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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 > (27/200)

< 재앙 >

1회부터 대량 득점에 성공한 제츠는 2회에도 터진 영도의 솔로 홈런으로 5-0까지 앞서나갔다.

그리고 일찌감치 점수 차이가 벌어진 경기에서 나오는 언제나와 같은 단점이 드러나면서 4회 말까지 무기력하고 어정쩡한 공격으로 일관해 5-1 스코어를 유지했다.

다 죽어가던 니키 존스는 제츠 타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4회까지 투구 수 83개로 버텨냈다.

에이스로 데려온 만큼 이닝 소화 능력이 부족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3이닝 동안 투구 수 40개와 1이닝 투구 수 40개는 체력소모의 차원이 달랐기에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그래도 에이스의 데뷔전을 4이닝으로 끝낼 순 없었다.

[다섯 번째 공을 준비하는 투수 니키 존스. 오늘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유영도를 상대로 신중한 승부를 이어갑니다.]

[이번 선두타자 승부가 중요해요. 이제 막 마운드에 올라왔는데, 첫 만남부터 이렇게 되면 시즌 내내 유영도 선수에게 고전할 수 있거든요? 특히 멘탈이 강한 편은 아니라서 첫 타자 승부를 신중하게... 아...]

[그대로 걷어 올리는 유영도! 좌익수! 좌익수 뒤로! 좌익수가 쫓아가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3연타석 홈런! KBO 데뷔전부터 어마어마한 괴력을 선보이는 유영도! 그동안 홈런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던 제츠 팬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선사합니다!]

[그나마 유영도 선수의 약점이라면 바깥쪽, 혹은 떨어지는 변화구거든요? 지금 바깥쪽으로 떨어뜨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중앙에서 높게 구사됐어요. 완벽한 실투고, 이런 걸 놓칠 선수가 아니었죠.]

오늘 영도의 컨디션은 하늘을 뚫었다.

운동을 일찍 시작해 몸이 일찍 만들어진 덕도 한동안은 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3연타석 홈런을 설명할 수 없었다.

‘3연타석 홈런은 처음인가...’

영도는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감정 기복과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3연타석 홈런을 때리고도 평범한 외야 플라이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제츠 덕아웃은 말할 것도 없이 난리통이었고.

그래도 속으로는 기뻐하는 중이었다.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장타력은 알아줬던 만큼 연타석 홈런은 몇 번 있었지만, 3연타석은 처음.

그토록 기다려온 KBO 데뷔인 만큼 데뷔전에서의 맹활약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홈런 3개 중에 핥고 넘어간 홈런 한 개가 없냐? 3개가 전부 다 초대형이야!”

“성호 형, 우리가 너무 무기력하지 않아? 우리 둘이 합쳐서 안타 한 개, 볼넷 한 개인데...”

지난 시즌까지 제츠 타선을 이끌었던 손성호와 한영훈은 오늘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상대적인 부진이지만, 함께 타선을 책임지는 영도가 워낙 미쳐 날뛰다 보니 심하게 비교되었다.

팬들이란 원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반응하는 법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쉬워? 수준 차이나?”

“그 정도는 아니고... 선배님도 느끼고 계시잖아요. 오늘 니키 존스는 절대 에이스급이 아니라는 걸.”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홈런 세 개를 꽂아버릴 정도까진 아니지.”

“홈런이야 어떤 투수한테든 타이밍만 맞으면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냥 운 좋게 세 번 연속으로 타이밍이 맞은 거지, 니키 존스가 수준 미달이라거나 상대하기 쉽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물론, 영도는 KBO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MVP급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걸 본인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하지만 MVP도 타율은 높아 봐야 3할 중후반, 홈런은 40여 개, OPS 10할 전후, WAR 8.0 근처에서 정해졌다.

3타수 3안타, 3연타석 홈런은 수준 차도 있지만, 운이 더해져 나온 기록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니키 존스는 여기까지였습니다. 5회 말 선두 타자인 유영도 선수에게 3연타석 홈런을 허용하면서 최악의 형태로 데뷔전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아직 날도 풀리지 않았고, 개막전인 만큼 몸 상태도 완전히 올라오지 못한 외국인 투수를 5회에도 올린 건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1회에만 41개의 공을 던졌으니 체력 소모도 더 컸을 거고, 투구 수 84개면 개막전임을 감안했을 때 바꿔줄 만도 했거든요.]

영도에게만 3개의 홈런과 4타점을 허용한 존스는 4이닝 6자책점의 기록을 남긴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3개의 홈런을 허용하면서 데뷔전부터 천적을 만난 것은 덤이었다.

“아... 이제 좀 뭔가 알겠다, 싶었는데 여기서 바꾸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상대해보면 큰 거 하나 칠 수 있었는데 그걸 바꿔? 약았다, 약았어.”

“형들... 벌써 세 타석이나 들어갔으면 그런 말 하기 창피하지 않아? 옆에 데뷔전 치른 한참 동생은 홈런만 세 개 때렸는데?”

안티들로부터 빗자루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던 조규영.

수비와 공격이 극과 극을 걷는 선수지만, 오늘은 2루타 한 개를 기록, 팀의 간판인 손성호-한영훈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그의 성격상 이 기회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이런 날은 144경기 중 14경기도 있을까 말까 했으니까.

“하! 이제 겨우 5회거든? 와이번스 불펜? 너 오늘 끝나고 보자. 이 자식이 오랜만에 좀 잘했다고 맞먹으려 드네?”

“... 형, 난 수비 준비하러 갈게. 규영아, 형이 뭐라 했지,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송구 좀 신경 써서 던져줘, 알았지?”

손성호는 조규영에게 헤드락을 시전했고, 익숙지 않은 1루수로 경기에 나선 한영훈은 내야 수비의 지휘자 조규영에게 잘 보이려 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영도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다음 이닝 수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

[빗맞은 타구가 3루 쪽으로! 바운드 큽니다!]

[대쉬해야죠! 이거 기다리면 안 돼요!]

아직 리그에 적응하진 못했지만, 느려진 평균 타구 속도 덕분에 무난한 수비를 보여주던 3루수 유영도.

하지만 타구 속도가 느려도,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전 경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 늦었다.’

바운드가 큰 타구는 체공시간이 길어 빠르게 대쉬해 잡아야 1루에서 승부할 수 있었다.

3루는 이런 경우가 잦아 좌우 범위는 봐줄 수 있어도 전진 수비만큼은 잘 해내야 했다.

‘아쉬운 대로 숏바운드 처리라도...’

대쉬 판단이 늦었다면 최대한 체공 시간이라도 줄여야 했다.

바운드가 제대로 튀기 전에 그라운드 바로 위에서 걷어내는 숏바운드 처리는 난이도가 높은 수비였다.

하지만 수비 시 경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회귀 직후부터 테크닉 만큼은 어디서도 밀리지 않으려 날카롭게 갈고 닦았다.

[숏바운드로 잡아서, 이거 됩니까? 어? 왜 저기 있죠? 1루에서 일단 아웃입니다.]

[아지 켄드릭... 이거 상상 이상으로 느린데요? 유영도 선수의 숏바운드 처리는 훌륭했지만, 바운드 하나 더 앞에서 숏바운드로 잡았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주자가 아직도 1루를 못 밟았네요?]

[물론, 홈런 쳐달라고 데려온 1루 용병이고, 체구도 굉장한 만큼 느릴 거라고는 모두 다 예상했을 겁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죠? 유영도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느리다고 평가받던 선수인데, 이 선수는 느리니까 그냥 넘겨버리잖아요. 그리고 이 정도로 느린 선수도 아니에요.]

보통 이런 타구는 1루에서 타자를 잡아내지 못해도 내야 안타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수비력을 평가할 땐 보이지 않는 에러도 평가에 들어갔다.

‘기분은 나쁘지만... 일단 잡아낸 걸로 만족하자.’

무엇보다 이런 타구로 주자를 내보내면 팀 전체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팀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욕심 많은 영도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대쉬 타이밍을 놓친 것만 해도 기분이 나쁜데, 주자까지 살았다면 앞으로 일주일은 그 여파가 이어질 뻔했다.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단은 좀 피곤해도 경기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보자.’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9이닝 내내 집중력을 끌어올린 채 버틸 순 없었다.

하지만 아직 수비가 부족한 영도는 집중하고 버텨야 그나마 실수 없이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각보다도 투수들의 평균 수준이 낮아 144경기 중 최소 72경기 정도는 머리를 비우고 휘둘러도 될 것 같다는 것.

아직 몸에 익지 않은 타격폼이 흐트러지는 것만 유의하며 휘둘러도 성적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본말이 전도되면 안 되지. 어디까지나 내 세일즈 포인트는 타격이니까.’

메이저 복귀의 키 포인트는 결국 타격이긴 했다.

영도를 지켜보는 모든 팀이 영도에게 타격을 기대하지, 수비를 기대하진 않을 테니까.

3루 수비는 어디까지나 몸값을 높이기 위함이었고, 어필 포인트는 타격이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잊어선 안 되고, 잊을 리도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그래도 어깨가 좋으니까 좀 뒤에서 잡아도 승부가 되네.”

“... 저 친구가 느린 겁니다. 100명 중 95명은 1루에서 살았을 형편없는 수비였습니다.”

“당연하지, 누가 뭐래? 뛰기도 전에 날아다니려고? 일단 이 정도로 막은 것도 잘했어. 앞으로 경험 쌓이면 너도 수비 좀 하겠다, 야. 재능은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선배님이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감사합니다.”

그래도 수비를 포기할 순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3루 수비만큼은 회귀 후 처음으로 시도한 거니까.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만 쌓아올리는 탑이었다.

초월적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올라온 지금, 이 3루 수비만큼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빌어먹을 놈 때문에 실패했을 뿐, 나 역시 충분한 재능이 있었음을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

[아니, 또!! 이거 진짜입니까? 이게 진짜로 일어나는 일입니까?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타구! 이번에도 또! 또 넘어갑니다! 이게 뭡니까 대체!!]

[데뷔전 한 번 기가 막히게 하네요. 허, 참... 데뷔전부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KBO 역사상 네 번째 4연타석 홈런을 데뷔전에서? 개막전에서? 정말 이런 타자가 메이저리그에선 지명할당 대상자인 건가요?]

그리고 7회 말...

다시 한 번 타석에 들어선 영도는 다시 한 번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4연타석 홈런을 달성했다.

마운드가 빈약한 와이번스에서도 패전조 역할을 맡은 투수는 영도의 파워를 전혀 이겨내지 못하고 쓸려 내려갔다.

이번에도 역시 몬스터 홈런이었다.

[메이저리그가 얼마나 높은 벽인지, 그리고 거기서 풀타임 3년을 채운 유영도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4연타석 홈런... 하하... KBO 마운드의 재앙과도 같은 선수가 등장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손성호 선수 표정 좀 보세요. 대체 저런 후배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먼저 출루해서 앞에서 베이스를 돌면서도 계속 뒤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어요.]

[지금이 7회 말 원 아웃 상황이거든요? 앞으로 아홉 타자가 더 들어서야 유영도 선수의 다섯 번째 타석이 돌아오는데, 과연 5연타석 홈런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홈런으로 8-1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제츠의 9회 말 공격은 없을 가능성이 아주 크죠. 마음 같아서는 꼭 유영도 선수의 다섯 번째 타석이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네요.]

6-1이 된 순간, 와이번스는 니키 존스를 내리고 패전조 투수들을 올렸다.

승부는 기울었고, 홈팀 제츠의 9회 말 공격은 99% 이상의 확률로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니키 존스 이후 나선 투수들이 오늘 상태가 영 아니었던 니키 존스보다도 못하다는 게 희소식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웃카운트 다섯 개 안에 아홉 명의 타자가 들어서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연타석 기록은 두 경기 동안 이어져도 인정되지만, 그래도 역시 한 경기에서 나오는 게 깔끔했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난 것과 다름없지만, KBO 최초의 5연타석 홈런 기록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제츠와 와이번스, 양 팀 팬들은 물론, 타 팀 팬들마저도 이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40시즌 KBO 개막전, 영도는 데뷔전부터 모든 한국 야구팬들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 재앙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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