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미한 기억 >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이 될지도 모를 승부... 초구 던졌습니다. 136km 포심이 낮게 깔려 들어갑니다.]
[사실, 이미 역사적인 순간이죠. KBO 역사상 다섯 번째 4연타석 홈런이 나왔는데, 이 정도는 이미 역사를 쓴 거예요.]
숨막히는 적막.
수만 명이 모인 야구장, 그것도 요란하게 응원하기로 이름 높은 KBO의 야구장이 드물게도 적막에 젖어들었다.
[만약 여기서 다섯 번째 홈런이 나온다면 KBO는 물론, 일본과 미국 포함, 전 세계 야구 역사상 최초의 5연타석 홈런이 됩니다. 1경기 5홈런도 최초, 그리고 마지막 만루 홈런으로 10타점을 채우면서 KBO 역사상 한 경기 최다 타점 기록까지 갈아치우게 됩니다.]
[이야... 진짜 많은 게 걸린 타석이네요. 이 타석 하나로 KBO 역사와 세계 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니... 선수로서 굉장히 큰 게 걸려있는데, 긴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승부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8회 말 2아웃 상황에서 찾아온 영도의 마지막 타석.
잠실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들이 빨리 끝나기도 했지만, 이쯤 되면 영도의 연타석 홈런 기록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은 모든 야구팬들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는 소식도 각 경기의 중계진들을 통해 모두 전달되었고.
게다가 절묘하게 나머지 네 경기도 시합이 빨리 끝나거나 승부가 일찌감치 기울게 되면서 전국의 야구 팬들이 영도의 마지막 타석으로 관심을 돌릴 여건이 마련되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것 참... 감독이 영리한 건가.’
그러나 정작 마지막 타석에 들어선 영도는 혀를 찼다.
마운드에 올라온 이정수는 더러운 볼끝과 투구폼으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 투수였지만, 제구가 심하게 흔들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안타율은 높지 않은데 WHIP이 높아 추격조에서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선수.
그래서 지금 계속 볼이 빠지는 게 기록을 내주지 않으려 일부러 승부를 피하는 건지, 아니면 평소와 같은 이정수인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 골라내기만 해도 충분하긴 하지만.’
어차피 풀 베이스, 만루 상황에 점수 차는 6점.
상대가 승부를 피한다면 그냥 가만히 볼넷을 얻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점수 차가 적거나 밀리는 상황이라면 중심타자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겠지만, 그것도 아닌 이상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 마지막 타석이 어떻게 돌아온 타석이던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이미 여기저기 고장 난 36세의 노장이 140km의 속구에 눈 딱 감고 몸부터 들이밀어서 넘겨준 타석이었다.
한영훈 역시 비교적 쉽게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출루하긴 했지만, 4연타석 홈런이 나온 순간부터 계속 어떻게든 마지막 기회를 이어주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한참 후배 어경준의 허슬과 대선배들의 희생과 의지로 돌아온 마지막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욕심까지 생겨버렸다.
‘어차피 스코어는 이미 벌어졌어. 이 정도면 한 번 정도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이 경기에 남은 마지막 이슈는 영도의 5연타석 홈런 기록이었다.
여기서 볼넷을 골라 1점을 추가해봤자 만족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허무함만 남을 뿐.
그렇다면 차라리 배트라도 휘둘러 아웃당하는 게 뒷맛이 깔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합리화일 수도 있을 테고, 괜히 어려운 공을 건드리기보다 볼넷을 얻어내 5연타석 홈런은 포기하고 마찬가지로 세계 최초인 5연타수 홈런을 노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그것도 뭔가 뒷맛이 찝찝할 것 같았다.
[이정수 선수, 스트라이크를 영 집어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정수 선수에게도 좋지 않아요. 맞더라도 과감하게 승부해야지, 이런 식으로 대놓고 역사적인 기록을 망치려 하면 팬들의 분노를 피할 수 없거든요?]
팬들도 이해하지 못하던 야구계의 불문율들, 올드스쿨한 부분들은 거의 다 사라진 시대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도 있었는데, 상대가 대기록을 앞두었을 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 역시 남아있는 불문율 중 하나였다.
투수와 타자의 정면승부가 모든 것의 기본인 스포츠답게 그런 부분에서는 낭만이 살아있었다.
만에 하나 지금의 계속된 볼질이 의도한 게 아니다 할지라도 이 순간만을 기다린 팬들의 분노는 피할 수 없었다.
‘후우... 그래... 욕 먹기 싫으면 이게 넘어가길 빌어라. 난 최선을 다할 테니.’
고민하던 영도는 마음을 굳혔다.
찝찝하게 5연타수 홈런 같은 걸 노리지 않기로.
[인터벌이 길어집니다. 이정수 선수, 쉽사리 공을 던지지 못합니다. 아... 여기서 한 번 발을 풀면서 쉬어갑니다.]
[어휴... 저였으면 다리가 풀려서 마운드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지금.]
ㄴ ... 이정수도 불쌍하긴 하다. 마운드 올라와서 첫 타자가 5연타석 홈런을 눈앞에 둔 선수라고? 몸이 풀리기 전에 다리가 풀리겠다.
ㄴ 솔직히 이 꼴 만든 정유성한테 끝까지 맡겼어야지. 똥 싸는 놈 따로, ㅈ되는 놈 따로면 누가 제정신으로 던지겠냐.
ㄴ 하긴... 스트라이크 못 던지는 것도 이해가 되네.
[4구를 준비하는 이정수... 와인드업, 던졌습니다! 아! 빠지는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유영도 선수! 한참 빠진 공을 걷어냅니다.]
[오...? 유영도 선수도 결심한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는 애매한 공도 골라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3-0에서는 빠진 공에 배트를 휘둘렀어요. 걸어나갈 생각은 없다는 뜻이겠죠.]
[볼넷으로 나가 타점을 올리는 것보다 아웃되더라도 제대로 마무리 짓겠다, 그런 생각인 것 같습니다.]
[멋지네요. 스타가 되려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죠.]
ㄴ 크으... 멋있다... 이게 메이저리거인가?
ㄴ 진짜 스타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팬들이 바라는 게 있는데.
ㄴ 근데 유영도는 이런 이미지 아니긴 했지. 메이저리그에서 KBO로 오면서 달라진 건가? 역시 스타성은 리그 수준에 달린 것이란 말인가?
ㄴ 아무리 그래도 5연타수 홈런 노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잖아. 아무도 유영도한테 뭐라 안 할 걸.
무거운 긴장감을 뿌리치고 던진 4구째 커브가 손에서 빠진 순간, 이정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절대 의도적으로 공을 뺀 게 아니었고, 본인도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정면승부로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영도가 한참 빠지는 공을 걷어낸 순간, 이정수의 표정은 놀람의 단계를 지나 안도, 결심으로 넘어갔다.
‘다음 공은 그래도 칠 수 있게 오려나.’
18.44m는 생각보다 훨씬 먼 거리였지만, 타석에 서면 의외로 투수의 표정이 보였다.
투수의 표정과 마운드에서 내뿜는 포스를 통해 분위기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고.
영도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베테랑이 되면 이런 것까지 고려해 승부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읽은 이정수의 분위기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이정수 선수,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모습입니다.]
[뭔가 잘은 모르겠지만... 다음 공에서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여러분도 다음 공을 던질 때까진 눈을 떼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운드와 타석, 18.44m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드넓은 잠실돔 전체로 퍼져나갔다.
야구로 먹고사는 야구인들은 다음 공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이 날 것을 직감했고, 팬들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자, 와라.’
타석에서 지켜보는 이정수의 표정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와인드업부터 디딤발을 내딛고 오른손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볼을 놓는 순간까지...
이정수는 지금까지와 달리 상당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마지막 공을 손에서 놓았다.
‘가장 위협적인 공이 날아오는데... 왜 다 보이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던가.
형편없는 공만 던지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공을 던졌음에도 영도는 이번 공이 가장 잘 보인다고 느꼈다.
실밥이 보인다거나, 멈춘 것처럼 보인다거나, 수박만 하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한 건 평소보다 선명했고, 평소보다 느렸으며, 평소보다 컸다.
[3-1, 매우 중요한 볼카운트에서 던지는 매우 중요한 공입니다. 투수 와인드업... 던졌습니다! 벼락같이 나오는 스윙! 정확하게 중심에 맞았습니다!!!!!]
타격이 이뤄진 순간, 이정수는 그대로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지만 허탈하게 웃었다.
담백한 플레이로 유명한 영도는 평소처럼 얌전히 배트를 내려놓고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제츠 선수들은 일제히 덕아웃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할 수 있었던 대형 홈런입니다!! 유영도 선수, 야구 역사상 최초의 5연타석 홈런과 한 경기 5홈런을! 그것도 이 거대한 잠실에서 기록합니다!! 한 경기 최다 타점은 덤일 뿐이었습니다!]
[이야... 이게 되네요? 진짜 이런 기록이 나오긴 나오는군요? 역시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 같아요.]
ㄴ !!! 갔다!! 갔어!! 갔다고[email protected]&^!^%*#$!
ㄴ 5!연!타!석!!!!
ㄴ 영도가 해낼 줄 알았다니깐!!!
ㄴ 갓!영!도! 이제부터는 영도갓의 시대다!!
ㄴ 미친... 메이저리거라는 게 이 정도로 대단한 거였나...?
ㄴ 메이저리그 방출 선수 수준...
ㄴ 갓갓갓!! 갓갓갓의 5연타석 갓갓 폭발!!
‘이런 기분인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완봉을 밥 먹듯이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나, 싶었다.
회귀 후에도 아마추어 야구와 마이너리그에서 홀로 날뛰긴 했지만, 그땐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이런 기분을 잡생각 없이 그저 만끽하던 게 워낙 옛날이다 보니 지금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미친놈아!! 뭐 이렇게 건조하게 돌아!!”
“덤블링이라도 해! 문워크라도 하라고!!”
“이 순간에 그것 밖에 못하냐!? 나였으면 앞구르기라도 했어, 미친 X끼야!!”
“너 한국 대체 왜 온 거야!! 이 예쁜 새X!!”
“네가 오자마자 스포트라이트는 다 뺏어가는구나!!”
미리 베이스를 꽉 채웠던 어경준과 이경모, 한영훈은 덕아웃을 박차고 뛰쳐나온 동료들과 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평소처럼 건조하게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돌아온 영도를 격하게 맞이했다.
영도의 성격 때문에 다들 아직 어색한 상황에서 손성호, 조규영, 김원상, 류종인 등 약간이나마 친분을 쌓은 선수들이 총대를 메고 먼저 뛰어들었고, 나머지 선수들도 분위기를 틈타 달려들었다.
[‘비운의 유망주’, ‘한국이 쫓아낸 유망주’ 유영도 선수!! 한국으로 복귀해 맞이한 KBO 데뷔전에서 KBO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비록 돌고 돌아 겨우 도착한 한국이지만, 도착과 동시에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습니다!]
[역시 야구는 잘하는 선수가 잘해요. 어디서 운동하느냐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재능이 있고, 저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 어디서 야구하든 응원해주면 되는 거예요. 저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성실한 선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여기까지 오기가. 그동안 멀리 있어서 못한 응원, 이번 시즌 내내, 1년 내내 넘치도록, 질리도록 보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유영도 선수는 그보다 더한 활약으로 우릴 기쁘게 해줄 겁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선수죠. 어휴... 데뷔전부터 다른 곳도 아니고 잠실에서... 제츠 팬들은 지금 거의 미쳐가고 있을 것 같네요.]
ㄴ 제츠 팬, 여기 누웠다...
ㄴ 제츠 놈들... 부럽다...
ㄴ 우린 왜 못 데려왔어? 제츠랑 우리랑 비슷하게 영입하러 갔다면서!!
ㄴ 제츠 팬, 여기 누웠다...(2)
ㄴ 영도는 오래전부터 우리 선수였다고!! 어릴 때부터 제츠 골수팬으로 유명했는데!! 그때부터 우리 선수였어!!
ㄴ 제츠 팬, 여기 누웠다...(3)
ㄴ 제츠 팬, 여기 누웠다...(4)
< 희미한 기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