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할만하네 > (31/200)

< 할만하네 >

[안성흠의 최대 기대치는 금강불괴를 뺀 마크 벌리 정도지. 마크 벌리한테 금강불괴를 빼서 뭐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크 벌리. 조용한 에이스의 대명사.

38라운드에 지명되어 조용하게 입단해 통산 200승을 넘긴 대투수가 은퇴까지 조용히 한, 개인 성격이 조용하고 점잖은 선수였지만, 커리어 자체도 ‘조용함’, 그 자체였다.

그렉 매덕스와 함께 유이한 14년 연속 200이닝-10승 달성자, 사이영상 5위가 개인 최고 커리어였지만, 몇 시즌을 묶어 평가하면 그보다 나은 선발투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매 시즌 꾸준했던 선수.

14년 연속 200이닝을 달성하고 15년째에도 200이닝에 육박했을 정도의 금강불괴.

절대 화려하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이 선수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화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국 남은 기록은 화려했던 선수.

심지어 한국 팬들이 ‘7이닝 2실점 형님’이라는 애칭을 붙여줬을 정도로 매 경기 소위 말해 ‘계산이 서는’ 에이스였다.

“사실, 나도 마크 벌리의 현역 시절은 희미해. 커리어 마지막 시즌의 기억이 조금 나는 정도?”

“전 영상으로 다 챙겨보긴 했습니다. 야구가 발전해서 그 당시의 임팩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괜찮아. 원래 그 형은 임팩트가 없는 게 임팩트인 선수거든. 오히려 당시 팬들처럼 베테랑에 대한 리스펙트까지 없이 담담하게 보는 게 딱 그 형한테 어울리지.”

“... 형이라... 선배랑도 한 30살 차이 아닙니까?”

“26살...”

통산 214승, 3283.1이닝, 3.81의 통산 방어율, 117의 조정 방어율, 1870개의 탈삼진.

마크 벌리는 분명 아주 뛰어난 프론트라인 선발이었지만, 다승을 제외한 나머지 기록들은 역사에 남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90마일 전후의 평균 구속, 4, 5개의 주력 구종, 빠른 인터벌과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우완 투수라는 것만 빼면 정확히 마크 벌리를 떠올리게 하는 투수가 KBO에 등장하면서 지금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우리 에이전시에서 판단한 바로는 메이저리그에서 아주 잘 풀리면 3선발급, 높은 확률로 4선발급, 기대에 못 미치면 롱릴리프야. 당시 마크 벌리에 비해 상대적인 구속, 구위는 괜찮지만, 이닝 소화력, 커맨드, 수비력은 아쉬운 편이라는 거지. 이런 투수들은 정교함이 아주 조금만 떨어져도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니까 예상하기 쉽지 않아.]

“내가 메이저리그는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야 엄청나지. 저 구속이 메이저리그였다면 옛날 마크 벌리급이지만, 한국에선 강속구 투수에 속하는 수준이니까. 공도 빠른 편인데, 제구력은 마크 벌리... 어지간해선 상대하기 힘들지.”

1988년의 야구와 2014년의 야구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2014년의 야구와 2040년의 야구 사이에는 그렇게까지 큰 변화와 발전은 없었다.

그를 감안했을 때, 안성흠의 커맨드와 컨트롤이 마크 벌리급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투수의 기본인 구속과 구위가 비교적 뛰어나고, 무엇보다 메이저리그가 아닌 KBO에서 활약 중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리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승도와 손성호의 말처럼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안성흠은 마크 벌리와 비교되는 '조용한', 하지만 '에이스'였다.

‘확실히 공이 괜찮긴 했는데...’

조정 방어율 100, 즉, 평균 수준도 못 되는 투수들을 상대할 때도 이미 비시즌에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것도 모자라 수 시간씩 추가로 대비하는 선수가 영도였다.

그런데 영도에게도 중요한 승부인 안성흠과의 대결을 앞둔 지금은?

이미 에이전시를 통해 철저하게 분석된 안성흠의 영상을 받아 수십, 수백 번씩 돌려보았고, 수 시즌 동안 그를 분석하고 상대한 팀 동료들에게도 이런저런 조언들을 구했다.

조언을 종합하면 ‘공의 구위와 구속, 다양한 구종만 해도 골치 아픈데, 정교한 커맨드까지 겹쳐 미치겠다’, 정도.

다행히 변형을 포함해 패스트볼 종류의 무브먼트는 심하지 않은 편이고, 구위도 그렇게까지 아주 대단하진 않았다.

‘빗맞아도 쭉쭉 뻗으면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거고, 그렇지 못하면 어렵겠네.’

커터와 투심, 슬라이더와 포크볼, 아주 가끔 던지는 커브까지.

컨택이 최악의 약점이었던 영도에게 안성흠은 딱 좋은 전투력 측정기였다.

비시즌 동안 사력을 다해 시도했던 변화가 어디까지 통할 것이냐...

일단 성적에 초점을 맞추고 시즌을 치러가던 영도는 이 의미 있는 대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

[3구 타격! 높이 떴습니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볼... 2루수 우종준이 잡아내면서 투 아웃.]

[역시 안성흠이네요. 2구 승부 끝에 2루 땅볼로 손성호를 잡아내고, 3구 승부 끝에 한영훈까지. 빠른 인터벌과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를 흔들고 빠른 승부 끝에 잡아내는, 딱 안성흠다운 모습이죠?]

‘어휴... 우리 테이블 세터는 다 좋은데 공을 많이 볼 수가 없어. 너무 적극적인 거지.’

안성흠 같은 투수들은 가능한 한 많은 공을 지켜보면서 분석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손성호-한영훈 라인은 최악의 테이블 세터였다.

뒤 타자들을 위해 공을 많이 끌어내기보다 빠르고 적극적인 승부를 즐기는 타자들이기 때문이었다.

[1회 초 2아웃, 드디어 이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유영도 선수입니다.]

[어제까지 10경기에서 9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시즌 초반 팬들의 관심을 다 가져가 버린 선수죠. 안성흠 선수도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는 상황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대결이죠?]

‘표정 봐라...’

영도는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한 변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시험해보는 게 목적이었다.

까놓고 말해 여기서 결과가 어떻든 메이저리그에 복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백업으로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고, 하위권 팀에서는 충분히 주전으로도 욕심낼 만한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안성흠은 아니었다.

안성흠은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없었고,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능한 시기가 되려면 나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승부에 더 많은 게 걸린, 간절한 선수는 안성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바깥쪽으로 찔러오는 건가.’

영도를 상대하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면서 또 굉장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투수가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던 괴력을 가지고도 배트만 붕붕 휘두르다 무너졌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시즌 초반, KBO의 투수들 역시 매뉴얼에 적힌 그대로 영도를 상대했다.

바깥쪽 공과 변화구 위주의 승부.

10경기 9홈런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처법은 바뀌지 않았다.

[2구는 공 반 개 정도 빠지는 볼이 되었습니다. 자, 정운성 위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초반 10경기에서 유영도 선수의 스윙 빈도가 굉장히 낮아졌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으음... 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우 10경기밖에 안 치렀는데 신뢰할 수 있는 통계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냥 봐도 스윙이 줄었다는 느낌은 확 들어요.]

[원래 메이저리그에서의 유영도 선수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큰 스윙을 붕붕 휘두르다가 걸리면 홈런, 그렇지 않으면 삼진이라는 단순한 선수였죠. 공갈포의 정의에 이렇게까지 부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렇죠. 그런 선수가 이렇게까지 스윙을 아낀다는 건 분명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거겠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스윙 빈도가 줄었는데, 특히 존 바깥으로 빠지는 볼에 대한 스윙 빈도가 엄청나게 낮아졌거든요? 타격폼을 콤팩트하게 바꾸면서 원래 나쁘지 않았던 선구안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스윙 빈도는 낮아지고 성적은 좋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영도 공략법’의 핵심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는 것’이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아도 알아서 속아 스윙하고 어쩌다 맞춰 허무하게 아웃당하니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이유가 없었다.

괜히 스트라이크 잘못 던졌다가 한 번만 걸리면 엄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번에는 슬라이더가 마지막에 살짝 빠져나가면서 2-1 카운트. 지금 화면 보이십니까? 초구가 커터, 2구는 투심이었고, 3구는 슬라이더였는데, 세 개의 공이 약 10cm 범위 안에 전부 들어왔습니다.]

[높이 차이는 한 5cm 정도일까요? 안성흠 선수라고 항상 이런 정교함을 보여주는 게 아닌데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보이네요.]

[유영도 선수는 개막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으니 재미있는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팬들 입장에선 최고죠.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가 최고의 컨디션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는데 싫어하는 팬이 있을 리가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역시... 역시 달라졌어.’

유형근이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과 그리 과하지 않은 훈련량, 무겁지 않은 신념 등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대로의 타고난 천재형이라면, 안성흠은 달랐다.

영도와 비슷한 연습벌레였고, 욕심도 많고 이상도 높은 선수였다.

‘바깥쪽 공에 유독 스윙을 안 한다 싶었는데, 우연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된 거야. 타격폼도 대충 바꾼 게 아니었구나.’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변화를 절대 단순히 넘기지 않았다.

영상에서 본 것과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다면 분명 그건 의도한 것일 테고, 준비한 것들을 다 버릴 생각도 있었다.

그만큼 야구에 대한 상대방의 진지함과 욕심을 인정했다.

‘처음 만나면 투수가 유리하다는 장점도 사라지고... 그냥 공평해진 건가.’

안성흠은 이미 완성된 투수였고, 거기서 조금씩 바꿔가며 보완하는 수준 이상의 변화는 자충수였다.

하지만 영도는 잠재력에 비해 여전히 터지지 못한 선수였기에 큰 변화를 가져갈 수 있었다.

서로 처음 상대하니 안성흠이 유리하지만, 비시즌 동안 큰 변화를 시도한 영도가 정보전에선 앞서는 상황.

안성흠은 공 세 개 만에 준비해 온 전략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2-1에서 4구, 유영도 선수의 첫 스윙이 나왔습니다. 빗맞으면서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파울라인을 벗어납니다.]

[아무리 유영도 선수가 바깥쪽에 약하다고 해도 계속 바깥쪽만 던질 순 없으니 한 번 몸쪽으로 파고들었네요. 하지만 투심 패스트볼이 몸쪽에서 더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배트 손잡이 부분을 때렸어요.]

[안성흠 선수도 절대 쉽게 물러날 선수가 아니죠. 바깥쪽과 몸쪽을 번갈아 던지면서도 계속 정확한 로케이션을 이어갑니다.]

[어쨌든 이번엔 유영도 선수가 좀 아쉽겠네요. 한 번 몸쪽을 보여줬으니 다음 공부터는 바깥쪽에도 던질 수 있게 되었거든요? 물론, 몸쪽도 던질 수 있죠.]

‘허. 인터벌은 참 더럽게 빨라.’

안성흠은 파울 타구 이후 잠깐 몸을 풀고 들어와 자세를 잡자마자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고작 0.몇 초에서 1, 2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정도 레벨에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 타이밍 싸움을 벌이고 주도권을 주고받았다.

회귀 전을 포함해도 이 정도 레벨에서의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기에 안성흠의 변칙적인 타이밍에 대처하는 게 쉽진 않았다.

[역시 빠른 와인드업! 유영도 선수가 대비하기 전에 던집니다!]

몸쪽을 파고들면서 승부를 리셋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바깥쪽일 확률이 높았다.

단점을 떠나서 원래 장타자에겐 바깥쪽 승부가 정석이었고, 2-2 카운트라 비슷하면 골라낼 수도 없었기에 영도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서로 뻔한 상황에서 뻔한 공을 던지는 투수.

제구력에 어지간히 자신 있지 않고서는 던질 수 없는 공이었고, 그만큼 자신의 장점과 능력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에 정확히 걸치는 공을 잡아당겼는데... 이거 너무 멀리 날아가는 거 아닙니까!?]

[중견수가 멈추질 않는데요? 지금 저 공을 때려서 저렇게 멀리 보낼 수가 없는데??]

영도의 배트 컨트롤로는 당겨치기와 밀어치기를 적당하게 번갈아 활용하는 건 무리였다.

장타자인 이상 베이스는 당겨치기가 될 수밖에 없었고, 바깥쪽 낮게 꽉 차는 공은 당겨쳤을 때 좋은 타구가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어지간한 정상급 타자들이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중견수 최찬우, 워닝 트랙까지 달려서... 펜스 바로 앞에서 잡아냅니다. 어우... 최찬우 선수의 표정 좀 보세요. 잡긴 했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입니다.]

[최찬우 선수뿐 아니라 안성흠 선수, 포수 나중도 선수도 황당한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있어요. 두 선수가 가장 잘 알겠죠. 이 공은 절대 저기까지 날아가선 안 되는 공이라는 걸요. 마린 필드의 파크 팩터도 한몫했겠지만, 그래도 저건...]

‘역시 저 정도 투수한테는 볼 카운트 몰리면 힘든 건가.’

‘미친... 저걸 저기까지 날려 보낸다고?’

안성흠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영도를 노려보았고, 영도 역시 슬쩍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메이저리그를 진지하게 준비하는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한 안성흠과 상대의 평가를 높이고 담백하게 다음 타석을 준비 중인 유영도.

리그 내 특급 선수들의 맞대결은 이제 겨우 한 타석이 끝났을 뿐이었다.

< 할만하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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