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시범경기 > (20/200)

< 시범경기 >

“요, 브로! 저 팀이 어떤 팀인 줄 알아? 어휴... 난 저런 팀에서는 진짜 절대 못 뛸 것 같다니까. 다 큰 프로선수들을 무슨 군인처럼 굴린다고?”

“타일러. 난 한국 출신이야. 너보다 잘 알면 잘 알았지, 모르진 않을 거다.”

지난 시즌 14승, FIP 3점대 초반, 229K. WAR 3.17을 기록한 서울 제츠의 에이스 타일러 로즈.

사실, 그는 메이저리그 시절 전형적인 AAAA급 선발투수로 떠돌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도 몸담은 경험이 있었다.

당시 영도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에이스가 자랑하는 특급 유망주였고, 타일러는 흔해빠진 AAAA급 선수였지만, 이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동료로 만났다.

“아하, 맞지, 맞지. 넌 여기서 20년 가까이 살았다고 했지? 여기 제츠의 골수팬이라고도 했고... 그럼 당연히 타이탄스에 대해 잘 알겠어.”

“가장 잘 아는 게 제츠, 다음이 타이탄스지. 최대의 적은 우리 팀만큼 잘 알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 떠나서 난 그냥 저 팀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팬들이 그러던데 딱 군대가 저렇다며?”

“군대뿐 아니라 이 나라의 조직들 중 많은 곳들이 저렇지. 부모님 세대는 저것도 세상 많이 좋아진 거라면서 뭐라고 하지만, 전 세대 따위 내가 알 바 아니고.”

이집트 벽화에도 ‘요즘 애들은 X가지가 없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고 하던가.

2040년에도 다를 바 없었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가 이기적이고 조직 생활을 모른다고 비난하지만, 젊은 세대가 보기에 기성세대의 조직문화는 너무나도 꼰대스럽고 경직되어 있었다.

“하여튼 내가 저 팀에 가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야? 저기서도 제안이 왔었다고.”

“그러냐.”

“조건도 딱히 나쁘진 않았는데, 에이전트한테 물어보니까 난 타이탄스랑 안 어울릴 거라고 하더라. 이야기 듣고 나서 고민도 안 하고 여기에 왔지. 예상대로 딱 내 스타일이더라고, 이 팀은. 아주 퍼펙트해.”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인다.”

제츠의 에이스는 외국인 주제에 제츠의 팀 컬러에 완벽히 융화되는 선수였다.

야구는 직업이고, 훈련은 필요한 만큼만 소화,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채 무슨 일인지 백인임에도 옛날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던 껄렁껄렁한 흑인 스테레오 타입을 보여주는 선수.

영도는 타이탄스가 아닌 제츠를 선택한 타일러를 100% 이해할 수 있었다.

AAAA 시절에도 느낀 건데, 타일러는 분명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재능의 크기만 따지면 회귀한 자신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타일러는 지금의 연봉과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서울에서의 생활에 100% 만족했다.

메이저리그 복귀보다 서울 제츠에서 오래 활약하는 걸 목표로 삼을 정도였다.

“어후, 지난 시즌 어린이날 시리즈? 하여튼 거기서 만났을 땐 무슨 군인들을 보는 줄 알았다니까? 5일 당일 경기에서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갔는데, 5회 끝나고 클리닝 타임에 둥그렇게 둘러서서 열중쉬어하고 혼나더라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평균 나이가 서른은 될 텐데!!”

“그래, 그래. 딱 올드스쿨한 한국 야구계 스타일이네. 한국의 중년, 노년들은 항상 올드스쿨하지.”

“미국의 올드스쿨도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그래도 명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신 이론들을 엄청나게 공부해 나이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근데 여기 명장들은 과거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은 느낌이야.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저기 타이탄스 감독만 봐도...”

올드스쿨하지 않으면 기득권층에게 눈총받으니까.

자기들은 공부하기 싫은데, 누군가 한 명이 뛰쳐나가서 최신 이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밥그릇이 위험해지거든.

그나저나...

“타일러. 미안한데, 경기 준비해야 해.”

“... 나이가 60이 넘었다고 들었... 오? 아, 그래, 맞아. 넌 그런 스타일이었지.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살 필요 없다고, 브로.”

“타일러.”

“그래, 그래. 알았어, 브로.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영도는 이미지 그대로 경기 전 루틴이 많고, 철저하게 몸을 푸는 스타일이었기에 사실 처음부터 타일러의 수다가 거슬렸다.

또, 타일러 역시 말이 많긴 하지만, 뒤끝은 없고 상대가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하면 군말 없이 물러나는 스타일이기에 바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하여튼 악의가 없다는 건 알겠지만...’

영도는 한참 선배인 손성호에게도 억지로 친해지려고는 하지 말아 달라고 대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루틴, 성적 등을 위해 매진하는 스타일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편해지는데, 타일러처럼 악의도, 뒤끝도, 눈치도 없는 사람들은 영도의 천적이었다.

“몸 풀 거면 같이 풀지.”

“그래.”

팀의 2선발, 에디 렉스가 딱 영도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오늘 선발인 타일러는 저기서 또 다른 선수를 붙잡고 수다 떠는 중인데, 오늘 절대 등판하지 않을 에디는 평소처럼 철저하게 몸을 풀었다.

성실하고, 융화보다 개인 성적을 중시하고, 아직 메이저리그 복귀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러나 성격이 좋고 겸손한.

흑인 버전의 영도라 해도 될 만큼 비슷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둘이 모이면...

“조지는 정말 좋은 투수다.”

“비디오로만 봐도 그래.”

“그래도 결국 AAAA급. 포심이랑 커브는 뛰어나지만, 포심은 아무리 뛰어나도 네 배트를 피하지 못하겠지. 체인지업, 특히 슬라이더는 지금의 네겐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러려나. 잘 모르겠네. 연습경기만 치렀으니... 실전에서도 내가 브레이킹볼을 때릴 수 있으려나.”

“허. 충분히. 여기 선발투수 중 탑클래스는 잘 쳐줘야 AAAA급에서 미니멈급이다. 넌 3년 연속 25인 로스터에서 버텼고.”

항상 야구 이야기, 운동 이야기뿐이었고, 그나마도 길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나마 야수의 도움이 필요한 에디가 평소보다 말을 좀 더 길게, 많이 하는 정도.

“그렇게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

“넌 너를 좀 더 믿을 필요가 있어.”

“하하, 그거 요즘 참 많이 듣는 말이네.”

“그렇다면 이유가 있겠지.”

대화는 거기서 딱 끝났고, 둘 모두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의사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몸을 풀며 경기를 준비할 뿐...

놀기 좋아하고 유쾌하고 활발한 선수들로 가득한 제츠 선수단 사이에서 영도가 있는 이 주변은 더없이 조용했다.

***

[타이탄스의 김근수 감독은 언제나처럼 올드스쿨한 라인업을 들고 나왔습니다. 시범경기 첫 경기부터 이런 라인업을 고수하는 걸 보면 굳이 성적 잘 나오는데 변화를 시도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사실, 타이탄스는 워낙에 야수들 라인업이 압도적이니까요. 타순? 그딴 거 어떻게 짜든 좋은 타순이 됩니다. 1번은 무조건 빨라야 하니 출루율보다 발이 빠른 게 중요해, 라고 생각해서 넣은 타자가 중견수 박봉균인데...]

[2할 후반의 타율과 3할 후반의 출루율, 4할의 장타율을 노려볼 수 있는 타자입니다. 매 시즌 도루 30개 이상 기록하는 준족이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셋이 합쳐 100홈런은 거뜬할 거포 군단이 있으니 4할 출루율에 20홈런은 때려줄 이윤지를 1번으로 두고 2, 3, 4번을 클린업으로 하자. 어차피 이 넷을 빼도 두 자릿수 홈런을 가볍게 넘겨줄 타자가 세 명은 더 있으니까. 저도 알아요. 이게 더 현대적이긴 하죠. 그러나 1번에 빠르고 위협적인 주자를 두고 2, 3, 4, 5번에 넷이 합쳐 홈런 120개를 때려낼 타자들을 배치하는 것도 틀린 건 아니거든요?]

아시아 야구의 ‘4번 중심’, 북미 야구의 ‘3번 중심’, 그리고 2010년대 후반부터 대세로 떠오른 ‘강한 2번’.

그러나 ‘강한 2번’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타순의 짜임새가 완벽해 강타자들이 즐비한 팀이기에’ 성공한 것이라는 반론도 상당했다.

본래 의미인 ‘클린업을 한 칸 앞당겨 3-4-5가 아닌 2-3-4에 두는 것’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1-2는 테이블세터지만, 2번에 작전 수행 능력보다 타격 능력을 우선시하자’는 의미와 혼용되기도 하고.

덕분에 ‘강한 2번’ 못지않게 여전히 3번에 팀 내 최고 타자를 두는 감독도 많았고, 아예 4번에 최고 타자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올드스쿨 감독, 타이탄스의 김근수는 그러한 평가답게 ‘강한 2번’이 어울리는 완벽한 짜임새의 타선을 가지고도 전통적인 3-4-5 클린업을 고수하는 감독이었다.

[그래도 타선이 워낙 좋으니 1번부터 7번까지 쉬어갈 타순이 없습니다.]

[보통 타격에선 구멍이 되는 유격수와 포수까지 두 자릿수 홈런은 때려주는 선수들이니까요. 어후... 그렇게 따지면 8번까지 무섭네요.]

[9번 박준상 선수는 이 팀에서 유일하게 지난 시즌 OPS 7할을 넘기지 못한 타자지만... 나갔다 하면 도루를 기록하면서 출루율 3할의 9번 타자가 30개의 도루를 해냈죠.]

[역시... 외국인 선수 세 명 중 두 명만 기대만큼의 활약을 해주면 무조건 우승후보 1순위인 팀입니다. 외국인 선수의 지분이 매우 높은 KBO에서 이 정도로 여유 있는 팀은 타이탄스가 유일하죠.]

스타성 높은 선수들과 팀 컬러를 보유한 제츠와 압도적인 성적과 시원시원한 홈런 야구를 자랑하는 타이탄스.

그리고 서울이라는 압도적인 팬베이스의 연고지.

화룡점정으로 두 팀의 치열한 라이벌리까지.

이 두 팀의 맞대결을 중요한 시기마다 배치하는 협회의 의도는 뻔했지만, 그럼에도 두 팀은 이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가 원하고, 팬들이 원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자존심이 그러길 원하니까.

덕분에 이제 막 예열을 시작하는 시범경기 첫 경기임에도 두 팀은 자신들의 베스트 라인업을 거의 그대로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실력 하나는 진짜라니까...’

즉, 타이탄스의 타선도 어마어마하지만, 제츠의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 역시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의 에이스라는 뜻이었다.

타일러 로즈는 ‘타이탄스 킬러’답게 특유의 테일링 심한 패스트볼과 정교한 하이 패스트볼을 앞세워 어퍼스윙 위주의 타이탄스 타선을 봉쇄했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커브에 배트는 허공으로! 타일러 로즈, 박봉균과 최형두, 쉽지 않은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이거죠. 이러니까 제츠 팬들이 타일러 로즈에게 열광하는 거예요. 여권? 아마 로즈의 여권은 지금 로즈에게 없을걸요?]

“좋아, 타일러! 나이스 피칭!!”

내야 수비의 핵심, 조규영이 추임새를 넣으며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경기 시작부터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이는 에이스와 이로 인해 올라가는 팀 분위기.

분위기를 심하게 타는 제츠 같은 팀에겐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자, 제츠의 분위기를 살려주면 안 된다는 건 모든 사람이 다 알아요. 그리고 타이탄스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타이탄스의 슈퍼스타, 김진형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슈퍼스타라면 이럴 때 해줘야죠. 그리고 김진형은 이럴 때 해주는 선수예요.]

KBO 최고의 3루수를 넘어 최고의 타자로 꼽히는 김진형이 타석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기다린 야구 시즌, 시범경기 첫 경기부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영혼의 라이벌 서울 제츠.

그런 제츠의 분위기를 잠재워달라는 팀과 팬들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슈퍼스타.

‘KBO 최고의 3루수라...’

그리고 메이저리그 복귀라는 첫 번째 목표를 위해 영도가 넘어서야 할 첫 번째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 시범경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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