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단한 쇼케이스 >
“저 자식은 그냥 운 좋은 놈일 뿐이야! 메이저리그까지 갔으니 재능이 있긴 있나 본데, 메이저리그 성적 봤잖아! 저 정도 성적 찍었던 외국인은 그동안 몇 명이나 있었다고!!”
언론 앞에선 담담한 했지만, 이문재 감독은 현 상황에 확실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구단 감독이 되고 그 영악한 유중선의 측근이 된 만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어도 현재의 위치는 능력보단 정치력으로 따냈음을 본인조차 부정하지 못했다.
그런 이문재의 정치력이 지금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걸로 여기까지 올라온 만큼, 그는 경고 신호를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영도의 리턴과 팬들의 폭발적인 관심만 해도 부담스럽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는데, 여기에 성적마저 압도적으로 찍어버리면 그땐 정말 답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리를 내놓는 것은 물론 야구계에서 사실상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려고 쓴 노력과 시간, 재산이 대체 얼마인데...'
이제야 겨우 그 비용들을 회수하는 중인데, 이렇게 물러날 순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 자리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자리였다.
“다들 난다 긴다 하는 외국인 한 번씩은 다 잡아봤잖아? 너무 긴장하지 마. 별거 아니라니까? 안 그래도 팬들 관심도 몰리고 저 건방진 놈도 지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복수한다고 벼르고 있을 텐데, 첫 만남에서 흔들리면 시즌 내내 호구 잡힌다. 얼마나 KBO를, 한국 야구를 무시했으면 메이저리그에서 그따위 성적을 찍고 여길 와? 지가 무시하고 떠난 거면서!! 안 그래? 너희는 자존심도 안 상하냐? 그 정도 벨도 없어!?”
그런 만큼 더더욱 선수들을 채근했다.
영도의 활약을 막을 수만 있다면 팬들의 관심도 식어 그런 위험한 일 역시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첫 실전에서 상대로 만났다는 건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다.
이대로 잡아내고, KBO의 무서움이 뼈에 새겨져 헤매다가 중도 퇴출.
이문재가 바라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젠장... 제일 민감한 부위인 팔꿈치 부상이고, 대충 봐도 심상치 않아 보여서 부활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야수로 전향해서 메이저리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저 새끼 멘탈이랑 성실성이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저렇게 다른 사람처럼 바뀌다니...’
팔꿈치 부상은 어깨 부상과 함께 투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부상이었고, 특히 영도는 증상과 반응이 심각한 편이었다.
그래서 막 굴려도 어차피 부활하지 못하고 언론이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는 실패한 선수가 될 게 확실해 무시했는데, 그 선수가 이렇게 무섭게 돌아올 줄이야...
성실한 선수도 아니었고, 멘탈도 단단한 축에 속하지 않았는데, 그 어려운 상황에서 낯선 야수로 전향, 메이저리거까지 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영도의 사라진 18년을 알지 못하는 이문재는 앞으로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
‘이범규. 최고 구속 150km, 평균 구속 140km대 중반. 그 스터프로 프로 지명된 순간부터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어느새 스물여덟. 백만년 유망주...’
영도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스윙으로 몸을 푸는 동안 선발, 이범규의 특징을 되새겼다.
‘슬라이더는 괜찮지만, 포크볼, 체인지업 등 써드 피치 장착에 매 시즌 실패 중. 스터프만 좋을 뿐, 커맨드, 컨트롤, 무브먼트 전부 평범 이하.’
종합했을 때, 메이저리그를 기준으로 한다면 A+ 수준의 투수였다.
아, 점수가 A+가 아니라 리그가. 싱글A보다는 낫지만, AA보다는 못한, 상위 싱글A 정도에 어울리는 투수.
제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자리 잡지 못해 KBO에 왔다지만, 이래 보여도 2년 만에 마이너리그를 졸업한 재능이었다.
A+에서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타율 3할 초중반에 OPS 10할, AA에서도 타율 3할 근처에 OPS 9할 중반을 기록한 선수가 바로 영도였다.
‘오케이. 내가 아무리 브레이킹볼, 특히 종으로 떨어지는 볼에 약해도 이 정도 수준에 당하진 않지.’
자신 있게, 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으면서.
영도는 중요한 첫 타석을 맞아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타석에 들어섰다.
[자, 드디어 첫 타석입니다. 비록 시범 경기도 아닌 연습 경기지만, 이번 오프시즌 내내 모든 야구팬의 관심을 받았던 유영도 선수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범규 선수는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게 먼저라 100% 몸 상태를 끌어올렸을 테고, 유영도 선수는 60%? 70%? 그 정도일 거예요. 하지만 팬들의 기대, 제츠 구단의 기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범규 선수 정도는 상대해줘야 하거든요?]
마운드 위의 이범규 역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번 오프시즌 화제의 중심, 이번 시즌 최고의 스타 자리를 이미 예약한 듯한 인기,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시즌 30홈런 가까이 때려낸 장타자에 소속팀 감독과의 악연으로 인한 팬들의 관심까지.
가진 바 재능에 비해 심약한 마인드, 불안정한 멘탈이 성장을 방해한다고 평가받는 드래곤스의 이범규는 본격적인 승부 전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그런 표정으로 좋은 공 던질 수 있겠어?’
‘완벽한 상태의 투수를 두들기고 싶다.’
그런 만화에나 나올 듯한 낭만은 영도에겐 단 한 톨만큼도 없었다.
투수가 흔들려주면 신께 감사 인사라도 드릴 만큼 결과를 중요시하는 선수가 바로 유영도라는 타자였다.
[초구는 위로 높게 뜨는 볼이었습니다. 구속은 141km가 찍히면서 시기를 감안했을 때 아주 훌륭했습니다만, 스트라이크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영도 선수의 바뀐 타격 폼은 자세와 무게중심이 높은 편인데도 가슴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들어갔죠? 저런 공에 속는 선수는 없어요.]
이범규의 불안감은 표정에만 드러나지 않았다.
당장 초구부터 제구가 날리면서 아무 의미 없이 하나의 공을 버리고 말았다.
‘웬만하면 하나 멋있게 때리고 싶긴 하지만, 거기 집착할 생각은 없어. 이번 시즌에는 일단 볼넷을 최소화하는 게 목표라며. 스트라이크... 던질 거잖아?’
야구 팬들은 투수가 연속 안타를 맞는 것보다 지나치게 많은 볼넷을 내주는 걸 훨씬 싫어했다.
‘볼넷으로 내보낼 바에야 안타를 맞아라’는 정면 승부를 못하고 도망 다니는 투수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었고, 이범규는 벌써 8년 째 이 말을 들었다.
물론, 진짜로 마구잡이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다가 신나게 얻어맞으면 제발 볼 좀 던지라고 하겠지만...
원래 그게 팬이었다.
중요한 건 어쨌든 지금의 이범규는 볼넷을 피하고 싶어 할 확률이 높다는 것.
그리고 커맨드는 물론 컨트롤도 좋지 않은 이범규는 카운트가 몰릴 경우 공도 같이 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유영도 선수, 아주 침착합니다. 빠지는 공을 차분하게 골라내면서 침착하게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경기 전 지영규 타격코치가 그런 말을 했어요. 유영도 선수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타격 폼을 수정했고, 그 결과 끝까지 공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스트라이크만 골라 치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전에는 항상 풀스윙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변화구 대처가 안 됐는데, 공을 끝까지 지켜보기 시작하면서 의외로 굉장히 선구안이 뛰어나다는 게 밝혀졌다고도 했거든요?]
어느새 볼 카운트는 3-1.
사실, 볼이 된 공 중에서도 예전이라면 휘둘렀을 만한 공, 지금도 충분히 장타로 연결할 수 있는 공이 있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연습 경기고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이번 시즌을 앞두고 시도한 변화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브레이킹볼 약점 보완이 시급했던 영도는 일단 존 바깥으로 빠지는 공은 아예 치지 않고, 약점이자 장타를 때려내기 힘든 바깥쪽에 걸치는 공도 아슬아슬한 스트라이크 정도면 그냥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바뀐 타격 폼에 익숙해지고, 성적도 괜찮게 나오면 다시 변화를 주겠지만, 일단 지금은 하나씩 차근차근 해내기로 한 것.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선구안에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하나만, 하나만 제대로 들어와라.’
영도가 참고한 선수는 과거의 레전드, 조이 보토였다.
신체 능력도 좋지 않고, 의외로 컨택도 좋은 편은 아니었던 그는 구도자의 자세로 야구를 대하는 성실함과 수준 이상의 갭파워, 상상을 초월하는 선구안으로 레전드가 되었다.
본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공에만 배트를 내밀어 스윙 빈도는 항상 리그 최하위권이었고, 대신 그만큼 좋은 타구의 비율을 높여 비율스탯 3/4/5에 시즌 30홈런 가까이 때려내던 조이 보토.
선구안은 부족하지만, 신체 능력은 훨씬 뛰어난 영도이기에 그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타율에 훨씬 많은 홈런을 때려내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첫 연습 경기부터 조급해하지 않고 충실히 본인의 전략을 지키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3-1의 볼카운트에서 볼넷을 내주지 않으려 로케이션이 애매한 공을 던진 이범규.
선구안이 몰라보게 좋아진 영도는 그 공을 놓치지 않았다.
[벼락과도 같은 스윙! 맞는 순간 이미 수 초 뒤가 그려지는 그림 같은 타격입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유영도 선수의 타구! 제츠 유니폼을 입고 나선 첫 타석에서 대형 아치를 그려냅니다!]
[와... 저렇게 간결한 폼에서 저런 어마어마한 장타가 나오네요? 파워는 역대급이라고 다들 그러기에 어느 정도일까 했는데 진짜 역대급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에요.]
[배트 도는 걸 잘 보십시오. 정말 어마어마한 스피드입니다. 이범규 선수의 구속도 빠른 편이라 배트 출발이 늦었다고 봤는데, 홈플레이트 살짝 앞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때려냈습니다.]
[폼은 간결한데, 허리와 엉덩이의 회전과 그 힘을 배트로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완벽해요. 교과서에 올려도 될 것 같네요.]
A+에서 10할 이상의 OPS, 6할 중반의 장타율을 기록한 영도이기에 이범규의 공은 대충 때려도 충분히 장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르고 골라 마음먹고 돌린 한 번의 스윙.
맞는 순간 이미 홈런임을 알있고,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넘어간, 어마어마한 속도와 비거리를 자랑하는 대형 홈런으로 이어졌다.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냐? 저게 지금 얼마를 날아간 거야? 너 지금 몸 상태 70%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아무리 연습 경기라지만, 무슨 실전을 프리 배팅처럼 때리냐? 범규 울겠다!”
프리 배팅에서 영도의 위력을 충분히 확인한 제츠 동료들 역시 실전에서마저 받쳐놓고 때려버린 홈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이거지. 우리가 원했던,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선수, 끌어올릴 수 있는 홈런.”
“그렇습니다. 분위기를 타는 게 단점이라고 하는데, 홈런으로 계속 분위기를 띄워놓으면 그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위기를 심하게 타는 제츠이기에 영도의 역할은 단순 공격력, 그 이상.
이번 시즌 제츠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첫 시합부터 기대에 부응하는 영도의 모습에 제츠 코칭스태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 간단한 쇼케이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