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과 장구 >
[최찬우 선수가 중전 안타로 출루하면서 3안타 경기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주자를 쌓게 된 세일러스가 선취점을 노립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네요. 리그 최정상급의 좌완투수를 상대로 좌타자가 이렇게 안타를 쓸어담기도 힘들거든요?]
[지금 안성흠 선수가 피안타 2개에 사사구 없이 엄청난 호투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에이스가 호투 중이고 투구 수도 적으니 여기서는 번트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렇겠죠. 특히 3루수 유영도 선수의 수비에 의문부호가 붙기 때문에 주상윤 선수의 발이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전진 수비라...’
누가 봐도 여기선 번트가 나올 타이밍이었기에 벤치에서 전진 수비 사인이 나왔다.
전진 수비 사인과 동시에 영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전진 수비는 타자에게 완벽한 번트를 대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위해, 애매한 번트 타구가 오면 2루, 나아가 더블 플레이를 노리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문제는 번트 수비가 생각만큼 쉽지 않고, 특히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에겐 더더욱 어렵다는 것.
또 정위치보다 앞으로 전진하는 만큼 반응할 시간이 짧아지고 타구 속도도 빨라져 강공으로 전환할 경우 훨씬 더 수비하기 어려웠다.
‘하필이면 발도 빠른 타자네.’
영도는 경험이 적은 3루수였다.
피나는 훈련을 통해 핸들링과 공 빼는 속도는 많이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경험이 필요한 수비들은 어려워했다.
[3루 쪽 안정적인 번트! 유영도가 빠르게 달려와서...]
‘젠장! 스텝이 엉켰어!!’
번트를 대비했기에 출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공까지 도달하는 것에만 치중하다 보니 스텝을 신경 쓰지 못했다.
이런 번트 수비의 경우 굉장히 급박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몸에 익은 대로 플레이하게 되는데, 영도는 아직 그 부분이 미흡했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1루! 아! 송구가 높았습니다! 주자들은 한 베이스씩 더 진루, 무사 2, 3루 찬스를 맞이하는 부산 세일러스!]
[아... 이번 수비는 정말 아쉽네요. 아무래도 주상윤 선수도 발이 빠른 선수다 보니 마음이 급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너무 급했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스텝을 맞추지 못했고, 몸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송구가 흔들릴 수밖에 없죠.]
‘아...’
영도는 수비에 자신이 없는 만큼,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하려 했다.
소위 말하는 ‘간지’가 좀 덜 나고 타이밍이 좀 늦어도 최대한 안정적인 수비를 지향, 수비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도 평범하게 안정적이라는 소리는 듣는 게 목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던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을 했으면서...’
대부분의 선수가 마음이 급해져서, 당황해서 던져서는 안 될 상황에서도 송구를 시도하곤 했다.
특히 지금처럼 자세가 무너졌을 뿐, 타이밍은 아웃 타이밍이라면 선수의 본능이 아웃을 잡아야 한다고 시켰다.
하지만 역시 송구에는 리스크가 따랐다.
특히 마음이 급해져 송구 그립이나 몸의 균형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미안, 타일러. 내 잘못이다.”
“괜찮아, 브로. 어차피 네 에러는 계산 안에 있으니까.”
“... 지금은 할 말이 없군.”
“으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넌 수비에서 점수 까먹고 공격에서 만회하는 선수라고?”
다행히 타일러 로즈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뛰던 선수였으니 영도의 수비가 별로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동안 영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비를 곧잘 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오늘만큼은 꼭 만회해야지.”
타일러는 씨익 웃으며 마운드로 돌아갔다.
확실히 영도와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성격도, 야구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다른 선수였지만, 에이스가 에이스인 이유는 있었다.
[무사 2, 3루,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부산 세일러스의 중심! 정신적 지주이자 팀의 상징! 박우용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여기서 해줘야죠. 세일러스가 3안타 1볼넷을 얻어냈는데, 안타는 전부 최찬우 선수가 만들어냈고, 박우용 선수는 오늘 삼진만 두 개거든요? 박우용 정도의 선수가 에이스를 도와주지 못하면 누굴 믿고 던지나요.]
그래도 무사 2, 3루의 위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순 없었다.
타일러의 표정은 여전히 나쁘지 않았고, 한 점 정도는 준다는 마음으로 마운드에 섰지만, 그래도 부담감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특히 타석의 타자가 MVP 2회 수상에 빛나는 KBO의 레전드, 여전히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리그 최고의 1루수, 박우용이라면 그 부담감은 더욱 커졌다.
‘송구는 최대한 천천히 해도 돼. 나보다도 더 거북이니까.’
영도는 또 한 번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어차피 단타 하나면 2실점이니 수비 위치는 정위치였고, 타자는 리그에서 가장 발이 느린 선수 중 하나인 박우용이었다.
내야수의 수비는 특별히 어려울 게 없었다.
[3구, 날카롭게 당겨치는 박우용의 타구!!]
하지만 착각이었다.
특별히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박우용의 타구는 날카로운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되어 3루를 향해 날아왔다.
‘제발 닿아라!!’
여기서 지난 생에서 갈고 닦은 우람한 하체가 빛을 발했다.
영도는 장타력을 키우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점적으로 관리한 건 하체였다.
역도성 운동도 조금씩은 해왔기에 선천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던 순발력이 더해져 점프력과 거리가 먼 야구선수로서 82cm라는, 185cm, 102kg 체구에 비해 굉장히 높은 서전트 점프 기록을 갖게 되었고.
[이걸 잡았습니다! 엄청난 점프, 그리고 2루로!!]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안타성 타구를 걷어냈다.
‘역시 세일러스.’
부산 세일러스 타선이 욕먹는 건 스탯 때문이기도 했지만, 프로 레벨에서 나와서는 안 될 허술한 플레이 때문이기도 했다.
8할 이상의 확률로 안타가 될 타구라도 궤적이 그리 높지 않은 라이너성이었기 때문에 주자는 타구가 확실히 내야를 벗어난 뒤 출발하는 게 맞았다.
좌익수 방면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였기에 어차피 2루 주자는 홈에 들어올 수 없었고, 그렇다면 변수를 배제하는 안정적인 주루플레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2루 주자 주상윤은 너무 일찍 스타트를 끊었고...
[2루에서 아웃! 엄청난 호수비에 이어 더블 플레이까지 완성하는 3루수 유영도! 본인의 에러로 초래된 위기를 본인의 손으로 극복합니다!]
[와... 몇 초 전에 유영도 선수의 수비가 아쉽다고 말했던 제가 다 민망해지는데요? 지금은 정말 엄청난 수비였고, 굉장히 중요한 수비였어요. 저 엄청난 근육을 가지고도 저렇게 날렵하게 뛰어오를 수 있다니... 확실히 유영도 선수의 피지컬은 상상을 초월하네요.]
“이게 뭐야! 공격으로 만회하라니까 왜 수비에서 만회하는 거야, 브로!!”
“내가 어떻게든 만회하겠다고,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고 했잖아.”
에러를 범했을 때도 웃는 얼굴이었던 타일러는 아예 입꼬리를 귀에 건 채 영도에게 달려왔다.
안성흠과의 명품 투수전을 이어가던 그였기에 티는 안 냈어도 내심 상당한 긴장감, 부담감과 싸우고 있었는데, 이번 수비는 그의 부담감을 한껏 덜어내 주었다.
물론, 위기를 초래한 것도 영도의 에러였지만, 타일러는 이미 다 잊어버렸다.
어차피 영도의 에러가 아니었어도 1사 2루의 위기였을 테니 2사 3루가 훨씬 편하기도 했고.
[몸쪽 높은 코스, 그대로 삼진입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완벽한 포심 패스트볼로 에드 르몽드를 돌려세우는 타일러 로즈! 무사 2, 3루의 위기를 극복하며 6이닝 무실점 행진을 이어갑니다!!]
[오늘 박우용-르몽드 라인이 영 힘을 못 쓰는데요? 세일러스의 공격을 담당하는 두 선수가 오늘 6타석에서 삼진 5개를 헌납했어요. 이러면 세일러스는 점수를 낼 방법이 없죠.]
“수비로 한 건 했어도 공격에서도 해줘야 하는 거 알지?”
“걱정하지 마.”
수비로 한 건 하면서 마음의 빚을 조금 덜긴 했지만, 영도는 원래 잘한 것보다 못한 걸 오래 기억하는 선수였다.
아까의 그 에러가 아직 영도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고, 여전히 찝찝한 안성흠과의 승부 역시 명확하게 승리한 채로 끝내고 싶었다.
7회 초, 선두 타자는 3번 타자 유영도였다.
[수비에서의 슈퍼 플레이가 타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바로 전 이닝에 멋진 호수비를 보여줬던 유영도 선수, 7회 초 첫 타석에 들어섭니다.]
[기분이 좋긴 할 거예요. 아무리 안성흠 선수라 할지라도 마린 필드에서 괴력의 홈런 타자를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울 텐데, 지금 분위기까지 올라왔단 말이에요?]
[게다가 무사 2, 3루의 찬스를 살리지 못했거든요? 위기 뒤의 기회, 기회 뒤의 위기라고 이번 7회 초가 오늘 승부의 분수령이 될 것 같습니다.]
[유영도 선수의 역할이 중요해요. 여기서 장타 하나 나와주면 지금까지 팽팽하게 이어지던 승부의 추가 급격히 기울 수 있거든요? 아무래도 제츠는 1, 2, 3번에 비해 그 뒤 타순의 위압감이 아쉬운 편이라 선두 타자인 유영도 선수가 해줘야 합니다.]
어느새 세 번째 맞대결.
경제적인 투구를 이어왔지만, 그래도 몸이 완벽하게 올라오지 않은 시즌 초반이라 이제부턴 힘이 떨어지기 시작할 안성흠과 지난 이닝의 호수비로 분위기를 끌어올린 유영도.
그리고 승부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타자의 승리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야구의 특성까지.
제츠 팬들의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이번 한 번은 허를 찔러서 몸쪽으로 초구 한 번 들어오지 않을까, 했는데.’
안성흠의 피칭 전략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초구 스트라이크였다.
그런 만큼 타자의 허를 찌르는 배합이 초구에 많이 나왔고, 영도도 그걸 노리고 몸쪽 초구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 확률 높은 선택을 보다 완성도 있게.
안성흠은 영도를 철저히 경계했고, 정석대로 단단하게 승부 해왔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바깥쪽을 때려야겠구나.’
안성흠은 실투가 거의 없는 몇 안 되는 투수이기에 다른 투수를 상대할 때와 달리 바깥쪽도 거르지 않고 때려야 할 듯싶었다.
‘어차피 시즌 내내 거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가능한 한 거르겠다는 거지, 아예 바깥쪽 공을 절대 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
당겨치기와 밀어치기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타자는 만화에나 있는 거고, 타격 메커니즘 상 바깥쪽 공에 약하면 더 강하게 잡아당겨 멀리 보내면 되는 거고...
고민해봤자 당장 스프레이 히터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신의 메커니즘으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아주 질린다, 질려!!’
초구 바깥쪽 스트라이크 이후 볼 한 개를 골라내고 다시 바깥쪽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
영도는 안성흠의 주 무기인 투심을 예상했지만, 안성흠은 여기서 허를 찔렀다.
투심과 커터의 위력이 훨씬 강력해 거의 던지지 않는 포심을 꽂아넣은 것.
‘이거 볼이네...’
영도의 몸쪽으로 휘어지는 투심이 아닌 직선 궤적의 포심.
투심이었다면 안으로 휘어지며 존을 통과했겠지만, 포심이었기에 공 반 개 정도 벗어난 볼이었다.
하지만 이미 출발한 배트는 멈출 수 없었고, 영도는 어금니를 꽉 문 채 허리와 엉덩이의 회전력을 배트로 연결했다.
‘아... 살짝 어긋났네...’
배트 컨트롤에 딱히 장점이 없는 영도로서는 투심을 예상하고 휘두른 배트를 포심 궤적에 맞출 수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따라가긴 했지만, 포심과 투심의 낙차 차이 때문에 공의 아랫부분을 때리고 말았다.
당연히 타구는 앞으로 뻗지 않고 위로 치솟았다.
[아... 위로 높게 뜨고 말았습니다. 유영도 선수도 이번만큼은 바깥쪽을 대놓고 노린 것 같은데, 아쉽게도 배트 위쪽에 맞았습니다. 발사 각도는 무려 45.7도가 나왔습니다.]
[지금 포심 같거든요? 안성흠 선수가 한 경기에 포심은 대략 5개 정도밖에 안 던져요. 그러니 유영도 선수도 예상할 수가 없죠.]
높이 치솟은 타구는 멀리 갈 수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플라이볼 혁명 때도 발사각을 높이고 높인 게 25도에서 30도였다.
발사각이 45도면 홈런은커녕 외야수 정위치를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 어라? 이거 타구가 떨어지질 않습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중견수 최찬우! 이제 더 뒤로 가면 펜스에 기대게 됩니다!!]
[펜스에 이미 기댔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타구를 쫓는 최찬우! 하지만... 포구할 준비를 전혀 안 하고 있죠!?]
[그대로 넘어갑니다!! 발사각 45도를 넘긴 타구가 그대로 쭉쭉 뻗어서 펜스를 넘어갔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 괴력의 홈런타자, 유영도 선수입니다!!]
[시즌 열한 번째 경기에 10호 홈런을 때려버리네요. 와... 시즌 개막과 동시에 KBO를 그냥 폭격하는데요? 수준이 다른 파워입니다.]
벌써 세 번째 똑같은 최찬우의 당황한 표정과 안성흠, 나중도의 헛웃음.
[7회 초, 서울 제츠 공격]
<3번 타자 유영도(3루수)>
3구 : 중견수 뒤 홈런(144km, 포심)
(발사각도 45.7도, 타구속도 164.8km)
ㄴ ... 저게? 넘어간다고?
ㄴ 제츠 타자한테 이런 홈런을 보다니!! 유영도 만세!! 유영도!! 갓영도!! 영도갓!!
ㄴ 미쳤다, 진짜...
ㄴ 홈런 10개 중에 말도 안 되는 홈런이 절반은 되는 듯...?
ㄴ 난 개인적으로 홈런보다 벤치클리어링 보고 싶다. 으하하하, 얼마나 어마어마할까? 혼자 프로레슬링 할 것 같은데?
< 북과 장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