낙 중요한 승부처다 보니 모든 집중력을 끌어올린 듯했다.

[정말 중요한 순간입니다. 제츠는 여기서 내야 땅볼을 유도하려 할 테고, 최병두 선수는 어떻게든 내야 땅볼만큼은 피하고 싶을 겁니다.]

[두 선수의 집중력이 대단한데요? 타일러가 던지는 모든 공이 위력적이고, 이를 골라내는 최병두의 집중력도 감탄이 나옵니다.]

모든 집중력을 끌어올린 투수와 타자는 굉장히 수준 높은 승부를 보여주었다.

타자를 살살 꼬시는 투수와 이에 넘어가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타자.

하지만 투수와 타자의 승부는 결국 스트라이크 두 개와 볼 세 개, 그 안에서 결정날 수밖에 없었다.

[존 안에서 밖으로 떨어지는 커터에 끌려 나온 배트! 유격수 앞 땅볼! 조규영 잡아서 2루 송구, 다시 1루... 아!! 깊었습니다! 지금 슬라이딩이 너무 깊었어요!]

[아... 박봉균 선수의 승부욕이 또 너무 강했네요. 이 선수가 종종 이런 장면을... 어!? 이건 아니죠!!]

너무 중요한 승부처였기 때문일까?

타일러가 승리하면서 내야 땅볼을 끌어내자, 이미 흥분한 상태였던 1루 주자 박봉균이 무리한 슬라이딩을 시도, 더블 플레이를 방해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워낙 사고가 많이 터져 규정이 생긴 지 2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쉽게 흥분하는 선수들,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한 선수들은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새X야!! 뭐 이런 정신 나간 새X가 다 있어!?”

“내가 뭘!? 내가 뭘!? 충분히 피할 수 있었구만, 엄살은, 씨X...”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야! 야! 너 미쳤냐? 돌았어!?”

당사자인 2루수 이재준과 1루 주자 박봉균, 박봉균의 드래프트 동기인 조규정까지 끼어들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양 팀 덕아웃의 선수들도 조금만 더 격해지면 바로 뛰쳐나오기 위해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뭐하는 거야!! 어린이날이라고!!”

영도는 기본적으로 벤치 클리어링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냥 시비가 붙으면 붙는 거고, 건드리면 대응하는 거고...

딱히 좋게도, 나쁘게도 생각하지 않았고, 피하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3만석 중 절반이 애들이야. 그 앞에서 뭐하려고.”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어린이날에 다른 데 가지 말고 야구장 와서 관람하라며 협회와 구단이 나선 날, 어린이가 행복해야 하는 날.

아무리 무신경한 성격이라지만, 어린이들 앞에서까지 무신경할 순 없었다.

“......”

물론, 한껏 흥분한 운동선수들이 말 한마디에 얌전해질 리 없었다.

하지만 영도의 외침은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던 순간에 절묘하게 맥을 끊어버렸다. 

한 번이라도 시비가 붙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비라는 게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둘 중 한쪽이라도 잠깐 멈칫한 순간 끝이었다.

영도의 외침과 동시에 급격하게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올라올 때보다도 빠르게 식어버렸다.

[역시 수비 방해가 선언되면서 타자 주자 최병두 선수까지 아웃입니다. 1사 1, 2루의 위기를 더블 플레이로 모면하는 서울 제츠!]

[무시무시한 타이탄스 상위 타순 중에서도 특별한 선수들, 이윤지-김진형-뉴컴으로 이어지는 클린업까지 가지 않고 막아낸 게 천만다행이죠. 제츠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고, 타이탄스 입장에선 최악의 결과가 나왔어요.]

그리고 거친 슬라이딩으로 인한 더블 플레이까지 선언된 순간, 경기 내내 이어지던 팽팽한 실이 끊어졌다.

< 어린이가 행복한 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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