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처절한 메이저리거 > (13/200)

< 처절한 메이저리거 >

- 팡! 팡!

“안녕하세요, 코치님. 저 왔습니다.”

“... 그래, 오늘도 일찍 왔네. 그런데 인사 안 해도 너 온 건 알겠다. 계속 글러브끼고 생활하는 거 안 불편하냐? 하루에 15시간은 끼고 사는 것 같은데?”

“불편하죠. 불편한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지.”

수비에 심각한 갈증을 느낀 영도는 일상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수비력을 보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3루수에게 필요한 능력은 전진할 때와 기다릴 때, 후진할 때를 판단하는 과감성과 판단력, 빠른 타구를 처리하는 순발력과 세밀하고 정확한 글러브질, 강한 어깨와 글러브에서 빠르게 공을 빼내는 핸들링, 번트를 대비하는 맨손 처리 능력 정도.

이중 경험이 중요한 부분과 본격적인 훈련이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면 결국 일상에서 키울 수 있는 건 글러브와 친해지는 정도라고 판단한 영도는 이후 하루 15시간씩 글러브를 낀 채 생활하고 있었다.

밥 먹을 때와 잘 때, 화장실 갈 때 정도를 빼면 계속 글러브를 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글러브 속에 공을 넣고 계속 넣었다, 뺐다 하면서 송구하는 오른손의 감각과 글러브질을 단련하는 건 당연했다.

- 삐-익!

그때, 어디선가 들린 호루라기 소리에 반응한 영도는 순식간에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송구 자세를 취했다.

당연히 영도와 대화하던 지영규 코치는...

“아오, 깜짝이야! 뭐야! 뭔데? 지금 뭐하는 건데?!”

“하하하, 안녕하세요, 코치님. 좋은 아침입니다. 놀라셨어요?”

“놀랐지, 이 자식아! 그 호루라기는 뭐야? 아니, 너는 서른여섯이나 먹어놓고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성호야.”

“우리 영도가 핸들링을 단련하겠다고 자기 혼자 무작위로 알람 설정해놓고 울릴 때마다 송구 동작을 잡더라고요. 그러니 선배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자기가 알람을 설정하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으니까 내가 무작위로 호루라기를 불어주겠다고 했죠. 대견하죠? 완전 고참 같고.”

“......”

“홈런치라고 데려왔더니 하루 종일 글러브끼고 사는 외국인 선수나, 좋다고 호루라기 들고 도와주면서 재미있어하는 최고참 프랜차이즈 스타나... 아주 팀 꼬라지 잘 돌아간다, 그치?”

지영규 코치는 신나서 웃고 있는 손성호와 옆에서 신경도 안 쓰고 글러브질을 연습하는 영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영도야 야구 잘해보겠다고 벌이는 기행이고, 손성호도 이유는 본인의 재미라 해도 어쨌든 도와주는 거니 뭐라 할 수도 없어 그저 웃을 수밖에.

“사는 데 불편한 것까지 감수하면서 이왕 시작한 거, 꼭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 네가 3루 수비 잘하면 우리 팀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

“한참 후배가 이러고 있으니까 자극이 되긴 되는 것 같죠? 다른 놈들도 그러려니하는 애들도 있지만, 메이저리거가 이러는 거 보면서 자극받아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하는 애들도 많고.”

“너는 이제 훈련 안 하냐? 우리 팀에 전문 1루수도 부족한 거 알지? 외야수만 넘쳐서 늙고 병든 너랑 영훈이가 1루수봐야 하는데 느껴지는 거 없어?”

“음... 영도가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거 보니 송구받기 쉽겠다, 다행이다...?”

“... 그래, 빠따나 잘 쳐라. 서른여섯 노장이랑 서른넷에 몸 상태 메롱인 놈한테 수비까지 안 바란다. 그냥 자동문만 열지 말아줘.”

하루 열다섯 시간씩 글러브를 끼고 생활하니 당연히 훈련 중에는 절대 손에서 글러브를 빼지 않았다.

지난 시즌까지 풀타임으로 3년 연속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며 80홈런 가까이 때려낸 선수, 170만 달러를 받고 합류해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스타 선수가 이러니 다른 선수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비싼 척하더니 그래도 선배 부탁이라고 들어주는 거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말이죠. 전 그냥 평소 하던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더 무서운 거지. 그렇게 했는데도 안 통한 메이저리그는 더 무섭고... 어쨌든 네 덕에 애들 자극받아서 좋네. 우리 팀 캠프가 이렇게 치열한 건 진짜 오랜만이야.”

“이게 치열한 겁니까? 제가 보기엔 여전히 널널해 보이는데... 호주에 있을 땐 선수들끼리 시드니까지 왔는데 아깝다면서 매일 놀러나가는 것도 봤는데요?”

“... 그래. 나도 봤어. 봤는데도 내가 본 중 가장 치열한 캠프야. 놀랍지?”

지영규 코치가 손성호를 구박하는 건 손성호가 팀 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겉으로야 실실대고 넉살좋게 웃고 있지만, 은퇴 전 우승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서른여섯의 나이에도 처음 야구를 시작한 어린 선수들처럼 치열하게 1루 수비를 훈련하고 타격 폼을 다시 점검 중인 선수가 손성호였다.

다만, 손성호는 매일 보는 선배라 아무리 그가 대스타고 프랜차이즈 스타라 해도 다른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손성호가 영도의 합류를 반기고, 지금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고.

“크으, 이러다가 진짜 나 이번 시즌 끝나고 바로 은퇴해버리는 거 아냐? 은퇴 전에 꼭 우승하고 싶다고 떠들었지만, 그게 진짜 가능할까 나도 의심했는데... 이번 시즌 분위기 괜찮은데?”

“그것도 젤레발입니다. 제가 한국 있을 때부터 젤레발은 절대 금지라는 말 많이 들었는데...”

“야! 내가 젤레발이면 네 말은 부정타는 말이야! 빨리 침 뱉고 퉤퉤퉤 해, 자식아!!”

어쨌든 믿을 수 없지만, 이번 제츠의 스프링캠프는 최근 수십년 동안 가장 치열하고 충실한 캠프라는 건 사실이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모였고, 선수단 분위기도 괜찮은 편이지만, 딱 하나. 절실함과 끈기, 뒷심이 부족해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서울 제츠.

그런 제츠의 단점이 영도로 인해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

***

[애리조나 캠프 리그 개막전 매치는 서울 제츠와 서울 드래곤스의 연고지 라이벌 매치, 그리고 유영도의 9년 만의 복수전]

[9년을 돌아온 복수... 유영도, 이문재 감독의 서울 드래곤스 상대로 제츠 유니폼 입고 첫 출격. ‘운명의 장난’]

[이문재 감독, “그저 여느 때와 같은 한 경기, 그것도 공식경기도 아닌 시즌을 준비하는 연습 경기일 뿐.”]

[쿨한 유영도,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일은 이제 됐다. 중요한 건 상대 감독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서 팬들의 기대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것.”]

ㄴ 이문재 앞에서 4연타석 홈런 한 번 시원하게 때려주고 빠따도 시원하게 던져주자!

ㄴ 감독이 문재, 사장이 문제, 구단이 문제... 용은커녕 이무기도 안 되는 놈들, 우리 메이저리거 형이 다 패주실 거야!

ㄴ 이번엔 선수 없어서 장사도 못했는데 어쩔래? 선수 키워서 좀 잘한다 치면 선수 장사로 팔아먹더니, 올해는 또 어떤 비열한 짓을 할지 이제 기대까지 되네.

ㄴ 기대는 개뿔... 감독이 대놓고 엿 먹이고 쫓아낸 메이저리거가 돌아왔는데 공중분해 안 되면 다행이지. 만약 유영도가 MVP급으로 리그 박살내고 메이저리그로 복귀해서 다시 날아다닌다? 이문재랑 드래곤스는 제대로 역풍 맞는 거야.

ㄴ 보니까 오늘 선발 백만년 유망주 이범규던데... 선발이 4, 5이닝 막아주고 두터운 불펜으로 막아서 이기는 게 드래곤스 야구인데, 이범규가 4, 5이닝 막겠냐?

ㄴ 제츠는 어차피 분위기로 야구하는 소총부대라 똑같이 백만년 유망주 김동구가 등판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

ㄴ 난 그게 기대됨. 분위기 한 번 타면 미친 듯이 타오르고, 한 번 잘못 타면 미친 듯이 추락하는 팀인데, 분위기 끌어올리는데 가장 좋은 건 홈런이잖슴? 근데 괴물 같은 장타자가 합류한 거임. 이번 시즌 막 느낌 좋은데 나만 그럼?

ㄴ 쉿. 조용히 해. 나도 그런데 제츠라 가만히 있잖아. 젤레발 떨다 잘못되면 니네 집 앞에 애들 찾아간다.

공교롭게도 2차 스프링캠프, 속칭 ‘애리조나 캠프 리그’의 첫 경기는 서울 제츠와 서울 드래곤스의 맞대결이었다.

사실, 연고지도 같고 재정적인 문제와 서울시의 사정이 겹쳐 드래곤스가 뻔뻔하게 제츠의 홈구장, 잠실 올림픽 파크로 꼽사리껴 들어온 악연, 심지어 거의 제츠 선수라고 생각했던 영도를 쫓아낸 이문재에게 감독 자리를 준 황당한 일도 있었지만, 이 둘은 라이벌로 잘 묶이지 않았다.

제츠는 드래곤스를 무시하거나 얄미워했으면 했지, 진짜 라이벌은 고척돔의 서울 타이탄스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영도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츠의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제츠 팬들은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제츠 유니폼을 입은 영도의 모습에 열광했고, 조금씩 잊어가던 이문재와 드래곤스를 향한 반감이 다시 타올랐다.

언론에서도 둘의 관계, 팬들의 반응 등을 조명하며 부추겼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두 팀 사이에도 뭔가 모를 긴장감이 맴돌았다.

“너 분석실에서 산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는데, 혹시 저 위에 범규도 분석했냐?”

“당연하죠. 지난 시즌 KBO에서 1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은 전부 다 조사했어요.”

“와...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조사했구나. 1군에서 1이닝만 던져도 조사하면 대체 그게 몇 명이야? 몇 달 동안 분석실에서 산 이유가 있네. 보람도 있고.”

메이저리그에서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두로 ‘강한 2번’이 떠오르고, 최소한 간판타자를 3번 전에 배치했을 때도 아시아에선 전통적인 ‘4번 에이스론’을 밀었다.

하지만 ‘강한 2번’의 등장 이후 어느새 25년.

KBO 역시 ‘강한 2번’, 선수층이 얇으면 밸런스를 위해 ‘강한 3번’을 대부분 채택했다.

“그럼 내가 먼저 갔다 올 테니까 이 선배님 하는 거 보고 배워라.”

서울 제츠에서 간판 타자라고 한다면 3할 중반의 타율과 8할 중반의 OPS, 두 자릿수 홈런을 기대할 만한 손성호, 3할의 타율과 8할 중반의 OPS, 10개 중반의 홈런을 기대할 만한 한영훈 정도가 있었다.

20홈런을 곧잘 넘기는 우희운도 있지만, 포수라서 상위 타순에 배치하기 곤란하고, 타율과 출루율이 많이 낮았다.

40홈런 포텐셜이 있지만, 아직 터지지 않아 대타 롤이 한계인 양희운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제츠에 장타자는 아예 없는 상황.

결국, 영도가 외국인 선수이기도 하니 무조건 팀 타선의 핵심 역할을 맡아줘야 했다.

[오늘 유영도 선수는 이재준, 손성호 선수에 이어 3번에 배치되었습니다. 출루율이 높은 이재준 선수를 1번에 배치하고, 팀의 간판인 손성호 선수를 2번에 배치, 최대한 주자를 쌓은 뒤 유영도 선수의 장타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승배 감독도 같은 의미의 인터뷰를 했죠. 유영도 선수의 타순을 2번과 3번 중에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데, 주력이 평범한 수준만 되어도 2번으로 쓸 텐데 발이 너무 느려서 문제라고도 했어요.]

[프로 출범 이후 외국인 타자를 포함해도 60년 동안 30홈런 타자가 2명밖에 없을 정도로 고질적인 장타자 부족에 시달리는 제츠다운 고민입니다.]

[아무리 주자를 쌓아도 제츠 특성상 연속 안타가 나와야 득점이 가능한데, 유영도 선수의 발이면 어지간한 안타로는 2루에서 홈으로 들어오지 못할 거거든요? 그럴 거면 유영도 선수에게 전천후 역할을 기대하기보단 해결사로의 역할을 맡기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메이저와 KBO의 수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직 유영도 선수의 선구안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메이저에서 이 선수는 브레이킹볼 대처가 취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출루율도 굉장히 낮고 삼진도 많았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것 때문에 연습 경기가 있고, 시범 경기가 있는 거죠. 벌써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그런 거 확인하라고 잡힌 일정이거든요.]

“......”

“... 잘 배웠습니다. 2루수 앞 땅볼...”

팬들은 물론 중계진마저 비공식이긴 해도 영도의 KBO 소속 첫 타석에 관심을 쏟는 동안 1번 이재준과 2번 손성호가 범타로 물러났다.

사실, 드래곤스의 투수 이범규는 여전히 유망주 꼬리표를 떼지 못해 일찌감치 몸 상태를 끌어올려서라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 선수였다.

반면, 이재준과 손성호는 팀의 핵심이자 어느새 30대 중반이 된 베테랑이었기에 아직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어놓지 않았으니 아무리 기량 차가 있어도 이범규에게 많이 유리한 대결이긴 했다.

보고 배우라는 말만 안 했어도 민망할 일 역시 없었을 터였다.

[드디어 이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많은 팬들 역시 기다린 그 선수, 큰 좌절을 겪었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타지에서 꿋꿋이 일어나 메이저리거로 성공한! 그리고 9년 만에 금의환향한 유영도 선수가 감동적인 KBO에서의 첫 타석을 준비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메이저리거로 성공했다는 멘트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중계진 특유의 과장이자 리그 흥행을 위한 스타 만들기의 의도가 다분했다.

영도가 들었다면 분명 민망해하거나 어쩌면 불쾌해했을 수도 있지만, 다행인지 영도는 중계를 들을 수 없었다.

‘첫 타석...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나 된 날 아직도 응원해주는 팬들이야. 그토록 꿈꾸던 제츠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들어선 첫 타석이기도 하고.’

제츠 홈팬들 앞에서 제츠 유니폼을 입고 활약하는 게 인생의 유일한 꿈이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영도가 26세고, 그게 불과 9년 전이니... 17세...가 아닌 35세이던 시기였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 홀가분하게, 모든 미련을 버리고 다시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있게 후회 없는 시즌을 보내자.’

후회 없는 시즌, 마지막 남은 미련을 날려버리는 시즌을 위한 첫 타석.

어느새 영도는 무엇이든 녹여버릴 듯한 뜨거운 눈빛으로 마운드 위 투수를 노려보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건 멀리 있는 무언가였지만, 지금은 어쨌든 이범규에게만 집중했다.

메이저리그에선 이런 눈빛으로 아무것도 녹이지 못해 ‘눈빛만은 MVP급 타자’라 조롱받았지만, KBO에서는 다를 거라 믿으면서.

< 처절한 메이저리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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