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슈퍼스타의 뒷모습 > (24/200)

< 슈퍼스타의 뒷모습 >

“준비는 잘 돼가? 정보도 별로 없는 투수잖아.”

“정보가 없진 않지. 내가 상대해 본 적이 없을 뿐이지.”

기다리고 기다려온 2040시즌 개막전 D-1.

영도는 최근 며칠간 거의 외우다시피 한 상대 선발의 영상을 마지막으로 분석하는 중이었다.

외웠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하드한 영화 매니아들처럼 장면은 물론, 초 단위로 시간까지 외워버렸다.

개막전이라 특별히 준비하는 게 아니라 항상 모든 준비를 이 정도 수준으로 해왔다.

영도를 아는 모두가 해왔던 말처럼 영도는 준비된 스타였다.

모두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한두 개의 약점이 지나치게 치명적이라 가려져 있었을 뿐.

실제로 완전히 약점을 지우지 못하고 구멍의 크기를 조금 줄인 것만으로 스타의 편린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더 이상은 차마 숨길 수 없다는 듯이.

“그래도 미국 생활이 영 엉망은 아니었는지 웬만하면 여기 와 있는 투수들 마이너에서든 빅리그에서든 다 한 번쯤은 만나봤는데, 이 사람은 처음이네.”

“형이 마이너 생활 뭐 얼마나 했다고... 그리고 아예 안 만나 본 투수가 상대하기 더 편할 수도 있지. 형도 그때랑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데...”

“하긴, 그것도 그렇지.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는 건 최소한 빅리그 직전까진 갔다는 건데, 그 정도 재능이면...”

“근데 또 형 빼면 대부분 전성기 나이 지나고 온 사람들이라 오히려 기량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 어쩌라는 거냐? 하나만 좀 할래, 헷갈리니까?”

“적당히 하라는 거지. 형은 적당히 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KBO에서도 그러는데, 나중에 빅리그 돌아가면 어떻게 하려고? 경기 준비하다가 여름 되면 쓰러지겠어.”

서울 제츠의 개막전 상대는 창원 와이번스였다.

3강 5중 2약의 리그 판도에서 2약에 가까운 5중을 형성하고 있는, 압도적이진 않아도 짜임새가 괜찮은 타선에 비해 아주 빈약한 마운드가 약점인 팀.

야수인 영도가 KBO에서의 진정한 첫 발걸음을 내딛기엔 더없이 완벽한 팀이었다.

그리고 승도는 그런 팀을 상대하면서까지 자신을 갈아 넣는 영도가 조금 불안했다.

야구에 대한 재능은 형과 비교도 되지 않지만, 야구를 못해도 알았다.

무엇이든 너무 여유 없이 열심히 하면 탈이 난다는 것을.

물론, 훈련을 열심히 하는 건 당연히 훌륭한 행동이었다.

훈련에 소홀하고도 타고난 재능과 넘치는 자신감으로 정상을 밟는 선수들은 많았고, 그중에서 일부는 아예 급이 달라서 커리어 내내 훈련도, 자기관리도 대충하면서 롱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비율을 놓고 보면 재능있는 선수가 성실까지 해야 정상의 자리에서 롱런이 가능했다.

문제는 영도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는 것.

정상급의 선수들은 아무리 성실하고 야구만 생각하며 살아도 기본적으로 자신감은 넘쳤다.

더 잘하고 싶다는 본인의 욕심이 있을 뿐, 본인이 최고의 선수라는 자신감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영도는 그게 아니기에, 미친 듯이 훈련하는 가장 큰 이유가 본인에 대한 불안감이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노력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만, 분명 본인의 가능성을, 남은 재능을, 선수 수명을 갉아먹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글쎄다.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냐. 시즌 치르면서 네 예상대로 성적이 잘 나오면 나도 여유가 생기겠지.”

“하여튼 제발 성적 좀 잘 나왔으면 좋겠다. 실력은 차고도 넘치는데 그렇게 스스로 혹사하면 나올 실력도 안 나오겠어. 형, 형은 형 생각보다 대단한 선수라고. 나 형 동생이기 전에 에이전트야. 날 믿어.”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기억은 할게. 그리고 너 에이전트 아니다. 에이전트 지망생이지. 어디서 사기를...”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자신감은 자만과 다르니 자신감의 영역에서 머무른다면 아무리 넘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감은 말 그대로 자신에 대한 확신.

승도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끊임없이 영도의 기를 살려주는 것뿐이었고, 결국 영도 자신이 변해야 했다.

승도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에이전트, 아니, 에이전트 지망생이기 이전에 영도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형은 영웅이었다.

같은 길을 걷던 시절, 자신과 다르게 야구계의 모든 관심을 한몸에 끌던, 지금과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던 형은 정말 멋있었으니까.

그 시절의 형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매일 도시락을 챙겨주고, 집안일과 잡무를 포함한 야구 외의 모든 업무를 대리하고, 끊임없이 입을 털어 형의 위대함을 열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래, 그래. 그건 됐고, 하나만 기억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그리고 우리 부모님한테 형은 그 무시무시하던 마이크 트라웃보다 대단하니까.”

“하하하, 어휴, 이 새끼야. 거기까지 가면 부담스러워.”

“흘려듣지 말고. 어쨌든 이제 좀 가서 자라. 내일이 개막전인데 언제까지 준비만 하려고? 지금 그거 안 봐도 컨디션만 좋으면 니키 존스 따위는 형한테 쨉도 안 되지.”

“진짜 간지러워서 안 되겠다. 두드러기 안 나려면 빨리 자야지. 어우, 너 에이전트한다고 나대더니 주둥이만 살았어. 괜히 시켜줬나?”

“형이 시켜줬나, 내가 공부해서 된 거지. 형 덕분에 면접까진 쉽게 갔지만, 면접 본다고 다 합격하나...”

영도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원래도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던 동생이지만, 에이전시에 입사한 이후로는 승률 10%도 넘기기 힘들었다.

주 업무는 영도의 매니저였지만, 어쨌든 에이전트 지망이기에 종종 선임 에이전트들을 따라다니며 여러 업무는 물론, 협상 장소까지 경험했으니...

당장 KBO 우승팀이 메이저리그에 가도 승률 30% 정도는 기록할 수 있을 거라 평가받는데 승률 10%라니...

그냥 붙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시작이네... 에라, 모르겠다. 저 자식이 맞았는지 확인하려면 컨디션 관리나 잘해야지. 저 정도까지 믿어주는데 컨디션 관리 못 해서 삽질하면 그게 뭔 쪽이야. 그래도 형이고 프로인데...’

아무래도 이젠 진짜 자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확신이 부족하기도 했고, 중요한 시즌의 개막전, 남들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기다려온 KBO에서의 공식 경기를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어서 계속 붙잡고 있었지만...

‘그래. 아무리 내가 나에 대해 확신이 없다고 해도... 이쯤되면 인정해야지. 받아들여야지.’

내일 선발, 니키 존스. 

비시즌 동안 KBO 투수들을 전부 분석했을 때부터 느꼈는데... 

솔직히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지난 시즌 영상도, 전성기 영상도.

***

“영도야. 드디어 시작이다...”

“예. 그런데 왜 갑자기 무게를 잡는 겁니까?”

드디어 찾아온 정규시즌 개막전.

서울 제츠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 36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리그 정상급 타자 자리를 지키는 베테랑.

경기 전 워밍업을 마친 손성호는 덕아웃에 서서 멍하니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활발한, 팀 내 최고참이라고 하면 못 믿을 만큼 발랄한, 어떻게 보면 주책인 모습과는 달랐다.

그게 어색해 던진 영도의 말에도 살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뭡니까?”

“그냥 뭐... 별거 아닌데, 한 1, 2년 전부터 개막전 전엔 원래 이래. 내가 언제까지 뛸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 개막전은 아닐까... 하는?”

36세의 베테랑을 넘어선 노장.

2년 전인 34세 시즌 중반, 전치 12주의 심각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이후 손성호는 매 시즌 개막전마다 묘한 감상에 젖었다.

9세에 야구를 시작해 어느새 36세.

인생의 3/4를 지배한 야구, 그 야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데뷔 첫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해 벌써 17번째 개막전인데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까...

“그냥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해.”

“늙은이의 주책이라...”

“그래. 아무래도 개막전이라는 게, 시작이라는 게 항상 설레면서도 불안한 거 아니겠냐.”

“왜요. 뭐가 불안합니까?”

손성호는 1군에서 15년 넘게 군림한, 그중 10년 넘게 KBO 정상급으로 군림한 선수였다.

물론, 단 한 번도 최고였던 적은 없지만, 전성기 시절 9할이 넘는 OPS에 20-20도 기록해봤고, 타격왕 2회, 도루왕 1회에 심지어 중견수를 보던 시절엔 전체 WAR 순위 5위 안에 세 번이나 이름을 올리며 꾸준히 정상을 지켰다.

28세에 첫 FA, 33세에 두 번째 FA, 그리고 이번 시즌을 마치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FA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거의 확정적이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명예는 물론, 실리도 챙긴, 모든 야구선수의 워너비였다.

‘뭐가 불안하고 심란한 걸까. 은퇴가 다가와서? 아니면 단순히 그냥 새로운 시작이라서?’

일단 하나 확실히 해두자면 어떤 위치에 있든 저마다의 불안감이나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안다.

다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

회귀 전에는 그와 같은 선수들이 부러웠지만, 차마 꿈도 꿔보지 못했다.

회귀 후에는 그보다 대단한 선수가 되는 게 목표였지만, KBO가 아닌 빅리그를 꿈꿨기에 리그 내에서 그와 같은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성공한 선수, 리그의 정상, 나아가 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수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아마 아직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나처럼 지난 커리어에 비해 남은 커리어가 훨씬 적은 늙다리들이나 이해할 감정이지. 아니, 그중에서도 이런 감정을 이해할 만한 사람은 몇 없겠다.”

‘음...’

“아, 넌 아직 다른 사람의 넋두리, 그것도 나처럼 누가 봐도 성공한 선수의 넋두리에 관심을 둘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지? 그냥 진짜 별거 아냐. 난 정말 우승이 너무 하고 싶다. 그런데 올해, 내년이 아니면 내게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서 불안하고 마음이 복잡해.”

손성호는 서울 제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리고 제츠의 마지막 우승은 무려 23년 전이었고.

즉, 손성호는 그렇게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음에도 우승 반지 하나 손가락에 끼우지 못했다.

‘우승이라... 그거 하나 때문에 천문학적인 돈, 팀 내 입지,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명예 같은 거 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 주전자라도 나르겠다며 강팀에 합류하는 베테랑들도 많았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그 마음까진 이해할 수 없었다.

영도에게 팀의 우승 같은 건 먼 나라 이야기,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장담컨대 아마 프로선수 중 이쪽이 다수파일 것이었다.

‘다들 인터뷰마다 목표는 팀의 우승이다, 개인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개소리지. 프로는 곧 직업이고, 팀의 우승 프리미엄이 아무리 커도 일회성이니까. 개인 성적은 당장 연봉도 오르고, 무엇보다 FA 때 크게 평가받지만.’

프로가 개인 성적을 우선하는 건 절대 잘못된 게 아니었다.

특히나 야구에선 더더욱 그랬다.

팀배팅? 기록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헌도? 다 개소리다.

적어도 영도의 생각은 그랬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고, 모든 부분을 수치화하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매달렸다.

여전히 누군가는 홈런을 치고, 안타를 칠 때, 누군가는 번트를 시도하고 도루를 시도하고 대수비, 대주자 롤에 집중하지만...

그건 팀을 위한 행동이기 전에 개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모두가 마이크 트라웃은 될 수 없고, 클레이튼 커쇼 역시 될 수 없으니까.

“뭐, 긴말은 필요 없을 거고, 길게 말해도 당장 네가 이해하긴 쉽지 않겠지. 그냥 넌 준비한 대로만 해. 네가 목표한 대로 엄청난 성적을 올려주면 내 목표인 우승도 가까워질 테니까.”

손성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도는 애초에 팀의 간판타자이자 타선의 핵심 역할을 맡아줘야 할 선수.

그런 선수는 팀을 위해 희생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

최대한 욕심을 내주고, 그 욕심을 실현해야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였지.

“아마 넌 1년만 뛰고 메이저리그로 복귀하는 게 목적이겠지. 난 그럼 이번 시즌, 딱 1년의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아야 하고... 그러니까 난 절대 네 발목 안 잡는다. 다른 애들도 어떻게든 챙겨서 따라갈 테니까 제발 혼자라도 멀찌감치 달려줘라. 그냥 그만큼만 해줘.”

그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은퇴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노장의 각오는 뜨거웠다.

언제나 냉정하려 하는 영도마저 약간은 미지근해질 정도로.

“종인아. 넌 팀의 우승이랑 네 15승, WAR 5.0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뭐 고를 거냐?”

“예? 음... 아무래도 후자겠죠. 일단 선발진에 제 자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어깨를 두드려준 손성호가 사라진 뒤, 영도는 뒤에 있던 류종인에게 물었다.

역시... 자신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부탁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네. 나는 그냥 내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손성호는 그저 개막을 앞두고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 싶었던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으니까.

야구 좀 잘해달라는 말을 프로야구 선수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은퇴 직전의 노장, 훌륭한 선수, 나름대로 좋은 선배가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어차피 따로 해야 할 일이 없는 거라면, 그냥 내 할 일만 열심히 해도 되는 거라면...

굳이 들어주지 못할 부탁도 아니었다.

아니, 개인 성적도 잘 나오고 팀에 우승까지 안겨줄 수 있다면 이쪽에도 무조건 좋은 일이었지.

가는 길이 같다면 목표와 이유가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굳이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낭비하기 싫을 뿐이지, 인성이 파탄 났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대선배가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고 무시할 만큼 무정하지도 않았고.

< 슈퍼스타의 뒷모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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