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맨쇼 >
“와... 이게 뭐죠? 제가 지금 영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요. 저 선수가 우리 에이스라고 데려온 그 선수 맞죠? 하아...”
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아조씨... 우리 망한 고야?
ㄴ 영상으로 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배팅볼이야? 저게 유현민보다 나은 게 뭐야? 차라리 유현민이 낫겠는데?
ㄴ 다른 팀은 20승 투수 유형근이 에이스고, 옆동네 세일러스도 꼴찌 후보 주제에 20승짜리 안성흠에 2선발 박시찬도 어지간한 외국인보다 나은데... 우린 외국인 둘에 토종 에이스까지 세일러스 2선발보다 못해...
“솔직히 저도 그렇게 말하긴 했죠. 니키 존스, 뭔가 많이 불안하다고. 근데 개막전부터 1회에 4점씩 내줄 줄은 몰랐네요.”
ㄴ 진짜 어쩌냐... 이번 시즌 큰일 났네.
ㄴ 아니, 적당히 못 해야 앞으로 나아질 거란 기대라도 하지, 그냥 근본부터 답이 없네...
ㄴ 이건 적응 실패나 컨디션 난조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뭐,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와이번스를 응원할지, 그래도 영도는 응원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던 오일도는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비록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내진 못했지만, 이를 머리와 성실함으로 극복해 나름 A급 불펜투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 출신이었다.
보는 눈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제가 보기에 아주 못난 투수는 아니에요. 적응만 순조롭게 되면 시즌 끝날 때쯤엔 현민이랑 비슷한 성적은 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외국인 1선발한테 기대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창원 와이번스는 탄탄한 타선 균형에 비해 투수진이 빈약한 팀이었다.
외국인 투수를 제외하면 28세의 유현민이 10승 전후에 FIP 4점대 초반, WAR 2.0 근처의 계산이 서는 리그 30위권 선발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애매한 투수들.
즉, 짜임새는 좋지만, 최상위권이라고 보기 힘든 타선의 덕을 보려면 투수진도 최소한은 버텨줘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외국인 1선발이 다른 팀 3선발 수준에 그치면...
“잘못하면 진짜 큰일 나겠는데요? 케빈 팩스턴이 있긴 한데, 애초에 니키 존스보다 별로라 2선발로 데려온 친구인데...”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와이번스가 먼저라는 둥, 그래도 유영도까진 응원해야 한다는 둥 장난스런 대화를 나누던 채팅창은 어느새 분위기가 싹 가라앉아 와이번스의 2040시즌을 걱정하고 있었다.
개막전에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와이번스 팬들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츠나 와이번스처럼 약점 하나가 치명적인 팀은 그 부분을 메우느냐, 메우지 못하느냐에 한 시즌 농사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시즌 초반 몇 경기면 충분했다.
“그래도 우리 타자들을 믿어봅시다. 우리 타자들은 충분히 믿을 수 있잖아요? 우리의 믿음직한 간판! 한윤이만 출루하면 충분히 우리도 대량득점할 수 있어요.”
ㄴ 그럼, 그럼! 3년 연속 타율 TOP 5에 WAR TOP 10!!
ㄴ 장타율보다 출루율이 높긴 하지만... 그래도 출루 하나는 귀신이지!!
ㄴ 톱타자 출루하고 2번이 받쳐주고 클린업에서 불러들이자! 우린 그거만 하면 된다고!!
서울 제츠가 전통적인 타순 역할을 무시하고 상위 타순에 좋은 타자들을 몰아넣었다면 창원 와이번스는 전통적인 타순 역할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좋은 타자들을 보유한 팀이었다.
3할 중반 타율에 4할 중반 출루율, 리그 최정상급의 도루 능력을 보유한 간판스타이자 톱타자 2루수 김한윤.
그보다 어느 정도씩 모자란 좌타자 연우정, 주루를 제외한 4툴 플레이어 3루수 오영한, 홈런타자 1루수 아지 켄드릭, 정교함은 좀 부족해도 20홈런이 가능한 좌익수 김영운까지.
상위타순이라 할 수 있는 1번부터 5번까지 모든 타자가 전통적인 역할에 정확히 부합했고, 심지어 좌우 분배까지 완벽했다.
그런 만큼 공격력은 리그 내에서도 상위권이었고, 팬들은 타선만 믿고 기적을 기대했다.
“그렇지! 이게 김한윤... 와... 와... 이걸? 이걸 잡아?”
ㄴ 이게 왜 잡혀!!! 이게 왜 잡히냐고!!
ㄴ 유영도 수비 못 한다며! 수비는 못 한다며!!
ㄴ 오영한도 수비로는 알아주는데, 오영한보다 못할 게 없는데? 저게 수비 못 하는 선수라고?
ㄴ 대체 메이저리그는 어떻게 된 동네야!? 저 선수가 수준 미달로 3루 자리에서 쫓겨난 선수라고!?
ㄴ 첫 경기부터 아주 난리 났네. 혼자 다 해먹어, 아주.
***
‘너무 잘 맞았... 근데 왜 이리 느려?’
확실히 김한윤은 좋은 타자였다.
모든 선수가 현실보다 꿈을 선택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 타일러 로즈는 KBO 에이스 자격이 충분한 선수였다.
지금은 그런 투수가 좋은 공을 던졌음에도 완벽하게 때려낸 김한윤에게 감탄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때린 타구임에도 타구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게 김한윤의 한계였다.
KBO에서도 커리어 한 시즌 최다 홈런이 3개에 불과할 정도로 형편없는 장타력.
그의 빈약한 파워가 실린 타구는 메이저리그에서 괴물들을 상대하던 영도에겐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깔끔한 핸들링!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핸들링과 순발력으로 걷어내고 1루! 아웃! 아웃입니다. 유영도의 멋진 수비가 서울 제츠의 개막전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장식합니다.]
[와... 유영도 선수 수비 잘하네요? 이게 메이저리거의 수비인가요?]
[옆 나라 일본만 해도 외야수라면 모를까, 내야수 중에 메이저리그에서 수비 지적 안 받은 선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비력 격차가 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야수는 더더욱 그 차이가 클 거예요. 우리도 많이 좋아졌지만, 그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겠죠.]
‘타구 속도가 이 정도면 나도 크게 밀릴 건 없지.’
사실, 맞는 순간 안타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할 순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움직여봤는데 솔직히 이게 걸릴 줄은 몰랐다.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를 거치며 KBO를 경험해봤지만, 그래도 아직 영도의 야구는 메이저리그 기준에 가까웠다.
[시범경기부터 느낀 건데, 유영도 선수의 순발력은 나쁘지 않아요. 퍼스트 스텝이나 타구 판단이 조금 아쉬울 땐 있지만, 글러브질이라고 하죠? 핸들링이나 송구, 수비 범위 같은 부분은 훌륭하거든요?]
[3루수 쪽으로는 빠른 타구가 많이 가지 않습니까? 빗맞은 타구나 번트 수비도 중요하고, 어깨도 강해야 합니다.]
[빠른 타구를 수비해야 하니까 퍼스트 스텝이 더더욱 중요하고, 대쉬 판단, 대쉬 수비도 잘할 줄 알아야겠죠.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이 부분이 좀 아쉬운데, 이거 말고는 아주 훌륭합니다. 수비 기회가 없었을 뿐, 센스는 훌륭해요. 이번 시즌이 진행되면서 수비력도 빠르게 좋아질 것 같습니다.]
[역시... 야구 잘하는 선수들은 어떤 포지션에서든 잘하는 것 같습니다.]
“안타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잡네?”
“그래도 이 정도는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3루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타구까지 선배님한테 미룰 순 없습니다.”
“오... 이 정도만 해줘도 나한테는 충분하니까 앞으로도 부탁 좀 할게. 내가 절대 못 잡을 타구만 맡아주면 남들이 못 잡을 타구는 내가 잡는다고. 나 조규영이야. 알지?”
“하하... 알겠습니다.”
수비가 부족한 3루수 입장에서 그 모든 빈틈을 메워주는 유격수에게 안 좋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소한 수비에서만큼은 저런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선수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수비까지 이렇게 하면 진짜 MVP 되는 거 아니냐? 3루수니까 WAR 쌓기도 어렵지 않을 텐데.”
“하하. 생각 안 합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MVP 후보들은 대부분 3루수나 중견수구나. 어떻게 된 거지? 왜 MVP 후보들이 다 거기 모여있어?”
“아니, 생각 안 한다고...”
정작 영도 본인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가능할 것 같다느니, 상황상 어려울 것 같다느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조규영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이쪽에서 신경 안 쓰는 게 마음 편했다.
[2회 말 선두타자도 손성호 선수입니다. 1회에만 9번 타자까지 한 바퀴 돌았거든요?]
[1회를 어떻게든 넘기긴 했는데, 2회도 시작부터 상위타순이에요. 오늘 니키 존스의 상태를 봤을 때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제츠의 타선은 약점도 많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 않습니까? 특히 상위 타선의 강력함은 그 어떤 팀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할 게 없다고 평가됩니다.]
[손성호, 한영훈이 버티는 좌타 라인에 비해 우타 라인이 굉장히 빈약했거든요? 우희운이 그나마 장타 포텐이 있지만, 그에 비해 생산력은 별로였고요. 상위 타선이 강력하다는 것도 이번 시즌에나 나오는 말이지,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두 선수 외에는 그럭저럭하는 수준은 되지만, 한 방이 부족한 타선이라고 평가되었었죠.]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타자에 장타력까지 겸비한 유영도 선수의 합류가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걸 노리고 영입한 걸 텐데 말이죠. 시범경기부터 지켜보니까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츠 관계자들이나 팬분들은 벌써부터 설레서 난리예요.]
1회에만 투구 수 41개를 기록, 온몸에서 육수를 뿜어냈던 니키 존스는 2회에도 등장하는 제츠의 상위 타자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투수가 타자를 상대하며 표정 관리조차 안 된다는 것에서 그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끝날 정도의 투수는 아니지만.’
선발 마운드를 지키는 최악의 투수라 해도 100명의 타자 중 65명은 잡아내는 게 야구였다.
그리고 니키 존스는 기대 이하라고는 해도 한 팀의 에이스급으로 데려온 투수.
그렇게까지 금방 망가지진 않았다.
[2구 타격! 바깥쪽을 끌어당긴 타구, 2루수 앞 땅볼. 김한윤이 잡아서 1루에, 아웃입니다.]
[손성호 선수의 특징이죠. 이 선수는 어느 상황에서든 오래 기다리지 않아요. 항상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스타일이죠.]
[투수가 흔들릴 땐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만, 이 스타일로 여기까지 온 선수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저 정도 위치까지 올라온 선수한테 야구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칠 자격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그냥...]
[한영훈도 초구! 그리고 다시 2루 땅볼입니다. 김한윤 선수가 오늘 바쁩니다.]
[... 좌타자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죠. 두 선수 모두 딱히 밀어치는 타자들도 아니고요.]
[2회 말, 서울 제츠 공격]
<1번 타자 손성호(지명타자)>
1구 : 볼
2구 : 타격 (2루수 땅볼 아웃)
<2번 타자 한영훈(1루수)>
1구 : 타격 (2루수 땅볼 아웃)
ㄴ 진짜 이땅선생들 답답해 뒤지겄다...
ㄴ 뭐... 손성호랑 한영훈을 붙여놓는 이상 시즌 내내 볼 장면이지.
ㄴ 아오, X바... 2루 땅볼 좀 제발 적당히 좀 쳐라. 어떻게 된 게 쳤다 하면 2루 땅볼이냐고!!
ㄴ 이게 우리 팀이지. 투수 흔들리면 발정나서 방망이 붕붕 휘두르다가 땅볼이나 치는 거지. 좀 더 잘 치면 내야 플라이고.
ㄴ 야! 다 닥쳐! 우리 영도 나오잖아!!
서울 제츠의 단점이라면 팀 차원의 끈끈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상대 투수가 흔들리면 조금 참으면서 물고 늘어져야 팀의 공격이 편해지는데, 제츠 타자들은 그런 거 없이 상대 투수가 흔들리니 좋다고 배트를 붕붕 돌려댔다.
일부 전문가들, 팬들은 이걸 최대 단점으로 꼽기도 했다.
무조건 이겨야 할 경기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나오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4월까진 고생하겠네. 확실히 어려운 공은 아냐.’
하지만 영도는 그게 큰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부터 그런 스타일이기도 했고, 팀 배팅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다.
팀 배팅이라는 게 사실 팀, 집단, 단체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아시아권 야구의 환상 중 하나였다.
가끔 예외는 당연히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개개인이 최선의 결과를 내면 그게 모여서 팀 배팅이 되는 거지, 억지로 밀어치거나 억지로 욕심을 죽인다고 해서 팀 배팅이 되는 게 아니었다.
[유영도 선수까지 잡아내면 니키 존스도 상황을 좀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손성호와 한영훈에 이어 유영도까지 잡는다? 제츠의 간판타자들을 삼자범퇴로 잡아내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투수라는 포지션이 워낙 민감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로도 컨디션이 확확 달라질 수 있거든요? 특히 유영도 선수는 전 타석에 홈런을 기록한 선수 아니겠습니까?]
‘오늘 패스트볼 다음으로는 커브가 좋던데... 커브 한 번 노려볼까.’
오늘 니키 존스의 상태를 봤을 때, 그리고 그동안의 스타일을 봤을 때 패스트볼은 노리지 않는 게 좋았다.
전 타석에서 홈런을 허용한 공이 포심이었고, 존스는 한 번 공략당한 공을 같은 타자에게 던지는 걸 꺼리는 투수였기 때문.
와이번스 벤치도 이를 안다면 존스에게 포심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괜찮던 포심을 앞세워 타순 한 바퀴를 버텼지만, 포심이 아주 대단하지도 않았다.
패턴을 바꿀 때가 되었단 이야기였다.
‘초구 커브로 허를 찌르는 건...’
패턴을 바꾸는 건 예상했지만, 초구부터 커브를 던질 줄은 몰랐다.
모든 브레이킹볼이 그렇긴 하지만, 커브를 비롯한 오프스피드 피치는 정말 장인급으로 잘 던지는 몇몇 투수들을 제외하면 패스트볼의 위력에 크게 기대는 구종이기 때문.
‘포심부터 잘 던지고 해라!!’
공이 손에서 빠지는 순간 위로 뜨는 유일한 구종.
클래식이자 명품이지만, 타자에게 읽힌 순간 배팅볼이 되는 구종.
영도는 바로 그 커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구부터!! 아...]
[갔네요. 네, 까마득하게 갔어요.]
ㄴ 와... 영도 형...
ㄴ 때렸다 하면 부산까지 날아가네...
ㄴ 저게 진짜 같은 인간이라고? 인간의 피지컬이 아닌 것 같은데?
ㄴ 그냥 종족이 다른 듯
ㄴ 우리가 데려와서 진짜 천만다행... 경쟁자 많았다던데...
< 원맨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