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레발의 계절 >
순간, 고척돔 전체에 태-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다들 지금의 소리가 자신이 상상하는 그 소리가 맞는 건지,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야... 지금 내가 뭘 들은 거냐?”
“몰라? 갑자기 공이 하늘로 치솟더니... 저 소리가 나네? 저기 뭐가 있더라...?”
“고척돔을 그렇게 자주 왔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인데?”
“당연하지. 이거 고척돔 개장 이후 최초 아닌가? 아니, 내가 상상하는 게 맞다면 말이야.”
관중들 역시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판정을 기다렸다.
심판들도 당황한 나머지 콜이 늦어졌고, 결국, 누구 한 명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4심이 한자리에 모였다.
- 이번 타구는 고척돔 천장에 표시된 홈런 라인을 넘어서 천장을 맞췄기 때문에 고척돔 로컬룰에 따라 홈런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돔구장은 천장이 있는 구장이기 때문에 타구가 구장 천장을 때리면서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천장을 때리고 파울 라인 밖으로, 내야로, 외야로 떨어지는 여러 가지 경우에 적용하는 돔구장마다의 룰이 있었는데, 이 라인을 넘어 천장을 때리면 홈런이다, 라는 룰도 있었다.
플라이볼 혁명 이후 말도 안 되는 각도의 홈런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타구 궤도을 추적하는 시스템도 활용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 돔구장에서 천장에 맞은 타구가 궤도 추적 시스템 이용 후 홈런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었고, 천장의 홈런존을 맞춘 사례도 없었다.
[최초! 최초의 돔구장 로컬룰에 의한 홈런이 나왔습니다! 고척돔은 물론, 대한민국의 4대 돔구장 전체에서 최초입니다!]
[와... 만약 돔구장에서 홈런존을 맞추는 선수가 나온다면 힘이 굉장히 좋은 외국인 선수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상대로 외국인 선수가 최초 기록을 달성하긴 했는데... 이게 참...]
[외국인 선수라고는 하지만, 유영도 선수는 핏줄 자체가 100% 한국인이지 않습니까? 정통 동양인 혈통도 절대 파워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음... 인정할 건 하고 넘어가야겠죠. 영도가 말도 안 되게 대단한 거지, 평균적으로 보면 분명 차이가 있긴 있어요. 영도의 파워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거죠, 이건.]
캐스터가 이마를 짚었다.
흥분했다는 것도 알겠고, 사실, 본인도 흥분한 상태였다.
돔구장 최초의 천장 직격 홈런, 그것도 시범경기 첫 경기, 심지어 이번 시즌 최고의 기대주인 유영도가 기대 이상의 사고를 쳐준 상황.
이러라고 두 팀을 시범경기 개막전부터 붙여놓긴 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해설자가 흥분해서 또 선수 이름을 반말로 호칭하는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완벽했다.
[역시 유영도는 괴물이에요! 얘는 진짜 고등학교 시절부터 괴물이었거든요!? 근데 그땐 괴물 투수 유망주인 줄 알았다고요! 아마추어 시절에는 잘하는 친구들이 잘해서 투수가 타격도 다들 잘하지만, 얘처럼 이렇게...]
[확실히 유영도 선수!가 대단하긴 합니다. 대한민국에 돔구장이 생겨난 이후 수많은 외국인 타자들이 KBO 문을 두드렸고, 그중에서는 괴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장타자들도 많았지만,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입니다. 그걸 유영도 선수가 해냈습니다.]
[아... 그렇죠... 유영도 선수의 파워는 메이저리그 시절부터 알아줬죠.]
[이렇게 되니까 대단한 기록이긴 해도 좀 아쉽습니다. 만약 이 타구가 돔구장이 아니라 대구 달구 스타디움 같은 곳이었다면 지금까지도 날아가고 있었을 텐데요.]
중계진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울 타이탄스의 홈구장, 고척돔에서 펼쳐진 경기였지만, 어차피 타이탄스나 제츠나 서울을 연고로 하는 구단들.
특히 제츠의 경우 리그 내 최고 인기팀이자 전국구 팀이었기에 어느 구장에서든 관중 수에서 밀리지 않았다.
양 팀의 무시무시한 라이벌 의식까지 더해지며 홈팀 관중석인 1루 측 좌석에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원정팀 관중석인 3루 측 좌석에는 무시무시한 광기가 가득했다.
“미친... 괴물이냐?”
제츠의 안방마님이자 4번 타자, 타율과 출루율은 낮지만, 외국인 타자를 빼면 제츠에서 유일하게 20홈런을 때려주는 공갈포.
공갈포답게 정교함과 선구안은 떨어져도 파워 하나는 뛰어난 선수였는데, 그런 우희운도 놀랄 수밖에 없는 타구였다.
우희운 뿐 아니라 제츠, 타이탄스 할 것 없이 양 팀의 모든 선수들, 아니, 그냥 이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메라가 김진형 선수를 잡아주고 있습니다. 현재 KBO 최고의 3루수인 김진형 선수와 이번 시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3루수 유영도 선수, 그리고 각자 타이탄스와 제츠라는 최고 인기팀이자 강팀의 타선을 책임져야 할,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 이 두 선수도 스토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선수들입니다.]
[유영도 선수의 인생을 바꾼 그 대회에서 대표팀 동료로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들이기도 하죠. 당시에는 유영도 선수가 투수였고, 두 선수 모두 투타의 에이스급까진 아니었는데, 어느새 프로 무대에서도 모든 관심을 한몸에 받는 선수가 되었어요.]
[유영도 선수는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풀타임으로 3시즌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한국에선 이제 첫 시즌이지만, 분명 앞으로 많은 것을 보여줄 겁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 경기를 지켜보시는 여러분도 늦었다고 낙담하지 마시고 힘내세요. 유영도 선수를 보시면 용기가 생기실 겁니다.]
“이 미친!! 저길 맞춰, 저길? 대체 어떻게?”
“르몽드나 뉴컴 같은 놈들도 천장 근처도 못 갔는데 저길?”
“네가 정녕 우리랑 같은 한국인이라고?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다른 건 몰라도 파워만큼은 한국인과 외국인의 차이가 분명 있었다.
어쩌면 인구수, 아마추어 선수 풀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메이저리그는커녕 마이너리그, 독립리그에서 뛰는 홈런타자가 KBO의 홈런타자보다 강한 파워를 자랑한다는 씁쓸한 현실이었다.
그런 씁쓸한 현실에서 날고 기던 외국인 타자들이 꿈도 못 꾸던 돔구장 로컬룰 홈런을 때려냈으니...
가뜩이나 창단 후 57년 동안 수많은 국내 선수와 59명의 외국인 타자가 타선에서 활약했지만, 30홈런을 넘긴 타자는 고작 두 명에 불과한, 21년 전을 마지막으로 30홈런 타자가 멸종한 제츠에서 등장했으니...
팀 동료들이 이성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시 넌... 여기서 오래 있을 놈이 아냐.”
“엄밀히 따지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퍼가 꽤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에이, 나랑 넌 다르지. 나야 간다고 해도 아주 잘 풀려야 25인 로스터의 끝, 높은 확률로 40인 로스터쯤에서 선발, 불펜을 오가는 정도니까.”
“나라고 뭐 다른가. 당장 지난 시즌 끝나고 지명 할당으로 쫓겨나서 여기 온 건데.”
점퍼를 입고 다음 이닝을 대비하던 타일러 역시 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글쎄... 내가 볼 땐 네가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로 온 것 같은데. 비시즌 동안 준비를 많이 했다지? 그 준비 그대로 메이저리그에 갔으면 주전 자리 정도는 간단하지 않았겠어?”
“좋은 평가는 고마운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하긴 그래. 나답지 않게 말이 너무 많았지, 브로? 말은 많았는데, 고맙다고. 덕분에 첫 등판부터 마음이 좀 편해졌거든.”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지.”
“계속 그 정도만 해줘. 여기서 돈 버는 게 목적인 난 브로 덕에 돈을 벌고, 브로는 목표한 대로 메이저에 갈 수 있게.”
“그건 응원으로 들으면 되겠지.”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난 타자지만, 그 누구도 지금의 영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애초에 KBO를 지배하는 외국인 선수 중 영도보다 뛰어난 커리어를 쌓은 선수가 없고, 그나마 리그의 절대적 에이스인 조지 스넬이 비슷한 정도였다.
게다가 여전히 한창 성장할 수 있는 어린 나이.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철저히 경계하고 약점을 공략한 조지 스넬의 공을 걷어 올려 돔구장 천장 직격 홈런을 때려냈으니 다른 팀들의 경계심과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상관없지. 내가 이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투수들의 철저한 경계와 견제.
좋은 공이 들어오지 않아 흔들리고 조급해져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타자들도 많지만, 영도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기계처럼 할 일만 해나가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집중 견제 정도는 마이너리그 시절 신나게 당해봤고, 신나게 깨부순 경험도 있으니까.
‘이제 시작이야. 여기서 내 야구인생 3막을 멋지게 공연하고 다시 2막을 리메이크하면 돼.’
실패한 KBO 2군 선수가 1막, 회귀 후 메이저리그가 2막, 그리고 지금의 3막.
3막을 깔끔하게 끝내고 2막을 다시 쓰기 위해선 시간이 많이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지금의 영도를 흔들 수 없었다.
***
[오늘 고척돔에서 놀라운 기록이 세워졌습니다. 정윤성 위원님, 어떤 기록일까요?]
[대한민국 최초의 돔구장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고척돔이죠? 2018년에 개장한 대한민국 최초의 돔구장.]
[그렇습니다. 벌써 22년 전인데요, 이후 3개의 돔구장이 더 생겼고, 긴 시간이 지난 만큼 돔구장에서만 적용되는 규정들도 한 개 이상의 실제 사례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하나의 규정은 지금까지도 실제 사례가 나오지 않았죠.]
[돔구장 로컬룰에 의한 인정 홈런, 그거였죠? 매 시즌 시작 전에 올해는, 올해는 과연, 이번엔 나올까, 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와서 저도 기억해요.]
[그렇죠? 그 정도로 어렵고 말도 안 되는 기록입니다, 이게. 돔구장에서 천장을 때리는 홈런이 되려면 다른 구장에서는 장외 홈런, 그것도 새까맣게 날아가는 장외 홈런 정도의 비거리를, 그것도 이상적인 발사 각도보다도 훨씬 큰 각도로 쏘아올려야 하거든요? 한 구장에서 한 시즌에 장외 홈런이 한두 개 정도 나올까 말까인데, 평범한 장외 홈런도 아니고 새까만 장외 홈런을 때려야 한다는 겁니다.]
[고척돔은 굳이 따지자면 중립적인 구장이지만, 홈런 팩터만 보면 리그 9개 구장 중 5번째죠? 비거리가 아주 잘 나오는 구장은 아니에요.]
[그래서 KBO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들, 박우용 선수나 양한일 선수, 많은 지도자들까지도 돔구장 로컬룰 인정 홈런은 아주 힘이 좋은 외국인 선수는 되어야 가능할 거라고 말했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말은 절반 정도만 맞았습니다.]
“크으, 그렇지, 그렇지. 딱 반만 맞았지. 힘이 좋은 외국인 선수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서울 제츠의 20년 골수팬은 경기 종료 후 시원하게 맥주 한 캔을 따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야구 시즌이 반갑고 기뻐서이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록 시범경기라고는 하지만, 이번 시즌 첫 경기에서 제츠가 타이탄스를 꺾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시즌 제츠 성적의 마스터키를 쥔 영도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어마어마한 홈런을 때려냈다.
이번 시즌 제츠의 행보에 청신호가 켜졌으니 너무 기뻐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팬들... 또 얼마나 젤레발을 떨고 있나, 한 번 볼까?”
‘젤레발은 금물, 젤레발은 약속된 패배의 길.’
이런 말들이 나도는 건 그만큼 서울 제츠의 팬들이 설레발을 신나게 떨어댄다는 의미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팀을 응원하면서 설레발을 떨지 않으면 그건 제대로 된 팬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23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팀이 리그 최고의 인기팀이라면 당연히 설레발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시즌만 되면 이를 노린 기자들의 억지 설레발 기사까지 쏟아졌고.
- 유영도는 진짜 미쳤다!! 저 정도 힘이면 40홈런도 치는 거 아니냐?
- 오늘 2타수 2안타에 2장타임. 40홈런 정도가 아니라 4할도 때릴 듯. 메이저리그에서 2할 3푼 따리지만, KBO 3할 타자도 메이저가면 1할 타자 되는데, 못할 게 뭐 있음.
- 4할은 솔직히 개오버인데, 3할 3푼은 가능할 듯. 대충 빗맞아도 메이저리그에선 내야 플라이 될 게 여기선 안타될 텐데, 뭐.
- 고럼고럼. KBO 투수들이 힘으로 유영도를 찍어누른다고? 내야 플라이를 끌어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힘으로 못 잡으면? 맞아야지? 저 정도 힘이면 빗맞아도 다 외야로 나간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투수 같지도 않은 KBO 투수 조무사들 다 참교육 당하는 각이냐?
- 우리 공격에서 저런 괴물 같은 타구를 보다니... 이게 얼마만이야, 대체?
“으하하하하, 하여튼 이 인간들... 1절, 2절에 뇌절까지 누가 제일 빨리 가나 시합하면 무조건 이긴다니까?”
누가 제츠 팬들 아니랄까 봐 팬들도 팀처럼 엄청난 기분파들이었다.
안 그래도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팬들이 규모까지 리그 최대 규모였으니 가끔 들어오는 제츠 안티, 혹은 타 팀 팬덤의 댓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4할 40홈런? 우리 영도는 당연히 가능하지! 빠따 거꾸로 잡고 때려도 홈런이라고!!
“크하하하!! 제츠 팬은 어쩔 수 없어! 나도 제츠 팬이라고!!”
< 설레발의 계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