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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예감 > (23/200)

< 좋은 예감 >

“형. 매일 매일 그렇게 펑고만 수백 개씩 받으면 안 지쳐요? 아직 시즌 시작도 안 했는데?”

“아직 젊을 때 최대한 짜내는 거지.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으니까.”

시범경기가 진행될수록 영도를 향한 관심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2차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와 달리 시범경기는 정규시즌 초반으로 어느 정도 흐름이 이어지기 때문에 선수들도 어느 정도 진지하게 임했다.

물론, 정규시즌이 아닌 만큼 유망주들, 벤치 뎁스용 선수들을 시험하고 주전급 선수들의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게 메인이었지만, 같은 조건에서 나름 진지한 승부가 펼쳐지는 시기였다.

“여기서 더요? 아니,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만, 다른 선배님들은 시즌 중엔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리하는 건 좋지 않지.”

그런 조건에서 하루 2, 3타석만 소화하면서도 영도는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몇 경기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타율이나 OPS 같은 것들은 의미가 없지만, 영도의 최대 장점은 장타력.

첫 경기에서 보여준 몬스터 홈런을 시작으로 연이어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들을 때려내며 순식간에 리그 전체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 영도가 하루 1,000개의 펑고를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으니 후배 입장에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몸 관리만 철저히 해주면 분명 성공적인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니까.

“그러니까요. 그런데 형은 대놓고 무리하잖아요. 안 그래도 이번 비시즌에 훈련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면서...”

“내가 유일하게 타고난 게 이 체력이랑 정신력, 두 개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만든 내 루틴이니까 따라 할 생각은 하지 말고.”

“아니... 따라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요. 전 풀타임 선발로 뛰는 것도 아직 어색해서.”

“메이저리그에서 옆집 원정 가는 거리가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니까. 이동거리 영향이 그렇게 크다던데, 그것도 영향이 있겠지.”

류종인과 함께 뛰어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같은 고등학교 2년 후배라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긴 했다.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거절했음에도 학교 선배인 손성호와 김원상이 어떻게든 팀원들과 가까워질 기회들을 마련해주었기 때문.

그렇게 지켜본 류종인은... KBO에서 충분히 통할 만한 재능을 가졌고, 아직 그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선수였다.

강한 심장과 좋게 말해 낙천적이고 나쁘게 말해 자기 세계가 확실한 선수라 선발투수로서 성격도 적합했고.

지금도 4선발로는 준수하다고 평가받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은 선수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낙천적인 것, 그리고... 체력을 붙여야 한다는 핑계로 자기자신까지 속이면서 불려놓은 체중도 조금은 줄여야 할 것으로 보였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쟤도 프로인데.’

그렇다고 해서 조언을 해준다거나 충고를 해준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한테 조언할 만큼 대단한 커리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선수 인생에 영향을 줄 생각도 없었다.

나 하나 신경 쓰기도 힘든데, 남이야 뭐...

“형도 대단하시네요. 근데 체력이랑 정신력 말고 파워가 형이 가장 타고난 능력 아니었어요?”

“파워... 그래, 그것도 뭐 내 재능이긴 하지.”

이제는 그냥 회귀하면서 성장한 것들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정할 이유도 없고, 설명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류종인의 질문에 대충 대답해주면서도 영도는 계속 시간을 체크했다.

펑고 1,000개가 절대 만만한 양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훈련 루틴 중 일부분일 뿐이었다.

물론, 수비는 가장 큰 단점이라 이렇게까지 하는 거고, 다른 훈련들은 어디까지나 루틴을 맞추는 데 의미를 두지만, 어쨌든 훈련은 훈련.

“자, 그럼 난 이만 간다. 훈련이 남아서.”

“아... 와... 별로 쉬지도 않으시네요. 시즌 중에 그렇게 훈련하고도 끝날 때까지 체력에 문제가 없다니... 부럽다.”

“타고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기본인 체중부터 잡아보는 게 좋을 거다.”

“제 지금 체중이 베스트가 아닌가요?”

“그건 네가 알겠지. 계속 몸을 다르게 만들면서 비교해봤어? 그렇게 정한 체중 아니면 네 베스트 아니다.”

자꾸 옆에 들러붙어 부럽다고 하니 결국 영도도 한 마디 꺼낼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2군에서 홀로 썩었던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재능에 어울리지 않는 현 상황 때문에 고민하는 선수들을 보면 뭔가 마음이 짠했다.

“내가 부럽다고 말할 거면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됐을 때 말해. 재능으로 결정되는 영역까지 와보지도 못했으면서 부럽다고만 말하지 말고.”

프로의 기본은 몸 관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체중 관리였다.

근육을 만들고, 거기에 지방을 덮고, 근질도 신경 쓰는 등의 관리는 프로 수준으로 하려면 정말 비선수들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괴롭고 힘들어지지만, 체중 관리는 그게 아니니까.

그래서 류종인이 짠해 말을 꺼냈다가 또 화가 났다.

자부하건대 전생의 자신은 정말 노력의 끝을 밟아봤고, 재능의 영역에서 좌절해봤으니까.

‘뭐, 모두가 야구에 목숨 걸 순 없으니까. 내가 야구에 목숨은 안 걸어만, 잘하는 다른 선수 부러워할 순 있는 거고.’

승도는 항상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엄격하고 냉정하지 말라고, 날카롭게 가시 세우지 말고 친절하게 못 하면 최소한 1분에 한 번 엷게 미소라도 지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댔다.

영도의 모든 초점이 야구에 맞춰져 있고, 신경만 쓰면 충분히 남들 이상으로 잘해낼 수 있음에도 무뚝뚝하게, 억지로 꾸미는 것도 귀찮아 적당히 솔직하게 대응하다 보니...

‘동생 주제에... 뭐, 매니저라 어쩔 수 없나.’

역시 난 어쩔 수 없어, 하며 쓴웃음을 짓던 영도는 이내 걸음을 서둘렀다.

무시할 수는 없어서 상대해주다가 일정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발걸음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영도 선배님!”

“아... 그래. 네가 경준이었나?”

“예! 지난번에 주신 용돈 덕분에 이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 제대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남들에게 관심 없고, 나 하나 먹고살기도 힘들다, 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영도지만, 위에도 말했듯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선수들한테 약했다.

특히 하위 라운드에서 지명되어 프로에 왔지만, 계약금도, 연봉도 형편없이 적고 집안 사정마저 넉넉하지 않아 최소한의 몸 관리도 어려운 선수들에겐 턱없이 약했다.

현대 스포츠는 첨단 과학이고, 첨단 과학은 돈이 드니까.

본인이야 돈 한 푼 안 모으고 전부 몸 관리에 쏟아부었다지만, 안 그래도 미래가 불확실한 데다가 수명도 짧은 야구선수, 그것도 2군 야구선수가 그렇게 사는 건 말도 안 되게 미련한 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나가다 그런 선수가 보이면 바로 지갑을 열게 되었다.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훈련에 쓸 돈 정도는 차고 넘치는 데다가 이외에는 딱히 지출도 없었기에 용돈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애초에 돈을 쓰는 곳이 거의 없기도 했고.

“어, 그래. 잘 먹었다면 그걸로 됐다. 힘들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몸 관리, 특히 먹는 건 철저히 해. 그게 프로의 기본이니까.”

“예. 안 그래도 선배님 하시는 거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나처럼은 하지 말고. 각자 몸이 다 다른데 누굴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래서 지금 트레이너랑 계속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입니다. 다행히 나름 괜찮은 트레이너랑 안면이 있어서...”

“운이 좋네. 힘내라. 성호 선배나 원상 선배도 너한테 기대 많이 하더라.”

“진짜 올해는 꼭 1군에 갈 겁니다. 성호 선배님이랑 영훈 선배님도 올해는 지명타자랑 1루수로 더 많이 나오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 그래. 응원한다.”

아무리 바빠도 2군 선수들, 그중에서도 딱히 기대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인사하면 무조건 걸음을 멈추고 용돈을 건넸다.

그러다 보니 1군에서는 살짝 겉돌고, 일부 선수들에겐 건방지다, 혼자 잘났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2군 선수들에겐 굉장히 좋은 선배로 통했다.

“난 이만 운동하러. 너도 열심히 해. 코치님들 눈에 들어야지.”

“하하... 알겠습니다. 선배님도 파이팅입니다!”

좋은 선배로 생각해주든 말든 그건 상관없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길 바랄 뿐.

선수생활에 영향은 주고 싶지 않고, 그냥 용돈이나 주는 정도지만, 어쨌든 옛날의 나처럼 오랫동안 헤매지 않기를...

‘그리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면 나처럼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기를.’

영도의 인생에는 야구가 전부였다.

하지만 모든 선수의 인생에 야구가 전부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하고 싶어도 인생 전부를 하나에 거는 건 절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게 안 된다면 과감하게 그만두는 게 현명한 거지.’

미련하게 하나만 붙잡고 있다가 처절하게 실패하고도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기적은 쉽게 오는 게 아니니까.

애초에 영도 역시 지금까지도 자고 일어나면 꿈에서 깨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직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생활하는 거고.

그래서 안쓰러운 2군 선수들에게 용돈 정도 주는 걸 빼면 대인관계까지 포기한 채 나아가는 중이었다.

영도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가끔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과거의 꿈을 이루고 메이저리그에서 자리 잡으면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짐작할 뿐.

***

‘확실히 같은 리그인데도 투수의 수준 차가 심해.’

시범경기를 치르는 동안 메이저리그와 KBO의 여러 차이를 느꼈지만,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투수들의 수준 차이였다.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에서 유망주를 수급하다 보니 30개 팀이 있어도 수준 차이가 아주 크진 않았다.

하지만 KBO는 지난 20여 년간 팀이 좀 늘었다고는 해도 고교 야구팀이 80여 개에 불과했다.

인구 1억이 넘는 일본도 12개 팀을 돌리는데, 5천만의 한국에서 10개 팀을 돌린다?

야수들의 수준 차도 크지만, 무엇보다 투수들의 수준 차이가 심각했다.

실제로 각 리그의 수준을 수치화했을 때, KBO의 야수 평균은 AA, 투수들의 평균은 A+에 가까운 A+와 AA 사이로 나왔다.

협회에서 갖은 애를 써서 억제하지 않았다면 타고투저 현상이 나타났을 확률이 높았다.

[아직 시범경기라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유영도 선수의 가장 대단한 점은 두들겨줘야 하는 상대는 꼭 두들겨준다는 겁니다. 각 팀의 1, 2선발급 투수나 불펜 에이스들을 상대로도 좋은 성적이 나오지만, 그 이하의 투수들에겐 정말 사신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이 모습이 정규시즌에도 이어진다면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3할 타율이나 4할 출루율, 50홈런도 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원래는 순조롭게 적응한다고 쳤을 때 2할 후반대 타율에 3할 후반 출루율, 30에서 40홈런 정도 해줄 것 같았거든요?]

[에이스급 투수들에게 약한 것도 아닌데, 그보다 조금 아래의 투수들부터는 거의 저승사자...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팀의 간판타자가 계산이 정확히 서는, 변수가 없는 타자다? 이건 진짜 감독들의 꿈이에요, 꿈.]

그때, 영도가 1군 수문장급 투수의 공을 때려냈다.

그냥 때려낸 정도가 아니라 바꾼 타격폼을 활용해 최대한 오래 지켜보다가 급이 다른 배트 스피드로 그냥 받쳐놓고, 작정하고 때려버렸다.

그리고 타구는 당연히 새까맣게 날아가 관중석 최상단에 꽂혔다.

‘KBO...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데?’

영도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있어 굉장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KBO 진출 이후에도 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그 길고 길었던 고난의 시간들이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니구나.’

마이너리그를 파괴해도, 메이저리그 풀타임 주전으로 자리 잡아도,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85개의 홈런을 때렸어도.

여전히 영도는 본인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따라서 자신감이 부족했고, 따라서 항상 여유가 없었다.

마이너리그 시절을 제외하면 소속 리그에서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아본 적도 없었고.

‘승도랑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KBO행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겠어.’

< 좋은 예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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