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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차이 >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손성호를 상대한 성기주의 초구는 13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중학교 때는 나름 지역구에서 라이벌로 꼽혔고, 동기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때도 비교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라이벌은 현재 부산 세일러스의 에이스이자 KBO NO.1 우완투수로 평가받는, 당시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에서 특급 유망주로 유명했던 안성흠이었다.

TOP 4를 꼽아도 현재 대구 레이더스의 클로저로 활약 중인 심창규와 야구를 그만둔 다른 선수가 뽑혔다.

TOP 10을 꼽아도 프로 진출 후 타자로 전향한 광주 울브즈의 우익수 강주열이나 창원 와이번스의 4선발 유경윤 같은 선수들이 뽑혔고, 성기주는 가끔 그들 바로 밑 정도에서 언급되는 정도였다.

‘우연히 같은 동네에서 나름 잘한다는 선수였고,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가서 어쩔 수 없이 가끔 비교나 되었던 수준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 만나면 필요 이상으로 덤벼왔고, 필요 이상으로 도발하곤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아마 그게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성기주 선수는 평균 구속이 130km대 후반에 형성되어 강속구 투수라곤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제구력과 컨트롤이 괜찮은 선수입니다. 아주 약간만 더 성장해주면 그래도 안정적으로 로테이션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는 게 아쉽습니다.]

[지금 보시면 5개의 공을 던지면서 볼이 4개거든요? 손성호 선수가 워낙에 적극적인 타자라서 2-2 카운트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볼이 많아요. 그게 이 선수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가만히 보면 본인의 구위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자꾸 정교한 제구에 집중하는데, 너무 정교하려다 보니 당연히 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교함, 하면 안성흠 선수인데, 그런 안성흠 선수도 정말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과감하게 집어넣거든요? 집요할 정도로 보더라인만 공략한 선수 중 투구 수와 이닝 소화 능력에서 합격점을 받은 건 톰 글래빈 정도밖에 없어요. 그 정도로 압도적인 제구력이 없으면 보더라인만 공략했을 때 손해가 더 크다는 이야기죠.]

경기 전 보여준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비해 언제나와 같이 소심한, 타자에게 제발 휘둘러달라고 구걸하며 피해 가는 피칭으로 일관했다.

과감한 승부로 유명했던 영도가 보기엔 더없이 답답한, 하지만 상대 투수라 너무 감사한 그런 피칭.

‘설마 어디 가서 저기 쟤가 나랑 라이벌이었다는 둥 헛소리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남들이 뭘 하고 다니건 신경 쓰지 않지만, 왠지 성기주가 그러고 다녔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과대평가하고, 바깥을 과소평가하곤 했다.

별생각 없던 집단도 내가 속하게 되면 누군가 이 집단을 욕했을 때 발끈하고, 칭찬하면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다 해봤을 것이었다.

외국인이 한국을 평가할 때, 다른 학교 출신이 내 출신 학교를 평가할 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외국인의 한국 평가 리액션 같은 영상이 딱 그 부분을 노렸고, 예상대로 크게 성공했다.

또, 선수들 중에는 의외로 본인이 속한 리그 외의 다른 리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을 예로 들면 K리그 소속 선수 중 유럽 4대 리그에 대해 거의 모르는 선수도 꽤 있었고, KBO 소속 선수 중 MLB에 대해 잘 모르는 선수도 꽤 있었다.

‘제아무리 메이저리그라 해도 출루율 3할도 못 되는 타자야. 한국에서 초반에야 잘 나갈 수 있겠지. 피지컬이 압도적이니... 하지만 그렇게 티가 나는 약점을 가지고 계속 그렇게 잘 나갈 수 있을까?’

성기주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그는 KBO에서 붙박이 1군으로 활약한다는 것에 상상 이상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저리거는커녕 AAAA급, 아예 AAA 주전급으로 활약하던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와 리그 최정상급의 활약을 펼쳐도 성기주는 그들보다 KBO에서 망한 외국인 선수에게 집중하며 자부심을 키워나갔다.

이미 잘못된 신념이 박혀버린 사람에겐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

성기주에겐 영도 역시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한계가 정해져 버린 공갈포에 불과했다.

‘거봐. 못 때리잖아. 네가 메이저리그에서 제자리걸음하는 동안 난 KBO에서 차근차근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바깥쪽을 공략한 초구가 스트라이크로 판정되자, 성기주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사실, 그의 자신감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비록 5선발이지만, 높은 WHIP에 비해 피장타율은 낮은 투수가 성기주였다.

하도 바깥쪽 승부만 고집하다 보니 볼넷이 많고, 코스가 읽혀 단타도 많이 허용했지만, 피장타율은 낮아진 것.

특히 파워에 의존하는 공갈포형 타자들은 제구력이 뛰어난 성기주만 만나면 유독 힘을 쓰지 못했다.

즉, 성기주는 공갈포형 타자들을 상대하는 데 자신이 있었고, 그의 세계에서 영도는 공갈포형 타자였다.

이에 따라 영도는 성기주의 밥이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에서는 그게 진실이었다.

‘쯧쯧... 역시 바깥쪽만 던져도 정신 못 차리네. 어떻게 저런 단점을 가지고 한 달이지만 저 정도 성적을 냈을까?’

바깥쪽으로만 연달아 4개의 공을 던졌고, 이중 하나는 볼이 되었지만, 나머지 두 개는 파울이 되면서 1-2 카운트.

성기주는 본인의 선택에 확신을 가졌다.

유영도는 아직도 바깥쪽에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선수였으며, 그 단점은 너무나도 커서 KBO 레벨을 무시하고 한국으로 도망온 그를 다시 한 번 실패의 늪에 빠뜨릴 것이 분명했다.

[바깥쪽 공을 힘껏 잡아당깁니다! 역시 유영도 선수는 몸쪽이고 바깥쪽이고 잡아당긴 타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그러면 비거리가 안 나오는 게 정상인데, 이 선수는 다르거든요? 이번에는 어디까지 날아가나요!?]

‘쯧쯧... 그 코스는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절대 넘길 수 없는 코스라고.’

본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그런 본인이 5선발에 그치는 KBO의 수준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강한 성기주.

5선발임에도 피홈런이 적은 축에 속하는 그이기에 자신의 공을 펜스 밖으로 넘기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특히 바깥쪽에 제대로 된 공이 펜스 밖으로 나간 경우는 대부분 스프레이 히터의 밀어친 홈런이었기 때문에 영도가 한껏 잡아당긴 이번 타구는 당연히 아웃일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제츠의 홈구장인 올림픽 파크의 관중석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뭐, 뭐야!!’

***

[뒤늦게 돌아본 성기주 선수, 굉장히 놀란 표정입니다.]

[아무리 영상으로 봐도 실제로 겪어보기 전까진 실감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죠. 거의 대부분의 투수는 저 코스의 공을 잡아당기면 좋은 타구가 나올 리 없다고 확신할 겁니다. 유영도 선수를 만나기 전이라면 말이죠.]

바깥쪽 공도 바깥쪽 공 나름이고, 잡아당기는 타자도 타자 나름이었다.

성기주의 공은 KBO 5선발에 어울리는 수준의 공이었고, 영도의 파워는 MLB에서도 타율 0.230으로 30개 가까운 홈런을 기록하는 레벨이었다.

즉, 둘은 성기주만 빼고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레벨이 달랐다.

‘왜지? 왜 저렇게 충격받은 표정일까.’

성기주도 바깥쪽 승부를 즐긴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바깥쪽만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특히 뛰어난 타자를 상대할 때면 나름대로 복잡한 볼 배합을 가져가기도 했다.

물론, 포수, 엄밀히 말해 벤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영도의 약점을 지나치게 확신한 것인지 평소보다도 더 바깥쪽 승부를 고집했다.

수준 차이가 심한데 코스까지 읽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는 게 영도의 의견이었다.

그런데도 마운드 위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대체 어디까지 현실감이 없는 걸까, 저 녀석은.’

이 정도 되고 보니 어이가 없는 걸 떠나 그냥 안쓰러웠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친구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이 봤다.

아니, 미국부터가 공교육이 상상 이상으로 무너진 나라였고, 중남미에서 건너온 선수가 많은 리그의 특성상 그런 선수는 미국에 훨씬 더 많긴 했다.

애초에 아직도 지구평면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주장하는 나라였으니...

그런 선수들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영도는 지금 성기주를 보면서 느끼고 있었다.

***

[일단 선발 싸움에서는 제츠가 웃었습니다. 유영도 선수에게 홈런을 허용한 이후 급격히 무너져 1.1이닝 만에 물러난 성기주 선수와 달리 윤한태 선수는 신인의 패기를 보여주면서 3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실점도 무실점인데, 볼넷이 없다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죠? 3이닝 동안 피안타 3개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워낙 패기 있게 들어가다 보니 투구 수 관리도 잘 됐어요.]

[신인이 이런 피칭을 보여주면 팬들은 흡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게 대형 신인이죠. 1차 지명 유망주다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윤한태 선수입니다.]

[구속도 최고 150km까지 찍었고, 구속에 어울리는 시원시원한 승부까지. 이 선수... 잘하면 오랜만에 순수 신인 선발로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케이스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순수 신인 야수의 성공 케이스에 비해 순수 신인 투수, 특히 선발의 성공 케이스는 줄어들었다.

아마추어 선발 유망주들은 보통 하드웨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프로에서 선발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세 번째, 네 번째 구종이 미흡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타고난 하드웨어만으로도 어느 정도 유의미한 성적이 가능한 야수에 비해 투수를 키우는데 필요한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데뷔전을 치르는 윤한태의 호투는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주자 느려. 침착하게...’

타이탄스가 자랑하는 클린업의 선봉, 3-4-5 아름다운 비율 스탯으로 대표되는 좌익수 이윤지마저 윤한태의 구위에 밀려 빗맞은 3루 땅볼에 그쳤다.

다만, 제츠의 3루수는 빗맞은 타구보다 차라리 빠른 타구를 더 쉬워하는 선수.

영도는 정신줄을 바짝 부여잡은 채 타구를 향해 대쉬했다.

[유영도 선수, 빠르게 들어와 침착하게 1루, 아웃입니다. 대쉬 수비에서 몇 번의 실수를 보여줬던 유영도 선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느리더라도 침착하게 처리해 1루에서 타자 주자를 잡아냈습니다.]

[이윤지 선수가 빠른 선수는 아니니까요. 유영도 선수는 수비에서 여유만 좀 찾으면 충분히 괜찮은 수비력을 보여줄 거예요. 기본적인 스킬 자체는 나쁘지 않거든요? 결국, 경험이 해결해줄 겁니다.]

“이야... 한치 이 자식 오늘 개쩌는데? 천하의 이윤지 선배가 3루 땅볼이라니...”

이윤지는 비율 스탯의 꽃인 3-4-5를 자신의 상징처럼 만들어버린 만능 타자였다.

배트 컨트롤이 뛰어나 빗맞은 타구는 한 시즌을 통틀어 거의 때리지 않는 선수였는데, 생짜 신인인 스무 살짜리 투수가 해낸 것이었다.

조규영의 감탄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 지을 거 없어. 너도 이번엔 수비 잘하더라. 전진 수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많이 늘었어?”

“제 표정이 왜... 아닙니다.”

최근 ‘영도 놀리기’가 제츠 선수단 사이에 유행처럼 돌았고, 조규영은 그 전면에 서 있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크크크... 그래, 그래. 너무 상심하지 마. 한치가 오늘 너무 잘 던져서 네가 주인공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 홈런은 좋았어.”

이젠 그냥 놀리는 것 자체가 습관이 되어버려서 영도가 반응하든 안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영도 역시 그냥 쓰게 한 번 웃고 넘겼다.

[자, 타석에는 서울 타이탄스의 핵심, 김진형이 들어섭니다. 지금 쌩 신인인 스무 살의 윤한태 선수에게 천하의 타이탄스 타선이 철저히 틀어막히고 있거든요? 이럴 때 해줄 선수는 김진형 선수밖에 없습니다.]

[타이탄스 선발 성기주 선수를 무너뜨린 건 유영도 선수의 홈런 한 방이었죠. 메이저리그에서 건너온 괴물, 유영도 선수에게 대항할 선수는 같은 3루수인 김진형 선수밖에 없습니다. 두 선수 모두 분명 서로를 의식하고 있을 텐데, 이럴 때 유영도 선수 앞에서 보여줘야죠.]

사실, 이윤지-김진형-뉴컴의 환상적인 클린업을 자랑하는 타이탄스였지만, 지금 이 라인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이윤지는 언제나처럼 발전도 없고 기복도 없는 맹활약을 펼쳤고, 김진형 역시 16홈런의 유영도에 이어 11개의 홈런으로 홈런 2위에 올라 있었다. 타율과 출루율은 오히려 더 높았고.

문제는 레오나르도 뉴컴.

지난 시즌 33홈런을 기록한 ‘검증된’ 선수와 재계약했다며 환호했던 타이탄스는 지금 그 검증된 선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33경기를 치른 현재까지 뉴컴의 성적은 OPS 7할에 4홈런.

2-3-4에 위치해야 할 3인방이 3-4-5에 배치된 건 바로 뉴컴의 부진 때문이었다.

[초구부터 과감한 스윙!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노리고 들어왔다는 듯 작정하고 돌렸습니다! 우익수 뒤로, 우익수... 아... 마지막에 뻗지 못합니다. 우익수 플라이 아웃!]

[아... 이렇게 되면 굉장히 공교롭게 되었는데요. 1회 말에 유영도 선수는 이것보다 공 한 개는 더 바깥쪽으로 빠지고 공 한 개 반은 더 낮게 제구된 공을 끌어당겨서 넘겨버렸거든요?]

[그런데 원래 저 위치에 제구된 공을 잡아당기면 안 넘어가는 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문제예요! 지금은 윤한태 선수가 초구로는 꽤 좋은 공을 던진 거고, 김진형 선수는 김진형다운 펀치력을 보여주면서 기대 이상으로 멀리 날려 보낸 건데!! 하필이면! 진짜 하필이면 더 안 좋은 상황에서 비슷한 타격으로 넘겨버린 선수가 상대 팀에 있어요. 그것도 항상 같은 라인에서 비교되는 선수가!]

살짝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어쨌든 김진형까지 잡아낸 윤한태는 부진한 뉴컴까지 가볍게 잡아내며 4회를 마쳤다.

이미 타이탄스 선발 성기주가 1.1이닝 4실점으로 무너졌고, 이어 등판한 박용연마저 1.2이닝 동안 2점을 추가로 내준 상황.

승부의 추가 어느 정도 기운 지금, 스무 살의 당찬 고졸 신인 윤한태는 이 경기에 쏠린 수많은 눈앞에서 100점짜리 쇼케이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수는 100점을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 레벨 차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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