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느려도 확실하게 > (35/200)

< 느려도 확실하게 >

“역시 유승이로는 무리였던 건가...”

“......”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서울 드래곤스 덕아웃.

경기 초반만 해도 제츠 타선을 효과적으로 틀어막는 듯했던 양유승은 타선이 한 바퀴 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얻어맞기 시작했다.

물꼬를 튼 선수는 이번에도 영도였다.

타석에 서 있지 않을 때도 계속 타이밍을 파악하던 영도에게 131km의 포심은 더 이상 까다로운 공이 아니었다.

“그래도 두 바퀴 정도는 버텨줄 줄 알았는데 안 되네.”

“후우... 유영도, 저 개 같은 자식...”

드래곤스 코치진은 전부 다 프런트 입맛대로, 정확히는 단장 겸 사장인 유중선 입맛대로 선임된 사람들이라 서로 위계가 없었다.

감독인 이문재나 다른 코치들이나 다 대등해져버린 관계.

보통 감독들이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이동한다는 걸 생각하면 자기 사람으로 코치진을 꾸리지 못한 이문재의 자리는 항상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랬냐고. 어차피 다른 팀도 다 저 친구한테 두들겨 맞는 중인데, 그 일만 없었으면 우리도 맘 편하게 두들겨 맞을 수 있었잖아.”

“... 씨X... 나만 그랬어? 저 새X한테 안 그랬을 뿐이지, 너도 애들 감독할 땐 똑같이 지X했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너보단 덜했어. 아프다는 애는 빼줬다고. 그게 상식 아닌가?”

“그래서 뭐. 씨X, 안 그래도 빡치는데 왜 옆에서 자꾸 건드리지?”

어차피 유중선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인 자리.

유망주 육성이 이문재의 장점이라고는 해도 그 정도 장점은 다른 코치들도 각기 다른 분야에서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서로를 견제하고 호시탐탐 깎아내리기 바빴다.

영도의 KBO행,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그들에겐 이문재를 찍어낼 절호의 찬스.

유중선의 지시로 팀 이미지를 위해 어떻게든 영도만은 잡아내겠다고 말했지만, 실패해도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건 이문재였다.

“어쨌든 투수 바꿔야지. 우리 팀 이미지까지 나빠지기 전에 주목받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하니까.”

“씨X...”

이미 이문재의 이미지는 바닥이었다.

유중선의 목적은 감독의 이미지 추락이 구단 이미지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영도만은 막아내야 했다.

“김재훈 올려.”

“하하하, 걔도 유영도랑 같은 대표팀에서 팔꿈치 갈렸던 애 아냐? 악취미네.”

“... 김재훈은 자기 팀에서 갈려 온 거였다.”

“그래, 누가 뭐래? 부상으로 이탈한 게 대표팀 시기였다는 거지, 네가 갈았다고는 안 했어.”

이문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꾹 참았다.

안 그래도 급격히 흔들리는 입지인데, 코치들과의 신경전까지 벌였다가는 그 역반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저 불펜에서 필승조를 제외하고 가장 믿음직한 투수를 올린 뒤, 영도를 잡아주길 기도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근데 괜찮겠어? 둘이 붙으면 또 당시 대표팀 이야기 나올 텐데?”

“무슨... 유영도는 몰라도 지금 김재훈한테 누가 그렇게까지 신경 쓴다고...”

***

‘재훈 선배...’

마운드에 선 김재훈과 타석의 영도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였던 김재훈은 일찌감치 팔꿈치가 박살 났고, 3선발로 합류했으나 에이스가 되어버린 영도는 결승전에서 팔꿈치가 박살 났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서로의 팔꿈치가 박살 나는 순간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이였다.

‘이렇게 만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묘하네.’

좌완투수로서 140대 중반의 패스트볼과 멋진 슬라이더를 던져 아무리 못해도 프로에서 10승 투수는 될 거라 평가받았던 김재훈.

같은 좌완으로 140대 후반의 패스트볼과 깔끔한 투심, 슬라이더를 장착해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유영도.

세대를 대표했던 두 특급 선발 유망주들은 나란히 팔꿈치가 박살 난 채 한 명은 불펜에서, 한 명은 타석에서 등장해 서로를 마주했다.

[두 선수 모두 기분이 묘할 것 같습니다. 김재훈 선수는 부상에서 복귀해 부상 이전의 퍼포먼스를 되찾았지만, 성장할 시간과 내구성을 잃어 불펜투수가 되었고, 유영도 선수는 아예 왼팔을 버리고 우투우타의 3루수가 되어서 서로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선수는 한국 야구계의 아픈 손가락들이에요. 아마추어 야구의 혹사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도 벌써 4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이런 선수들이 나오는 게 말이 되나요? 심지어 이 두 선수 외에도 많아요. 정말... 이런 일은 다신 벌어져선 안 돼요.]

이문재의 실수는 오늘 경기의 해설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해설을 맡은 박성강 기자는 한국 야구계의 병폐, 특히 한국 야구의 미래인 아마추어계의 병폐를 고발하는 데 앞장서는 기자였다.

아마추어 야구계의 병폐를 종합 선물세트로 겪은 영도와 같은 시기 혹사에 희생당한 김재훈, 청소년 대표팀 시절 동료들의 맞대결을 놓칠 리 없는 인물이었다.

‘이 형은 그래도 회복했네.’

최고구속 140km대 중반까지 나오는 패스트볼과 여전히 훌륭한 슬라이더, 새롭게 장착한 커브까지.

팔꿈치 이슈로 50구 이상 던지기 어렵고, 연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김재훈은 훌륭하게 재활한 케이스였다.

실제로 벌떼 야구의 드래곤스에서 필승조 못지않은 안정감을 자랑했고, 연투 문제로 필승조로 쓰이진 못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전천후로 활용되고 있었다.

‘부상 때문에 한창 성장할 나이에 2년이나 쉬었는데... 아쉽겠어.’

다만, 원래의 김재훈은 이보다 더 크게 성장할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투수였다.

한창 성장할 나이의 2년 재활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떨어지는 공을 퍼 올리는 유영도! 이번에도 살짝 배트 위쪽에 맞은 것 같습니다. 우중간으로 천천히 날아가는 타구! 발사각이 굉장히 높아 보이는데... 역시 42도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요. 45도를 훌쩍 넘긴 타구도 홈런으로 만든 적 있는 선수거든요?]

‘뭐야. 슬러브도 장착한 건가. 이 궤적은 처음 보는데.’

영도는 타격 후 빠르게 1루로 달려나갔다.

일단 공 아랫부분을 때리긴 했지만, 비거리는 꽤 나올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또 여기가 KBO 최악의 투수 친화 구장, 잠실 올림픽파크라 넘어가지 않을 수도, 어쩌면 아웃이 될 수도 있었다.

[타구가 지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유영도 선수는 이미 1루를 돌았습니다. 이거 잘하면 3루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는데요!?]

[일단 떨어진다면 말이죠.]

[투 바운드로 펜스까지! 유영도는 2루에 도달했고, 최지웅 선수가 살짝 더듬었지만! 빠르게 잡아 유격수 강명우 선수에게 연결합니다.]

[유영도 선수 아직 저기까지밖에 못 갔나요?]

한참 높게 떴던 타구는 예상대로 올림픽 파크의 드넓은 외야를 넘지 못한 채 높은 펜스에 맞고 다시 들어왔다.

영도는 자신의 스피드를 잘 알고 있었기에 2루에 멈추려 했지만, 주루코치가 팔을 돌렸다.

의아하긴 했지만, 수비가 한 번 더듬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 일단 2루를 돌았다.

그리고 1회 첫 타석에도 확인된 바 있었던 영도의 느린 발이 여기서 또 발목을 잡았다.

‘아니! 뭐야!?’

2루를 돌아 3루로 달려나가면서 슬쩍 바라보니 외야에서 이미 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발이 좀 빠르다 싶은 선수면 3루에서 살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아니, 그런 선수들은 이미 3루에 거의 도착했을 것도 같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강무영이 멀리 나가 받아주고 3루! 유영도 선수, 중간에 허겁지겁 멈춰서 다시 2루로 돌아갑니다. 일단 중간에 잘 멈췄습니다. 훌륭한 판단으로 3루를 포기한 유영도 선수.]

[이번엔 진짜 장타일 수밖에 없는 타구였거든요? 김원상 선수나 어경준 선수였으면 3루는 기본이고 홈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인사이드 파크에 호텔 하나 세웠을 텐데, 이걸 3루에서 잡히네요.]

[유영도 선수는 정말 아쉽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타자였다면 이건 무조건 외야 플라이였죠. 저 높은 발사각으로 펜스까지 날린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면 발 정도는 느려줘야죠. 여기서 발까지 빠르면 유영도 선수가 모자란 게 뭡니까? 야구 잘하지, 잘생겼지, 몸매 좋지... 발은 느려야 저 같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루코치는 황당한 표정으로 뒷목을 벅벅 긁었다. 왜 2루로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판단이라면 그가 맞았다.

3루로 충분히 달려볼 만한 타구였지만...

영도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크, 크하하하하!!! 저 타구에 3루를 못간다고? 아까 그 타구에? 나였으면 두 바퀴는 돌았겠다, 야!!”

“선배님, 저도 두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홈도 아니고 3루가다가 깜짝 놀라 돌아가다니...”

“그래. 너도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그렇지, 발까지 빨랐으면 그건 신이지. 사람이니까 그런 거야”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아직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넌 딱 보기엔 발도 빠를 것처럼 탄탄하게, 근육질에 잘 생겨가지고... 하늘이 역시 공평하긴 한가 보다. 믿을 만하네, 하늘."

덕아웃으로 돌아온 영도를 보고 폭소하는 팀 동료들.

제아무리 천하의 유영도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선 살짝 민망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 타구면 3루는 들어가 줬어야 했으니까.

근육량이 많은 체형이지만, 보디빌더 체형과는 거리가 먼 체형.

아주 빠를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달리기 잘할 것처럼 보이는 신체 조건인데, 이상하게 발은 느렸다.

'스피드가 파워보다 후천적으로 더 키우기 어려운 재능이지 않을까...'

그래도 파워와 스피드 중 하나만 고르라면 파워였다.

영도는 그렇게 위로하며 글러브를 챙겼다.

“저거, 저거... 민망해서 조용히 글러브 끼는 거 봐라. 귀엽네.”

“영도가 좀 귀여운 부분이 많긴 하지. 형도 느꼈어?”

“그럼, 그럼.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귀요미야, 귀요미.”

영도를 가장 앞장서서 놀리는, 아니, 귀여워하는 선수는 손성호와 한영훈이었다.

영도가 합류하면서 부담감을 많이 덜어냈기에 그만큼 호감이 쌓인 것.

“야, 귀요미! 귀요미 아니랄까 봐 어떻게 3루 갈 때도 아장아장 걸어가냐?”

“우리 영도한테 왜 그래! 영도는 열심히 뛴 거라고! 애가 열심히 하는데 칭찬해주진 못할망정 선배라는 놈이... 에휴... 영도야, 원상이가 저러는 건 무시해. 수비할 때마다 옆에서 챙겨준 이 형만 믿고, 원상이 가서 때려.”

손성호는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선후배 문화에 포함되고 싶지 않다는 영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대신 야수진의 두 축인 한영훈과 함께 가볍게 놀려주면서 다른 선수들도 영도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만들었다.

붙임성도 없고 딱히 친해지겠다는 의지도 없어 팀에 녹아들기 힘들었을 영도는 손성호 덕분에 별다른 노력 없이 팀에 녹아들 수 있었다.

손성호와 한영훈이 앞장서 놀려주었기에 다른 선수들도 영도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진짜 때려도 됩니까?”

“... 규영이 형. 목마르지 않아? 가서 음료수나 한잔 할까?”

“... 그러게. 갑자기 목이 마르네. 가자.”

다만, 가끔 어려울 때는 있었다.

***

[서울 제츠, 드래곤스와의 3연전 스윕! 시즌 초반 무서운 기세로 달려나가]

[유영도, 3연전 동안 분노의 맹타! 14타석 12타수 4안타 2홈런 7타점... 간담이 서늘했을 누군가]

[유영도와 김재훈. 10여 년만에 마주한 두 아픈 손가락의 맞대결]

- 이문재, 개X끼...

- 고등학교 동기입니다. 재훈이는 진짜 저렇게 망가질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못해도 프로 10승 투수였는데...

- 저 둘이 청룡기에서 승부했던 경기가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데...

- 이문재 때문에 당한 두 선수들이라 이문재만 욕 먹지만, 이문재만의 문제는 아니지. 진짜 우리 아마추어 야구계 한 번 뒤집어 엎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대로 둘 거?

- 쪽팔린다, 쪽팔려. 지금 애들은 괜찮을 거라고 누가 확신함?

-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영도 덕분에 또 한 번 끓어올랐음. 이렇게 끓어오르다 보면 언젠가 뻥하고 터지겠지.

- 너무 많이 늦은 거 아니냐? 늦은 만큼 한 번에 확실하게 쓸어버려야 함. 그거 못하면 결국 두 번째 유영도, 세 번째 유영도 나오는 거임.

< 느려도 확실하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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