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상치 않은 바람 >
“감독님. 3회 선두타자가 유영도인데 어떻게 할까요? 원래 결정한 대로 3회까지 범규로 갈까요?”
드래곤스 이문재 감독의 고민이 깊어졌다.
연습경기에서 선발 후보들은 길면 5이닝, 짧아도 3이닝은 던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시범경기에서 다시 한 번 후보군들을 실험하긴 하지만, 어쨌든 시범경기는 중계도 되고 정규시즌 초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에 아예 실험만 생각할 순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8경기가 예상치 못한 1군 승격 후보들을 발견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런 상황에서 최소한 3이닝은 확인해야 하는 이범규를, 첫 대결에서 무조건 잡아야 하는 유영도에게 대형 홈런을 얻어맞은 이범규를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이문재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음이 올려.”
“... 예? 정음이요? 벌써요?”
이문재의 선택은 우완 언더핸드 투수이자 추격조를 담당하는 오정음이었다.
드래곤스가 경제적인 문제로 비교적 몸값이 싼 불펜투수에게 대부분의 투자를 집중한 팀이기에 추격조지, 다른 팀이었다면 필승조 역할도 가능했을 선수고, 33세의 베테랑이라 원래는 오늘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직 하나의 이유, 영도를 잡겠다는 이유 하나로 내린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저 자식 기를 살려주면 우리 시즌이 위험해. 포스트시즌에 가려면 3강 밑에 3강에 가까운 중위권에 속하는 제츠를 잡아야 하는데, 이번 시즌 제츠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유영도야. 쟤는 잡아야지.”
“... 알겠습니다. 어차피 정음이도 이번 캠프에서 두세 번은 등판해야 했으니 좀 일찍 등판하는 거라고 치면 되겠죠.”
오정음의 등판을 결정한 이유는 하나였다.
손가락 힘, 악력 등의 이유로 메이저리그에는 구속과 무브먼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투수들이 즐비해 무브먼트에 올인하는 사이드암, 언더핸드 투수가 적었는데, 오정음은 우완 언더핸드라는 것.
영도 역시 고교 1학년을 마치고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간 만큼 언더핸드 투수가 낯설 거라는 판단이었다.
‘언더핸드? 나야 감사하지...’
하지만 영도는 살아남기 위해 뭔 짓이든 하는 KBO 2군에서 7년간 야수로 활약한 유경험자였다.
2군에는 단 하나의 무기라도 갈고 닦아 원포인트, 패전조로라도 1군에 올라가려 안달이 난 투수들이 많았다.
그 하나의 무기로 투구 폼을 선택한 투수들도 당연히 많았고... 영도는 모든 투수가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였다면 1군에서도 정상급 타자로 활약할 수 있다고 평가받은 선수였다.
[아, 여기서 오정음 투수가 올라옵니다. 30대 중반을 향하던 지난 시즌부터 몸 상태를 늦게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던 선수인데, 이문재 감독이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유영도 선수도 이 타석 이후 한 타석 정도만 더 소화하고 빠질 확률이 높거든요? 기를 살려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여요. 굳이 오정음 선수를 올린 건 낯선 우완 언더핸드의 효과를 보겠다는 것일 테고요.]
물론,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에 강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기에 타격 폼과 투구 궤적이 우연히 딱 맞아떨어졌다, 라고 보는 게 정답에 가까울 것이었다.
타격 폼을 전면 수정한 지금은 궤적이 맞지 않을 테고.
하지만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던 영도가 자신감을 갖고 승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상황이라는 게 더욱 중요했다.
KBO 수준에서 영도 정도의 타자가 자신감과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채 타석에 들어선다면...
[예상을 깨고 초구부터 과감하게 공략! 다시 한 번 제대로 걸렸습니다! 좌익수, 좌익수가 따라가 보지만,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곳에 떨어지는 타구! 유영도 선수, KBO 소속 첫 실전부터 연타석 홈런을, 그것도 대형 홈런으로 기록합니다!]
[언더핸드의 장점을 활용해 과감한 승부를 시도한 것 같거든요? 그런데 유영도 선수는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었네요. 초구부터 벼락처럼 배트를 돌렸어요.]
[3회초 선두타자 3번 유영도]
투수 교체 : 이범규 -> 오정음
- 초구 타격 : 좌익수 뒤 홈런 (비거리 133m)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BO 투수들, 우리 메이저리거 형님한테 신나게 얻어맞는구나.
ㄴ 이범규는 그렇다 쳐도 오정음이... 언더핸드라 북미나 유럽 선수들한테 강해서 대표팀에도 심심찮게 뽑히는 투수인데 냅다 뚜드려 맞았네...
ㄴ 유영도는 그래도 한국에서 선수생활 오래 하지 않았냐? 사이드암, 언더핸드에 막 낯설고 그러진 않을 듯
ㄴ 고1 끝나고 간 것도 한국 선수생활이냐. 프로랑 고등학교는 레벨이 다른데... 그냥 메이저리그에서 쫓겨나도 풀타임으로 3년 정도 뛴 수준이면 KBO는 그냥 압살한다는 증거임
ㄴ 이문재 오열 중. 오정음은 나이도 있어서 캠프 때는 거의 등판 안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메이저리거라고 언더핸드 올렸다가 얻어터짐. 앜
ㄴ 정의구현포, 터져쓰요!!
ㄴ 역시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지, 암! 세상이 그래야지!
익숙한 언더핸드,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KBO 불펜과 MLB 풀타임 3년, 탑클래스 유망주 출신 타자의 수준 차, 그 와중에 예정에 없던 이른 시기의 등판으로 제대로 몸도 만들어지지 않은 30대 중반 베테랑 투수.
모든 것이 겹치면서 오정음의 초구는 121km의 구속도, 낙차도, 로케이션도 어정쩡한 커브가 되고 말았다.
타격 폼을 수정하고 투수들을 분석하는 등 비시즌에도 바삐 움직인 영도에겐 공이 너무나도 훤히 보였다.
게다가 조금만 높아도, 낙차가 조금만 부족해도 배팅볼이 되는 커브의 특성까지 겹치며... BOOM!!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냐? 저게 지금 얼마를 날아간 거야? 너 지금 몸 상태 70%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아무리 연습 경기라지만, 무슨 실전을 프리 배팅처럼 때리냐? 정음이 울겠다!”
다음은 1회 첫 타석의 반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술 훈련은 선택과 집중 때문에 편식했지만, 기본 훈련만큼은 미친 듯이 반복하길 잘했어.’
훈련이 힘든 이유, 성실한 선수도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이유는 훈련량과 기량 향상이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도는 그런 행운을 얻었고, 선택과 집중을 택한 기술훈련과 달리 무식하게 매진한 기본 훈련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일단, 체력이 괴물 수준이었고, 훈련으로 끌어올리기 힘든 동체시력마저 정상급이었다.
추측컨대 갑자기 좋아진 선구안은 공을 오래 지켜보는 타격 폼으로의 수정에 그동안 가려져있던 동체시력이 작용했을 확률이 높았다.
‘필연적으로 더러운 디셉션이 따라오는 언더핸드의 궤적이 이렇게 훤히 보이다니... 스윙 궤적이 맞아떨어졌던 회귀 전보다 상대하기 쉽다고 해도 될 정도야.’
KBO 진출 후 고작 한 달 반, 실전은 처음.
이 짧은 시간, 적은 기회로도 영도는 지난 9년 동안 눈치 채지 못했던 본인의 새로운 장점들을 여럿 깨달았다.
한 달 반에 이 정도면 한 시즌 꽉 채웠을 때는 얼마나 더 늘어날지...
그리고 그때의 자신은 어느 정도의 선수가 되어 있을지...
메이저리그에 복귀, 어쩌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타자가 되어있는 것 아닐까?
설레발이지만,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벌써부터 그게 기대되어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
[아무리 연습 경기라지만, 이번 시즌 첫 실전이라면 첫 실전이거든요? 첫 실전부터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면 이 여파가 정규시즌까지도 이어질 수 있어요. 여기서 베테랑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최지웅 선수가 하나 해줘야죠!]
[최지웅 선수, 하면 드래곤스의 정신, 자존심을 상징하는 선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 하나 해주는 선수입니다.]
서울 제츠는 확실히 분위기를 타는 팀이었다.
영도의 첫 홈런 이후 터질 듯 말 듯 방망이를 예열하던 제츠 타선은 두 번째 홈런 이후 완전히 대폭발, 4회까지 5점을 더 뽑아냈고, 영도도 한 번 더 타석에 들어서 2루타를 때려냈다.
스코어는 어느새 7-0.
3회까지 3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막아낸 김동구가 내려가고 이번 시즌 1차에 지명한 순수 신인, 193cm, 103kg의 당당한 체구에 최고 구속 152km를 자랑하는 윤한태가 마운드에 올랐다.
[윤한태 선수, 오늘 경기가 프로 선수들을 상대로 실전 투구에 나서는 사실상의 첫 경기입니다. 청백전 등을 통해 팀 선배들을 상대한 적은 있겠지만, 아무리 같은 연습 경기라도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완전히 다르죠. 처음이라는 건 항상 중요한데, 윤한태 선수에게는 이 첫 타석 결과가 아주 중요할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최지웅 선수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즌 OPS 0.787, 16개의 홈런을 기록한 베테랑 타자가 신인에게 한 수 가르쳐주러 나와 있습니다.]
[이런 거물을 한 번 잡아내면 그 자신감으로 훅훅 성장하는 게 신인이거든요? 선배들을 잡아먹는 무서운 신인은 언제나 나왔어요. 윤한태 선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서울 제츠도 선발은 외국인 투수 두 명을 잘 뽑았지만, 그 뒤가 애매하고 불펜은 필승조만 탄탄한, 투수진이 약하진 않지만, 강하지도 않은 팀이었다.
특히 국내 선발 자원 육성이 급한 상황이라 오랜만에 얻은 특급 유망주, 윤한태의 성장이 중요했다.
‘어이구... 여기서 봐도 긴장한 게 보이네. 하긴, 아무리 배짱 좋은 선수라도 프로 첫 실전 경기인데 안 떠는 게 이상하지. 심장이 다이아몬드로 된, 5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를 빼면.’
오랜만에 3루 자리를 차지한 영도는 프로 커리어 첫 등판의 부담감과 긴장감으로 떨고 있는 생짜 신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영도 역시 오랜만에 3루를 맡아 긴장했지만, 일단 3회까지는 깔끔하게 수비해내면서 시야가 넓어진 상태였다.
‘직접 격려해 줄 필요성은 못 느끼지만... 공이 여기로 오면 최선을 다해 잡아주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신인을 위해.’
윤한태는 재능이 충분한 선수였고, 어린 선수지만, 야구를 진지하게 대하는 성실함을 갖추고 있었다.
영도는 이런 선수들에게서 옛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성실하게 최선, 그 이상의 노력을 하지만, 빛을 보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었다.
최소 연봉을 겨우 받는 초짜 메이저리거 주제에 어쩌다 마이너리거들과 자리를 함께 할 일이 생기면 식사와 장비를 챙겨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3구, 낮은 볼을 받아칩니다! 3루 파울라인을 타고 페어지역에서... 유영도의 파인 플레이!! 몸을 날려 타구가 빠져나가는 걸 막아내고 1루!!! 아웃! 아웃입니다!]
[이야... 반응 속도도 빨랐고, 이어지는 송구도 레이저처럼 쭉 뻗었네요. 훌륭한 수비였어요.]
메이저리그 수준의 타구질과 스피드에선 평범 이하의 수비수였던 영도지만, 여기선 최소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한 번의 플레이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무리 형편없는 수비력을 가진 선수라 해도 몇 번쯤은 보여줄 수 있었고.
[연타석 대형 홈런에 이어 깔끔한 수비까지! 유영도가 오늘 경기를 지배합니다! 9년 간 쌓인 울분을 풀어내는 듯 드래곤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유영도!]
[처음부터 기대했던 장타력은 물론,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수비까지 보여주네요. 이번 시즌 진짜 사고 한 번 치겠는데요?]
“감사합니다!!”
“뭘... 수비수가 아웃 잡는 건 당연한 거지. 잘 던졌어. 그대로만 던져.”
일찌감치 귀국해 1차부터 캠프에 합류한 영도였지만, 팀 동료들과는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선수들을 소개해주겠다는 손성호의 제안도 마다했고, 제츠 특유의 함께 놀러 다니는 문화에도 거리를 두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모두 야구선수였다.
안 그래도 되는 위치의 선수임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고 누구보다 성실한, 그리고 그게 기량 상승으로 나타난 영도의 모습을 보면서 동료들도 점점 마음을 열었다.
“야! 영도가 말하는 거 들었지!? 수비수라면 아웃은 당연히 잡는 거야!!”
내야의 핵, 유격수 조규영이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파이팅을 불어넣었다.
공격에서 시작된 파이팅과 기세가 수비에도 이어졌다.
이 역시 영도로부터 시작된 분위기였다.
본인은 다른 사람, 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며 거절했지만, 어쩌다 보니 영도는 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심상치 않은 바람 > 끝
< 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