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열 >
“야, 유승도! 내 지갑 못 봤냐!?”
“그거 침대 옆 서랍에 있던데? 거기 찾아봤어?”
“오, 여기 있네... 그럼 내 핸드폰은? 핸드폰도 안 보이는데...”
“핸드폰은 TV 옆에 아주 잘 있더라!! 찾아보고 물어보는 거 맞지?! 응!?”
“역시 너밖에 없다, 야. 그럼 내 노트북...”
“조금 전까지 영상 분석한다면서 들고 있던 게 노트북 아냐!? 그럼 침대 위에 있겠지!! 좀 씻자! 자기가 들고 있던 걸 씻으러 들어간 사람한테 물으면 어떡하냐고, 이 인간아!! 내가 네 매니저지, 엄마냐!!”
영도는 입맛을 쩝하고 다시며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아니, 야구할 땐 이 정도 머리면 하버드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 만큼 기억력도 좋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는데 왜 다른 건 기억이 안 날까...’
다행히 미국행 이후 학생들의 학업 성적에도 신경 쓰는 규정 덕분에 상식도 늘고 세상 살아가는 법도 잘 알게 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영도는 일상생활에선 야구장에서와 달리 빈틈이 많았고, 특히나 동생이자 매니저, 믿을 수 있는 존재인 승도와 함께 있을 때면 더욱 심해졌다.
“후우... 씻으면서도 질문 받는 건 미취학 아동 키우는 엄마들 말고는 나밖에 없을 거다. 형이 애야? 형도 벌써 한국 나이로 따지면 스물여섯이야, 여섯! 이제 그런 건 좀 알아서 하지?”
“찾아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냐, 그럼. 너한테 물어보면 바로 찾아주는데 굳이 시간 낭비할 거 있어?”
“애초에 잘 두고 바로 찾으면 시간 낭비할 일도 없잖아? 왜 굳이 대충 두고 잊어버린 다음에 그걸 나한테 물어봐? 형이 애야?”
“아, 몰라. 나 편한대로 살면서 남는 시간 전부 야구에 올인하면 그게 결국 에이전트 준비하는 너한테도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좀... 도와줘라.”
“어우, 내가 괜히 에이전트는 하겠다고 해서 이 고생을 한다, 고생을!!”
그러니까. 처음부터 에이전트를 하겠다고 하질 말든가, 아니면 최소한 내가 우리 에이전시에 넣어준다고 했을 때 거절을 하든가...
영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가족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고, 이제 좀 그렇게 하자고 다짐도 자주 하지만...
가족한테 예의를 지킨다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 덕에 에이전시에 들어왔고, 내 덕에 그 귀한 메이저리그 분석팀의 뛰어난 자료들을 받아보며 공부하는 특혜를 누리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라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하여튼 질리지도 않냐? 매번 귀찮아서 이번엔 좀 강하게 이야기해야지, 해도 그 시간에 야구만 생각하고 있으니 뭐라 하기도 그래. 야구선수가 야구하겠다는데 뭐라 그래?”
“그러니까. 매니저가 원래 그런 거잖아? 선수가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나머지를 전부 대신 도와주는. 그러니까 불평 좀 하지 말고 직업 의식을 가져봐. 너도 돈 받고 하는 거잖아? 나한테만 프로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에이전시에서 받은 자료와 제츠 분석팀에게 받은 자료, 두 자료를 교차 검증해 일치하는 부분만 뽑아놓은 엑기스까지.
세 종료의 자료 모두 몇 번씩이나 정주행했지만, 영도는 지금도 자료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려하지 않아도 어떤 투수를 만나든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 투수의 특징과 공략법이 정리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잠깐 쉬면서 이거나 좀 봐봐. 진짜 한국에서 형 이미지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상상 이상이야. 매일매일 놀란다니까?”
“형이 인기 많으니까 막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고 그러냐?”
“아오, 또 지X... 형 밖에서는 되게 무게잡고 진지한 척 잘 하면서 집에서는 왜 이래? 대체 뭐가 진짜야?”
“뭐가 진짜긴. 둘 다 진짜지... 시끄럽고 이리 줘봐. 뭘 보라는 건데?”
[서울 제츠 1차 스프링캠프 현장을 가다! 팀 간판스타와 외국인 선수의 솔선수범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시드니]
ㄴ 와... 미쳤다... 저게 진짜 사람이 때린 타구가 맞아? 앞뒤로 나온 양한위랑 우희운도 어디서 파워로는 빠지는 선수들이 아닌데 아예 급이 다르네.
ㄴ 저게 메이저리그에서도 파워는 최고라고 꼽히는 타자의 프리 배팅이구나.
ㄴ 우희운은 20홈런은 때리는 타자고, 양한위는 KBO의 유영도라면서 컨택만 잡히면 40홈런도 기대할 만하다고 하던 유망주 아니었어? 메이저리그의 진짜 유영도랑은 수준이 다르구나...
ㄴ 메이저리그의 진짜 유영도는 메이저리그에서 KBO로 무대만 옮겼을 뿐인데 지금 당장이라도 40홈런 때릴 포스네.
ㄴ 크게 맞은 타구가 넘어가는 건 이해하겠는데, 깎여맞은 타구랑 빗맞은 타구가 넘어가는 건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냐?
ㄴ ... 파워가 인간을 초월했구나, 괴물이구나, 하고 이해해야지, 뭐.
ㄴ 르몽드가 작년에 41홈런 때리지 않았어? 르몽드 프리 배팅도 감탄하면서 봤는데, 이건 뭐 그 이상이야... 올해 진짜 사고치는 거 아니냐? 이것도 젤레발인가?
ㄴ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제츠 성적이 어떻든 유영도는 올해 진짜 사고 한 번 칠 듯. 성적이 좋든 나쁘든 모두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홈런 한 개는 때려줄 것 같다.
ㄴ 전 구장 장외 홈런도 가능할 듯.
[메이저리거의 프라이드는 진작에 다 버렸다! 캠프 내내 세탁비로 연봉 다 쓸 기세의 유영도]
ㄴ 마음이 막 정화되려고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1, 2개월 뛰고도 자긴 메이저리거 출신이라고 뻗대던 XX들 때문에 답답해 죽을 뻔했는데, 진짜 메이저리거 클라스 보니까 속이 뻥 뚫리네.
ㄴ 그래. 진짜 메이저리거는 이래야지. 걔네는 마인드가 그따위니까 한두 달 있다가 쫓겨난 거고, 바로 지난 시즌까지도 풀타임 메이저리거였던 유영도는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메이저리그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고.
ㄴ 감동적이다. 저런 선수도 약점 보완한다고 미친 듯이 구르는구나...
ㄴ 그런데 생각보다 수비가 좋은데? 메이저리그랑 KBO는 대체 얼마나 수준 차이가 나는 거냐?
ㄴ NPB에서 수비 천재라고 빨아주던 일본 유격수들치고 메이저리그에서 유격수 자리 지킨 선수가 없었음. 우리도 마찬가지. 다들 2루나 3루로 쫓겨났지...
ㄴ 음? 그럼 유영도도 KBO에서는 유격수 수비 가능한 거 아니냐? 드디어 식물타자 조규영이 안 봐도 되는 각인가?
ㄴ 아니, 걔들은 포지션 이동하고 나서 최소한 수비에서는 평균 이상이었다. 유영도 3루 수비는 평균보다도 훨씬 밑이었으니 KBO에서는 평균이나 평균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듯.
ㄴ 그것만해도 감지덕지다. 제츠 3루 잔혹사는 진짜 상상 그 이상임.
“... 뭐만 해도 기사가 달리고 댓글도 천 개씩 달리는구나...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지? 고맙긴 한데 이해가 안 되네...”
“지금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별로 없으니까? 10년 만에 4명 선도 무너져서 최근 20년 중 최소라는데 응원할 사람이 없어 형까지 응원한 게 아닐까? 뭐, 불쌍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불쌍하다, 라... 그래, 내가 좀 불쌍하긴 하지.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메이저리거라는 기대치가 부담스럽진 않고? 댓글들 보면 내가 볼 땐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메이저리거는 다르다면서 엄청 치켜세우던데, 시즌 개막하고 성적이 조금만 아쉬워도 바로 욕 먹는 거 아냐? 잘하면 당연한 거고?”
“잘해야지. 그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대단한 수준으로 잘해야지.”
“지금 사람들 기대치 보면 MVP가 당연한 성적 정도는 찍어줘야 놀랄 것 같은데...”
메이저리그와 비교해 지나치게 KBO를 깎아내리는 사람들과 지나치게 KBO를 고평가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코리안 특급이 메이저리그를 호령한 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KBO 스타의 메이저리그 진출이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의 KBO 진출은 항상 양쪽의 큰 관심을 받았다.
물론, KBO 스타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정상급의 성적을 찍기도 하고, 메이저리그 진출 후 빅리그는커녕 마이너리그에서도 죽을 쑤던 선수가 KBO로 돌아와 다시 MVP급 성적을 찍기도 하는 등 ‘사람마다 다르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전히 첨예한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보다 더 노력해서 기대치를 채워줘야지. 우리 한국 팬들이 원한다는데...”
“그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물론, 나도 형 정도 실력이면 KBO MVP급 성적은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해. 그런데 ‘급’이랑 이견의 여지도 없을 최고는 느낌이 다르잖아.”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KBO에서 성공해서 혹시나 억제기 일지 모르는 미련부터 털고 가자고 설득한 게 누구였더라?”
“나였지... 후우, 모르겠다. 형이 알아서 해. 난 걱정해줬다. 해보겠다고 한 건 형이야.”
“정확히는 네가 설득했고, 난 설득당한 거지. 그러니까 망하면 네가 책임져. 성공했으면 내가 너 먹여 살렸을 테니, 실패하면 네가 나 먹여 살리라고.”
“... 지금 당장 은퇴해도 연금만 수 만 달러씩 받을 사람이 무슨... 내가 형 먹여 살릴 일은 평생 없을 걸.”
영도가 시험대에 오를 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시즌 개막은 4월 초 정도이고, 시범경기 역시 3월 중순은 되어야 시작하지만, 그보다 더 전에는 연습경기가 있었기 때문.
2월 말, 서울 제츠는 애리조나로 2차 스프링캠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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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제츠, 서울 드래곤스, 대구 레이더스, 광주 울브스 등 4개 팀, 애리조나에 2차 스프링캠프 차려... 미국 팀들 비롯, 2주간 팀당 8경기씩 치를 예정]
[2월부터 ‘유영도 특수’? K SPORTS 채널, 서울 제츠 경기 중심으로 애리조나 연습경기 일부 중계 예정]
[2월 말부터 시작된 야구 중계에 팬들은 함박 미소! 예년보다 짧은 휴식 끝나고 야구 시즌 온다!]
본래 이 시기에는 속칭 ‘오키나와 리그’라고 부르던 비공식 리그가 있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 역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야구 경기가 불가능한 한겨울에도 한참 남부에 떨어져 있어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오키나와에서는 경기가 가능했기에 KBO와 NPB의 많은 팀들이 캠프를 차린 덕분이었다.
KBO에서만 6, 7개 팀, NPB에서도 그 정도의 팀이 캠프를 차리고 서로 연습경기를 가졌던 게 그 시작.
실제로 이 비공식 리그는 결국 ‘성적 지상주의로 인한 부상 위험’과 ‘선수 육성 소홀’을 이유로 좌초되긴 했지만, 한때 정식 리그 승격까지 논의될 정도로 활성화되었었다.
그리고 2020년 경, 한일관계 악화로 인해 국민 정서를 고려, KBO 구단들이 일본에 캠프를 차리지 않기로 하면서 그대로 해체되었다.
제츠는 그때부터 따뜻한 미 서부 애리조나에 캠프를 차렸고, 이후 마찬가지로 애리조나에 캠프를 차린 KBO 팀들, 현지의 독립리그 및 대학 팀들과 함께 연습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아이고, 우리 형 또 시작이네. 경기만 있으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햄버거만 꾸역꾸역 먹는 거...”
“어쩌겠냐. 에이전트면 너도 잘 알 거 아냐. 루틴이 선수한테 얼마나 중요한 지는.”
“알지. 아는데, 그 안 좋아하는 걸 억지로 쑤셔 넣으니까 문제지. 게다가 시범경기도 아니고 그냥 연습경기일 뿐이잖아?”
“시범경기보다 중요하고 어쩌면 개막전만큼이나 중요한 KBO 진출 후 첫 경기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럼 적어도 고기 넣은 버거라도 먹든가. 햄버거 중에서도 피쉬버거는 특히 안 좋아하면서...”
“후우...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떡해. 먹을 게 햄버거, 그중에서도 피쉬버거밖에 없어서 먹고 나간 경기에서 생애 최초로 2연타석 홈런을 쳤는데... 나도 힘들다, 새끼야.”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했던 영도이기에 당연히 징크스가 많기로 유명한 운동선수, 그중에서도 유명한 야구선수, 그중에서도 징크스가 많은 편이었다.
전생의 징크스에 회귀 후 추가된 징크스까지 있으니 가끔은 본인마저 피곤할 정도.
어쨌든 2월 말, 영도는 20여 년을 함께 한 징크스들과 함께 KBO에서의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예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