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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우는 마음 > (6/200)

< 기우는 마음 >

“내가 쓴 건 아니지만, 형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 리그에서 뛰는 걸 간절하게 원해왔다고 전달하긴 했지.”

“서울 제츠의 헤비한 팬이라서 제츠에서 뛰고 싶어하긴 했지만, KBO에서 뛰는 걸 막 그렇게까지 간절히 바란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그게 그거지, 뭐. 또 모르잖아? 워낙 갑작스레 한국을 떠났으니 아직 아쉬움이 남아있을 수도. KBO 한 번 시원하게 접수해주면 미련이 싹 날아가서 각성할 지도 모르지.”

“아니, 지금... 아니지. 잠깐만.”

"물론, 형이 원한다면 메이저리그에 남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에이스는 다시 우승을 노린다고 선언했으니 형의 자리가 없어진 거지만, OPS 0.750에 30홈런 가까이 때리는 타자를 데려갈 만한, 뎁스 얕은 하위권 팀은 수두룩하니까. 물론, 연봉 150만 달러를 넘는 건 불가능하겠지. 경쟁자도 많을 테고."

승도가 뭘 알고 힘을 쓴 건 아니겠지만, 영도가 듣기에도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급박하게 진행된 미국 유학 때문에 미련이 남은 건 아니지만.

돌아오기 전의 영도가 가졌던 1군 콜업, 활약에 대한 집념은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

그 정도로 무서운 집념이라면 지금의 나에게도 나도 모르는 미련이 되어 남아있을지 몰라.

영도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좋아. 나한테 들어온 제안은 있고?”

“당연히 있지. 혹사와 갑질, 꼰대질 때문에 한국을 떠나야했던 불운의 에이스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얼마나 흥미로운 스토리야?”

“아니, 계약 제안 들어왔냐니까 웬 헛소리? 묻는 말에나 좀 대답해라. 매니저 시켜줬더니 진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좀 들어봐. 형은 세상 돌아가는 걸 좀 알 필요가 있어.”

“이 자식이... 후우, 그래. 궁금하니까 넘어간다. 그럼 하고 싶은 말 해. 대신 내 질문에 대답은 꼭 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아마추어 선수들의 학업 성적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제도 덕에 야구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가는 중이지만...

이번 생에서 가방끈이 더욱 길어진 승도가 저렇게 나오면 여전히 대응이 어려웠다.

“자, 봐. 일단 엄청 뜨거운 성원은 아니라지만, 이미 한국 팬들이 형에 대해 잘 알고 응원해주는 분위기야. 이런 외국인 선수를 어디서 찾겠어? 안 그래?”

“그렇지. 보통 외국인 선수는 이름도 잘 모르던 선수가 대부분이니까.”

“그렇지. 게다가 한국에서 15년 넘게 살았으니 한국 문화에도 익숙해. 리그 적응에 크게 어려울 것도 없어. 이것도 엄청난 장점이지?”

“그럼. 먹는 거, 자는 거, 사람 대하는 거 등등 해외생활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잘 알지.”

“마지막. 바로 직전 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주전급으로 활약한 만 24세의 젊은 선수기까지 해. 이거 하나만으로도 보따리 싸들고 달려들 구단이 수두룩할 걸?”

“그래도 미국 국적만 남기고 한국 국적 포기한 선수인데... 그렇게 긍정적인 분위기일까?”

“하이고... 이 형이 사회를 따돌려도 너무 따돌리는 거지. 형은 피해자고,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미지라 오히려 동정하면 했지,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렇다고 안티가 적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 안티는 많은 것도 아니지.”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기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직후부터 8년 동안 소소한 성장은 있었지만, 눈에 띄는 성장이 없었다는 것. 

제자리걸음에 그쳐 있다는 건 소처럼 우직하게 야구에 매진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영도마저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이든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상황에서 찾아온 KBO 진출 기회.

영도의 마음도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징계기록도 있는데 그 잘난 분들이 어떻게 허락을 했네?”

“흠... 글쎄? KSBA랑 KBO는 워낙 사이가 안 좋으니 대부분의 구단에서는 대견해하면 대견해했지, 언짢아하진 않을 걸? 커넥션이 있는 구단들이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겠지만.”

“그 새끼한테 감독 자리까지 준 서울 드래곤스처럼 말이지.”

“댓츠 롸잍! 그 외에도 한두 개 정도 더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구단이지.”

생각해보니 처음 생각대로 금의환향 후 언론플레이로 복수를 마무리하는 것보다 아예 KBO에서 1, 2년 맹활약하면서 활약할 때마다 계속 그 사건을 상기시키는 게 더 큰 복수가 될 것 같았다.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이런 대단한 선수가 외국인 선수 신분인 이유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테니.

‘이러면 네 가지 열매도 아니고 다섯 가지 열매인가.’

물론, 지금까진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전망이었다.

한 수, 두 수 아래의 다른 리그, 그것도 모국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떠난 지 10년 가까이 지나 어색해진 나라의 리그로 떠났다가 삐끗하기라도 하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돌아오는 게 가능이나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과거의 영도가 KBO에서의 활약을 갈망한 것처럼 지금의 영도는 메이저리그에서의 제대로 된 활약을 갈망했다.

KBO 진출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과거를 청산하려다 지금의 꿈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즉, 다른 모든 외국인 선수들처럼 영도에게도 모험이었다.

“후우, 그래서. 어디부터 협상하면 되는데?”

“일단 가장 조건도 좋고 적극적인 구단은... 서울 제츠!”

“뭐!?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어린 시절부터 서울 제츠의 열렬한 서포터였던 영도는 이후 거듭된 부상과 수술, 재활에 목숨 건 듯 매진한 훈련으로 애정이 식은 지금도 서울 제츠의 소식을 꾸준히 찾아볼 정도였다.

아마추어 시절의 꿈도 서울 제츠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는 것이었으니 가슴이 뛰는 것도 당연했다.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은 모르지. 일단 우리가 가서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춰야 선수랑 자리를 만드는 거니까.”

“그래... 뭐 새로운 소식 들어오면 바로 전해줘.”

“당연하지. 형이 당사자인데.”

슬슬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기회.

영도는 꽤 육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육감은 지금의 이 기회가 선물과 함께 과거로 돌아온 날, 미국 유학을 결정한 날에 이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라 말해주고 있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울 제츠 단장, 임준수입니다.”

“아, 예. 유영도입니다. 반갑습니다.”

“허허허, 오랜만이네, 영도군. 다시 보게 되어 정말 반갑네.”

변화가 필요한 영도와 수수료 수익이 필요한 에이전시, 풀타임 메이저리거를 데려올 기회가 생긴 서울 제츠.

셋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다 보니 어지간하면 다음 시즌 서울 제츠와 계약한다는 대전제에 빠르게 합의할 수 있었다.

이 자리는 영도를 확실하게 설득하기 위해 제츠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긴장을 내려놓는 가벼운 식사자리에서 어떻게든 영도를 설득하겠다는 제츠 측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자리.

실제로 유영도라는 대형 매물이 시장에 나왔고, KBO 진출에 긍정적이란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구단들도 적극적으로 접촉해오는 중이었기에 제츠 입장에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는 3루수 자리를 원합니다. 알아보니 최근 제츠는 3루수 자리가 계속 말썽이던데, 바로 내 자리다, 싶었습니다.”

“으음... 3루수라...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장에 계시니 저보다는 잘 알고 계시겠죠.”

“허허허, 뭐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우리 팀에 믿을 만한 3루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영도 군의 3루 수비도 메이저리그에서나 평균 이하지, 한국에선 못해도 평균은 되겠죠. 아니, 평균이 안 되어도 어차피 주인 없는 자리, 타격이라도 확실히 보여줄 선수가 합류한다면 무조건 이득입니다.”

비록 팀 사정과 본인의 부진으로 3루 자리를 빼앗겼지만, 언제까지고 1루와 코너 외야에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었다.

1루와 코너 외야는 지금 정도로도 충분히 세컨, 써드 포지션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메리트가 낮은 포지션들은 딱 여기까지.

다시 한 번 갑이 될 수 있는 KBO에서 다시 한 번 3루수로서의 도약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음... 다행히도 우리 유격수 조규영 선수는 수비, 특히 수비범위 하나는 KBO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선수입니다. 수비할 때 마음도 편하고 오랜만에 3루를 맡아도 금방 익숙해지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조규영 선수 수비 좋은 건 모르는 사람이 없죠. 1루를 전문 1루수가 아닌 외야수 출신 노장들이 맡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그거야 뭐... 제가 잘하면 될 일이고.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영도 측의 요구라고 해봤자 다른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모두 해주는 숙식 및 차량 제공, 세금 대납 정도였으니 그 선수들보다 커리어도, 현재 기량도 월등히 뛰어난 영도에게 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팀 내에 주전급 3루수가 거의 전무하고, 1루 자원과 외야는 충분한 상황이니 3루를 달라는 요구도 제츠 측에서 먼저 요구했어야 할 판이고.

서울을 연고로 하는 KBO 최고 인기 팀인 만큼 모기업의 투자도 빵빵한 구단이기에 아무리 경쟁이 붙어도 돈에서 밀릴 일 역시 없었다.

이러니 제츠의 팬인 영도와 제츠 관계자들의 만남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도군. 내가 영도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해야 해서 묻는 거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게.”

“예, 알겠습니다.”

“내가 영도군을 어떻게 대해주면 좋겠나? 평범한 다른 외국인 선수들처럼? 아니면 사춘기까지 한국에서 보냈으니 다른 한국 선수들처럼?”

보통의 외국인 선수들은 한국 특유의 선후배 문화에 포함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질문도 필요 없지만, 영도는 달랐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좁은 한국 야구계에서 영도 역시 예외일 순 없었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다니긴 했지만, 재능에 어울리는 야구 명문고에 속했던 영도이기에 현재 프로에서 활약하는 선후배만 해도 수십 명이고, 적어도 절반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외국인 선수로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겪은 게 있어서 그런지 그런 수직적인 문화는... 싫어하는 편이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영도가 한국으로 향하는 것은 아직 남아있는 약간의 미련이 1할, 나머지는 전부 야구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선후배 챙기면서 함께 웃고 떠들 시간도 아까웠다.

“허허, 그런가? 알겠네. 내 코치들과 선수들에게도 미리 말해놓지.”

“역시 유영도 선수... 고등학교 때와는 많이 변하셨군요. 그때만 해도 그 나이 또래답게 겉모습에 신경 쓰고 훈련보다 노는 걸 좋아하는 이미지였는데.”

임준수 단장의 말에 영도는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어느새 25년도 더 된 옛날의 이야기였다.

당시의 영도는 그 나이 또래의 선수답게 유니폼밖에 입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외모를 가꾸고, 어떻게 하면 훈련 빼먹고 놀러갈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했다.

그 덕분에 감독이나 코치, 선배들 말을 잘 들었음에도 악동으로 불렸고, 비슷한 성향의 서울 제츠를 좋아해 제츠 선수들 역시 이미 팀 동료가 된 것처럼 대했을 정도.

“아무래도 변할 수밖에 없었죠. 야구 하나 믿고 여기까지 건너왔는데 놀면서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예. 그래서 더욱 유영도 선수를 잡고 싶습니다. 우리 제츠에 지금 가장 필요한 건 항상 야구만 생각하는 필사의 태도, 그거거든요.”

놀기 좋아하는 유쾌한 선수들, 위계질서가 약해 선후배 할 것 없이 항상 즐거운 덕아웃 분위기, 그런 분위기를 앞세워 한 번 흐름을 타면 끝도 없이 치고 나가는 힘이 장점.

하지만 야구를 대함에 있어 언제나 적당함을 유지하며 야구에 목숨 건다 싶을 정도로 필사적인 선수가 없다는 것, 덕분에 한 번 처지면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 클럽하우스를 휘어잡을 강한 카리스마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 단점.

서울 제츠의 팀 컬러였다.

덕분에 포스트시즌 진출은 거의 놓치지 않는 강팀에 속하지만, 마지막 우승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3년 전.

실력 하나로 야구광인 구단주의 마음을 사로잡아 모기업 내부인사도, 현장 출신도 아니지만, 단장 자리를 꿰찬 임준수의 다음 목표는 23년 만의 우승.

영도는 실력은 물론 성격과 야구를 대하는 태도까지 모두 임준수가 바라왔던 퍼즐이었다.

“제츠의 분위기를 바꾸겠다, 라... 정답을 찾으시긴 했는데, 어려운 목표를 세우신 것 같습니다. 한두 명의 힘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임준수의 의도와 야망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영도의 마음이 딱 그랬다.

커리어 내내 1군 콜업을 위해 목숨 걸었고, 회귀한 지금도 메이저리그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진 못했다.

영도는 우승보다는 하나의 타석, 확고한 주전 자리를 갈망하고, 팀 성적보다는 개인의 성적에 허기를 느끼는 선수였으니까.

“어쨌든 이번 시즌 외국인 타자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메이저리거 출신의 오만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프로 진출 후 사실상 처음으로 받아보는 핵심 선수 대우.

아직 계약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고민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지만, 영도는 이 순간 자신이 한국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했다.

< 기우는 마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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