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점조절 >
부산 세일러스에는 세 명의 특급 타자가 있었다.
우선 미스터 세일러스, 부산의 4번타자라 불리는 프랜차이즈 스타, 과거 홈런 군단으로 불리며 파괴적인 야구를 선보이던 시절의 마지막 유산, 34세의 베테랑 1루수 박우용.
지난 시즌 홈런왕을 차지한 31세의 3루수 에드 르몽드.
그리고 바로 작년에 풀타임 첫 시즌을 치르며 타율 3위, 9할 OPS, 23홈런 42도루를 기록한 세일러스 타선의 미래, 25세의 중견수 최찬우였다.
[몸쪽! 가슴 높이의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 부산 세일러스의 1회 말 공격, 선두타자 최찬우 선수가 좌중간 2루타로 출루했지만, 이어진 세 타자가 모두 범타로 물러나며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시즌 초반 에드 르몽드의 부진이 좀 심각하네요. 지난 경기까지 10경기에서 38타수 동안 안타가 고작 2개예요.]
[냉정히 말해서 세일러스 타선은 최찬우, 박우용, 에드 르몽드, 셋 중 누구 한 명이라도 부진하면 답이 없거든요? 르몽드의 부활이 아주 시급합니다.]
[셋을 빼고 그나마 보통 정도 해주는 김근주 선수를 제외하면 OPS 7할 넘기는 것도 힘들어하는 선수들밖에 없죠. 리그 평균 OPS가 0.730 조금 안 되는데, 주전 9명 중 4, 5명이 7할을 못 찍고 그중 대부분이 6할 초중반...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겁니다.]
부산 세일러스의 지난 시즌 성적은 8위였다.
리그 최고의 토종 원투 펀치와 최고 수준의 클린업을 데리고 8위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딱 이 선수들을 제외하면 그나마 괜찮은 선수가 겨우 평균 정도 해주는 선수였고, 대부분이 1군 주전급 중 최하위권에 그치니 아무리 에이스들이 대단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외국인 선수 세 명의 활약 여부에 따라 포스트시즌 진출권에서 최하위권까지 세일러스의 예상 순위를 넓게 잡고 있었다.
[역시 2회 말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갑니다. 그래도 항상 OPS 7할대 중반은 찍어주는 지명타자 김근주 선수가 3루 땅볼로 물러난 이후 6번 김성윤, 7번 최현수 선수는 무기력하게 연속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아무리 하위 타선이라고 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터지는 한 방이 있거나, 끈질기게 달라붙는 선구안 혹은 근성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스피드라도 있어야 하는데... 세일러스는 이 부분을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시즌 초반이라 거의 모든 팀이 선발 로테이션을 규칙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세일러스의 에이스 안성흠이 등판했으니 제츠에선 타일러 로즈가 등판했고...
세일러스의 하위 타선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역시 양 팀 에이스 모두 에이스 자격이 확실한 선수들입니다.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물론, 안정감이나 포스는 안성흠 쪽이 조금 더 낫긴 하지만... 성적 차이는 크게 안 나죠. 둘 다 대단해요.]
[그리고 사실 제츠는 상위권의 공격력을 갖춘 팀이긴 하지만, 타선의 포스가 대단한 팀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일러스가 세 명의 대단한 선수들과 많이 아쉬운 나머지 선수들로 이뤄졌다면, 제츠는 한 명의 대단한 선수와 두 명의 정상급 선수, 그리고 정확히 평균 수준의 나머지 선수들로 이뤄진 느낌이죠. 파워가 부족해서 위압감이 부족한 게 성적 대비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안성흠 역시 서울 제츠의 타선을 한 바퀴 내내 꽁꽁 틀어막았다.
세일러스에선 최찬우 선수가 안타를 때려냈지만, 제츠 타선은 3회까지 완전히 퍼펙트로 막혔다.
손성호와 한영훈 모두 타율은 높지만, 장타율이 낮아 평균 OPS가 8할 중반에 찍히는 선수들이고, 나머지 선수들은 OPS 6할 후반에서 7할 초중반에 찍히는 수준이었다.
전체적인 수준은 높지만, 리그를 지배하는 선수가 없는 제츠 타선이기에 에이스급 투수들만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걸 내가 해줘야 하는 거고...’
그러니 제츠가 외국인 타자에게 거는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팀은 외국인 타자에게 1순위로 장타력을 요구하고, 다음이 OPS 9할, 타율 3할, 마지막으로 수비력 정도가 되는데, 제츠는 외국인 선수가 최소 1, 2순위는 다 해내야 했다.
그만큼 제츠 타선은 시원시원하지만, 가벼웠다.
<2번 타자 한영훈(1루수)>
1구 : 스트라이크(142km, 커터)
2구 : 볼(134km, 슬라이더)
3구 : 2루수 앞 땅볼(141km, 커터)
ㄴ 허, 허허... 우리 1, 2번은 왜 꼭 연속 아웃당할 때마다 2루수 앞 땅볼로 잡히는 거 같냐...
ㄴ 우리 1, 2번은 1, 2번보다 2, 3번, 아니면 중간에 영도 껴서 2, 4번이 어울리는데...
ㄴ 타율이 높으니 출루율도 높은 편이긴 한데 답답하긴 함. 영도한테 공이나 좀 많이 보여주지.
손성호는 그나마 스프레이 히터지만, 한영훈은 당겨치기 비율이 높은 풀 히터였다.
안성흠은 한영훈이 좋아하는 코스로, 하지만 철저히 바깥쪽으로 공략했고, 의도대로 2루 땅볼을 끌어냈다.
‘한 번만 걸려라, 한 번만.’
영도는 타석에 들어서며 깊게 숨을 골랐다.
안성흠은 언제나 안정적으로 압도적인 투수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KBO 진출 이후 가장 위협적인 상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와는 상성이 굉장히 안 좋은 투수지.’
같은 급이라면 힘으로 찍어누르는 파워피처가 훨씬 상대하기 편했다.
아무리 강력한 파워피처라 해도 힘싸움으로 가면 자신이 있었으니까.
파워피처의 커맨드는 같은 급의 피네스 피처보다 떨어지는 게 당연하니 영도에게도 찬스가 훨씬 많았다.
이번 시즌부터 조이 보토의 메커니즘을 참고, 치기 힘든 코스의 공은 아예 걸러내기로 한 상황에서 안성흠처럼 비슷한 코스에 몇 번이고 던져댈 수 있는 투수가 훨씬 부담스러웠다.
[이번에도 바깥쪽 낮은 코스에 꽉 차게 들어갑니다! 투심으로 가볍게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하는 안성흠!]
[저런 공은 보통 한 경기에 한 투수가 서너 개 정도 기록하면 컨디션이 좋다고 평가하는 공인데... 안성흠은 저런 게 10개는 나온단 말이죠. 저러니까 메이저리그에서도 계속 욕심을 내는 거겠죠.]
첫 타석에서 바깥쪽 공을 끌어당겨 워닝 트랙까지 날려 보낸 걸 지켜본 안성흠은 더욱 철저하게 바깥쪽 승부를 이어가기로 했다.
바깥쪽을 끌어당겨 까마득히 날려 보내는데, 다른 평범한 타자들을 상대할 때와 비슷한 레퍼토리로 상대했다가는...
특히 부산 세일러스 타자들을 두고 던져야 하는 안성흠과 박시찬은 1점, 1점에 민감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영도에겐 무조건 바깥쪽 승부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 참... 이런 투수가 좀만 더 많았으면 나 같은 타자들은 먹고살기 힘들었겠네.’
바깥쪽으로 일관하는 안성흠의 투구를 무시하고는 싶은데, 또 무시하기엔 너무 존 근처에서 놀았다.
존 안으로 공 한 개, 바깥으로 공 한 개.
이 범위에서 약 올리듯 넣었다 뺐다...
‘흔히들 생각하는 스테레오타입의 공갈포들이었으면 진작 배트 하나는 부러뜨렸겠어.’
전생에서부터 인내심만큼은 자신 있던 영도도 계속 때리기 싫은 공만 들어오니 슬슬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 파워형 캐릭터들의 스테레오타입이던 동료 공갈포들을 떠올렸다.
미국의 성격 나쁜 근육형님이었으면 이미 사고 한 번 치지 않았을까, 하면서.
‘아... 속았다...’
그렇게 바깥쪽 승부로만 일관하던 안성흠은 2-2 카운트에서 처음으로 몸쪽 공을 던졌다.
오매불망 몸쪽 공만 기다리던 영도는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지만...
‘내 생각보다도 몸이 더 홈에 붙어 있었어.’
계속된 바깥쪽 승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전진한 몸.
그리고 처음부터 미끼였던, 몸쪽 깊숙한 코스에서 다시 한 번 몸쪽으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
어떻게든 헛스윙 삼진은 피하기 위해 몸과 배트를 배배 꼬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이런 형편없이 무너진 자세에서 때린 타구가 유의미한 결과를... 음?
[말도 안 되는 자세에서 일단 맞췄습니다! 어? 유격수, 유격수 뒤로! 좌익수와 중견수도 급히 달려오지만... 떨어집니다! 아니, 이 타구가 내야를 벗어납니다!!]
[내야를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일반적인 좌중간 안타예요! 외야수들이 전체적으로 좌익수 쪽으로 치우친 후진 수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 위치에 떨어진 거면 그냥 평범한 안타만큼 뻗은 거거든요?]
[삼단 분리, 아니, 사단, 오단, 육단... 인간의 몸이 따로 놀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따로 논 자세 아니었습니까? 저 자세에서 때린 타구가 저렇게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건가요?]
[하, 하하...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현역 때는 완전히 받쳐놓고 때려도 저 정도 비거리가 나왔던 것 같은데...]
타격 자세만 놓고 보면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하지만 첫 타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
온몸이 배배 꼬여 하체는 들리고, 허리는 멈추고, 팔은 접힌 자세에서 이뤄진 타격이었지만, 그 타구가 내야를 한참 벗어난 외야 그라운드에 떨어지는 안타가 되었다.
[저 표정은 1회에도 봤던 것 같은데요. 1회에도 유영도 선수의 타구를 처리한 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던 최찬우 선수, 이번에도 똑같은 표정입니다.]
[안성흠, 나중도 선수의 표정도 똑같네요. 그냥 허탈하니 웃을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죠?]
사실, 영도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워낙 표정이 없는 선수라 티가 나진 않았지만, 영도도 예상하지 못한 타구였다.
‘다른 건 몰라도 맞추면 생각보다 멀리 뻗는다고 듣긴 했지만...’
동급 선수들과 비교하면 생각보다 가벼운 구위.
마린 필드의 높은 파크 팩터로 인한 비거리.
마지막으로 영도의 괴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나온 결과가 바로 지금의 안타였다.
‘제법이네.’
‘저게 메이저리거인가.’
첫 타석에 이어 두 번째 타석 역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다만, 확실한 건 비교적 안성흠의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서울 제츠의 첫 안타는 유영도 선수의 배트에서 나왔습니다. 역시 시즌 초반 가장 주목받는 맞대결이었던 만큼 흥미로운 승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KBO에서 미리 보는 메이저리그급 대결인 거죠. 확실히 수준이 높아요. 다양한 구종과 정교한 제구력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투수와 이를 압도적인 파워로 극복하는 타자의 대결로서는 거의 교과서에 가깝습니다.]
투수가 완벽한 공을 던졌지만, 타자의 파워에 한 대 얻어맞아 자존심을 구기고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첫 타석.
타자가 투수의 공에 완전히 속아 꼴사납게 자세까지 흐트러지며 무너지고 안타를 뽑아낸 두 번째 타석.
두 특급 선수의 맞대결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서로 자존심을 구기며 자존심을 지키는 정면 대결이었다.
[최찬우를 제외하면 그 어떤 타자도 타일러 로즈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성흠 선수의 호투에 살짝 밀리는 감이 있지만, 타일러 로즈 역시 굉장합니다.]
[타일러 로즈가 잘해주니까 안성흠도 빛나는 거예요. 0-0에 볼넷도 없고, 안타 수도 적으니까 긴장감이 유지되는 거죠. 아니었으면 아무리 안성흠과 유영도의 맞대결이 흥미롭다고 해도 지금만큼의 긴장감을 만들지 못했겠죠.]
둘의 대결이 이어지는 동안 제츠의 마운드를 든든히 지키며 경기의 긴장감을 유지해주는 타일러 로즈 역시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서울 제츠가 1안타, 부산 세일러스가 2안타에 그치는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며 경기도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영점조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