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 >
2010년대 중반 이후 메이저리그를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플라이볼 혁명’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전통적 야구인들은 ‘다운 스윙’을, 현대적 야구인들은 ‘레벨 스윙’을 가장 이상적인 스윙으로 평가하던 시절이었지만, 시대를 선도하는 혁명가들은 “타격은 현대 야구의 트렌드인 수비 시프트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내야수들의 키를 넘기는 것이 이상적이며, 가장 이상적인 타구는 홈런”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타구 발사각도 이론’.
이전의 대세였던 발사각 10-15도의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아닌 타구속도 98마일 이상의 발사각 25-35도의 타구, 즉, ‘배럴 타구’가 더 위력적이라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이에 따라 레벨스윙과 어퍼스윙의 중간, 미세하게 떨어지는 패스트볼의 궤적과 일치하는 미세한 어퍼스윙이 대세로 떠올랐다.
하지만 수많은 타자들이 타격폼 수정 후 삼진이 늘고 타율이 떨어지는데 그에 상응하는 숫자의 장타율 상승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사라져갔다.
사실, 발사각이 높고 체공 시간이 긴 플라이볼 타구는 기본적으로 안타 확률이 가장 떨어졌다.
‘플라이볼 혁명’ 당시에도 홈런은 모든 관련 기록을 깨부술 정도로 늘어났지만, 타율을 비롯한 다른 지표들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당시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강하게 공을 띄운다는 게 전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타자마자 신체의 구조, 파워 등에 따라 어울리는 스윙과 그렇지 못한 스윙이 있을 뿐이라며 자신에게 맞는 스윙을 찾는 게 무조건적으로 어퍼스윙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좋은 타구가 나올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플라이볼 혁명’이 리그를 폭격했던 2010년대 후반과 20년대 초반 두 차례나 MVP를 수상한 당대 최고의 타자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레벨 스윙을 구사했다.
결국, 야구는 잘하는 선수가 잘하고, 잘하는 선수는 본인에게 최적화된 접근법을 받아들였을 때 만들어진다는 예시였다.
“기계식 스트라이크 판정이 도입되고, 타임클락 도입 후 투수들의 실투가 늘어난 보상으로 스트라이크존이 높고 넓어지고, 변형 패스트볼로 땅볼을 유도하는 시대를 지나 다시 전통적인 브레이킹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시대가 되면서 적절한 어퍼스윙의 시대도 끝이 난 거죠. 야구의 역사가 원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타자가 대처법을 찾으면 다시 투수가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다시 타자가 대처법을 찾는...”
실제로 ‘플라이볼 혁명’은 수비 시프트의 발전과 투심 등 변형 패스트볼의 대유행, 낮아진 스트라이크존이 겹치면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야구에 정답은 없었고, 투수의 발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타자들이 또 하나의 답을 찾아낸 것에 불과했다.
이미 당시부터 투수들은 타자의 어퍼스윙에 대처하기 위해 하이패스트볼을 들고 나왔고, 지나친 홈런 의존을 막기 위해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개입하면서 혁명은 끝났다.
지금은 일종의 소강상태.
투수와 타자 모두 특별한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무기를 갈고 닦는 시대였다.
“당신은 말 그대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몸이 버티지 못할 만큼, 과거의 지안카를로 스탠튼 같은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몸을 망가뜨릴 정도의 괴력은 또 아니죠. 이상적인 장타자의 신체입니다.”
“그렇게 평가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뇨, 아뇨. 아시겠지만, 전 공치사 같은 거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러니까 어디 고용되질 못하고 자체 아카데미나 운영하는 거죠.”
영도가 찾아온 에드가 펜서 코치는 당대 덕 래타 코치의 포지션을 계승하는 인물로, 부족한 사회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본인의 성향 때문에 어느 한 곳에 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각종 최신 장비와 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수에게 맞는 타격폼을 찾아주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 성공률은 대략 2할 정도.
과거의 유명 코치들이 지도한 선수의 숫자와 그 결과를 감안하면 충분히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수비 시프트를 넘겨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기본이 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대세가 다운스윙에서 조금이라도 퍼올리는 스윙으로 넘어오긴 했습니다만, 당신 같은 선수들에겐 또 이야기가 다르죠.”
“나 같은 선수라면 어떤 선수를 말하는 겁니까?”
“굳이 퍼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시프트를 넘길 수 있는 파워히터들. ‘플라이볼 혁명’ 당시에도 어퍼스윙에 집착한 건 수비 시프트를 넘기기 어렵고 강한 배럴 타구를 날리지 못했던 똑딱이 타입의 타자들이었지, 파워히터들은 유행을 덜 탔죠.”
영도는 점점 펜서 코치의 말에 빠져들었다.
KBO 2군 시절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능력 있는 타격코치들은 언제나 스케줄이 꽉 차 있었고, 2군, 그것도 한국의 2군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아마 당신이라면 조금 빗맞아도 배럴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겠죠. 위를 때려도 탑스핀이 제대로 걸리면 내야쯤은 간단히 넘어갈 테고. 그럼 우린 이제... 장타를 충분히 때릴 수 있으면서도 컨택도 높일 수 있는, 그런 폼을 한 번 찾아봅시다.”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제 처음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눠봤을 뿐이지만, 영도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유명한 타격코치에게 일대일로 조언을 받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더더욱 기대가 컸다.
“일단 데이터를 뽑아야 하니까 가서 내가 말하는 폼으로 한 번 휘둘러보세요. 장타력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폼을 간결하게 하면 어느 정도까지 간결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봅시다.”
‘간결한 스윙이라...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영도의 야구인생과 간결함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부상 전에는 겉멋이 들어서 최대한 화려하려 했고, 야수 전향 후에는 하나 남은 툴, 파워를 극대화하기 위해 힙턴, 허리회전, 레그킥, 긴 테이크백, 극단적 어퍼스윙 등 필요한 건 전부 가져다 붙였으니까.
“그래도 이왕 전부 내려놓고 제로부터 시작하기로 한 거니까. 그동안의 것들은 전부 버리자.’
이미 결심한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영도는 그동안 해온 것들을 과감히 버린 채 펜서 코치의 요구대로 배트를 휘둘렀다.
“레그 킥은 물론, 토 탭도 금지! 양 발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 그립이 귀보다 아래까지 내려오게 낮게 잡고, 테이크백도 생략해봅시다!”
들려오는 지시들은 전부 그동안 영도가 쌓아온 것들과 정반대되는 내용들.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미 영도는 제로가 되어 있었다.
“호오... 배트 스피드 빠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 이상인데요? 회전만으로 전신의 힘을 끌어내는 모습도 이상적이고... 아니, 그 정도 파워에 배트 스피드, 이런 부드러운 회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스윙을 붕붕 날려댄 거예요? 혹시 타구를 우주까지 날려야 홈런이라고 생각한 건가?”
‘과거에는 부상 때문에 배트 스피드도 많이 떨어졌었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전신의 힘을 끌어내도 파워가 부족했으니까... 기적이 일어난 덕분에 그때 한 노력들이 전부 실체화되면서 훨씬 좋아지기도 했고.’
펜서 코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동안 수많은 지도자가 어퍼스윙을 버리라고 한 이유를 깨닫고, 결심이 늦었던 게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지금이라도 결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 데뷔가 빨랐을 뿐, 만 24세면 아직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이 정도면 몇 개만 간단히 추가해도 홈런 30개, 40개는 가볍게 치겠어요. 더 치고 싶으면 한두 개 더 추가해도 되고... 일단 선구안도 확인을 좀 해볼까요? 역시 당신의 매력은 홈런이니까 필요 이상으로 간결할 필요도 없죠.”
“얼마든지 시키세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먹고 자라면 그렇게라도 할 테니 최대한 완벽하게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야구인생에서 이 정도로 큰 변화를 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특히 회귀한 이후에는 수십년 동안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잃을까 두려워 제대로 된 변화를 시도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시도하는 변화는... 즐거웠다.
야구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여기서 먹고 자면서 생활해도 좋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선수가 이렇게 열정적이니 제 기분도 다 좋아지네요. 어디 한 번 최대한 완벽에 가까운 타격폼을 찾아보죠.”
펜서 코치 역시 이런 영도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선수와 코치 모두 열의가 넘치는 상황.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타격폼이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어요.”
얼마 뒤, 펜서 코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영도에게 훈련 종료를 알렸다.
예민하기로 유명한 코치답게 평소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일도 매우 드물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폭소 수준이었다.
그 정도로 훈련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로 간결하게 휘둘러도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30개는 충분히 칠 만한 파워가 나온다니... 내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네요. 진작 에디를 찾아왔어야 했는데...”
“하하하, 안 그래도 당신을 보면서 항상 생각했죠. 저 타자는 조금만 만지면 분명 대단한 타자가 될 텐데, 하고.”
바뀐 타격폼은 이전의 폼과 비교하면 전면개조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확연히 달랐다.
양 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에 고정되었고, 배트는 비교적 높이 들지만, 대신 꼿꼿이 세워 테이크백을 간결하게 조정했다.
무게중심도 공의 구위를 이겨내는 압도적인 파워를 감안해 앞발과 뒷발에 5:5로 두었고, 안정적으로 끝까지 배트를 컨트롤해 컨택할 수 있게 상체 역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스피드를 개선할 수 없으니 팔로우 스윙을 끝까지 이어가 1루 도달 시간을 조금 손해보더라도 장타를 살리기로 했다.
일반적으로는 장타를 때리는데 불리한 폼이었지만, 배트 스피드와 부드러운 체중이동, 그리고 압도적인 힘이 이 폼으로도 홈런을 뻥뻥 날릴 수 있게 도와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약간이나마 퍼올리는 궤적의 어퍼스윙이 되었지만, 그게 영도에게 가장 어울리는 스윙이었다.
“이 폼이면 분명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텐데... 다음 시즌을 한국에서 보낸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 즐거움은 다음으로 미뤄두죠. 즐거움을 기다리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까.”
천하의 유영도인데 제 아무리 타격폼을 뜯어고치는 중이라 해도 다른 노력을 멈출 리 없었다.
이미 KBO 투수들은 영도의 머릿속에 철저히 해부되어 있었으며, 불과 한 달 전 계약을 마친 외국인 투수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다리기 힘들다, 싶으면 KBO라도 챙겨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메이저리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KBO의 응원전이나 그 열기, 당신이 만져준 나의 활약 정도면 애피타이저 역할은 충분히 할 것 같은데.”
“하하하, 그것도 좋죠.”
“지켜보면서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연락해주세요. 이 정도로 많이 바꾼 건 처음이라 시즌 내내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유. 자신감을 가지시죠. 나를 만나기 전의 당신도 아시아 정도는 충분히 초토화시킬 수 있는 좋은 선수였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이제 기술적인 조언이 아니라 자신감과 확신, 그것뿐이에요.”
이제 장기인 노력과 훈련으로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를 끝냈다.
남은 건 영도가 17세 이후 가져본 적 없는, 회귀 전의 시간까지 포함해 25년이 넘도록 가져본 적 없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KBO에서도 쭈굴대면...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으니.”
< 도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