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끝과 시작 > (2/200)

< 끝과 시작 >

“어우, 이 몸으로 진짜 오래도 버티셨습니다. 사지육신이 어디 멀쩡한 곳이 없는데 어떻게 운동선수 생활을 하신 겁니까?”

“그러게요. 어떻게 아직까지 야구를 하고 있을까요? 가끔은 저도 제가 신기합니다.”

이제는 집, 야구장, 트레이닝 센터만큼이나 익숙한 병원을 찾아온 영도.

의사도 이제 영도의 꼴이 익숙해질 때가 되었지만, 만날 때마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운동선수치고 몸이 멀쩡한 선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아니, 모든 선수가 이미 몇 군데는 고장 난 상태죠. 운동할 때 빼고는 건강한 일반인보다 일상생활이 불편한 경우도 적지 않고...”

“그렇죠? 프로선수라는 게 참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강해보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 필요 없으니까.”

“근데 그런 프로선수 중에서도 영도 씨는 엄청 심각한 수준입니다. 밸런스가 무너져서 다친 부위 때문에 수술하고, 수술한 부위 때문에 또 밸런스가 무너지고... 끝도 없어요. 전체적으로 신체 밸런스를 찾으려면 재활만 몇 년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하하... 역시 그렇습니까?”

“몸 쓰는 직업이시니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지금 본인의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이걸 보면 아직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 듯했다.

아침부터 동생이 찾아와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자신의 몸을 한두 번 본 게 아닌 의사마저 날을 잡았다는 듯 설교를 늘어놓다니.

‘설마 아까는 마지막까지 같이 가자고, 응원한다고 하더니 의사한테 슬쩍 말해놓은 거 아냐?’

이쯤 되니 동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형한테 직접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의사를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정확한 인과관계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로서는 과격한 운동선수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걸 절대 추천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한계는 이미 몇 년 전에 찾아왔어요. 영도 씨도 잘 아실 겁니다.”

“신체의 한계라... 버거워진 지는 꽤 되었지만, 그래도 버틸 만하니까 버텼다고 생각하는데요.”

“워낙에 집념이 강하시니까요. 지금은 그 강한 집념이 어떻게든 끝을 잡아놓고 있는데, 그나마 끈이라도 잡고 있을 때 챙겨야지, 버티고 버티다 자신도 모르게 그 끈이 끊어지면 그때는 진짜 위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데미지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데미지라면...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까?”

“의사로서 비판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몇몇 선수들처럼 훈련을 구색 맞추는 수준으로만 하면 괜찮을 수도 있는데, 영도 씨는 절대 안 그럴 것 아닙니까. 딱 봐도 엄청난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게 보이는데.”

장애라... 솔직히 전에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침에 동생 승도의 진지한 만류를 듣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으니 천하의 영도도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났다.

항상 걱정하면서도 그래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동안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느낌.

“당장 어떻게 되진 않을 테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만, 지금 같은 하드한 트레이닝을 몇 년 더 이어가면 아마... 일이 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 지금처럼 해도 1, 2년은 버틸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이라는 게 오늘 멀쩡했다고 내일도 멀쩡할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걸. 그냥 멀쩡할 확률이 높은 쪽으로 관리할 수밖에요.”

겨우 동생을 설득해놨더니 이젠 의사인가...

영도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의사로서 말하자면... 이제는 슬슬 마지막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죠? 팔꿈치, 허리, 무릎, 다리, 목...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다는 걸.”

“... 예. 뭐, 대충은...”

“오랫동안 운동선수들 몸을 봐왔지만, 이 정도로 망가진 몸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기껏해야 한두 명? 다들 영도 씨처럼 무식하게 자신을 혹사한 선수들이었죠. 그들도 다 몸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끝을 냈고요.”

“그 정도로 많이 심각한 겁니까?”

“후우... 운동에 목숨 건 프로 선수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항상 어렵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니 조심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영도 씨한테는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계입니다. 몇 년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장애가 생길 가능성을 말한 거고, 선수로써의 경쟁력은 이제...”

아... 결국 또 은퇴 이야기인가.

그래, 서른다섯이면 본인처럼 무식하게 운동하지 않은 선수들도 축복받은 몸을 타고난 몇몇 선수들을 빼면 슬슬 마지막을 준비할 때이긴 했다.

운동선수 나이 서른다섯이면 이미 환갑을 훌쩍 넘어 고희, 팔순에 다다른 나이니까.

다만... 약관, 이립, 불혹, 지천명... 야구선수로서 그런 순간들을 겪어보지도 못했는데, 환갑과 고희, 팔순부터 겪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래도 너무 서둘러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정신적인 부분도 몸에 영향을 미치니까. 본인이 충분히 정리하고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진 않을 겁니다.”

“그럼요. 솔직히 많이 서글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순식간에 정신부터 무너질 만큼 약하진 않으니까요.”

“하하하, 아주 잘 압니다. 정신이 약한 분이었다면 몸에 칼을 그렇게 많이 대고도 아직까지 프로로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영도 씨 멘탈은 내가 또 걱정 안 하죠.”

의사가 힘내라는 듯 격려를 보냈지만, 영도는 어색하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렴풋이 느꼈고, 생각해왔던 은퇴.

그 단어가 생각보다 멀지 않음을 느낀 날이었다.

[병원에서는 뭐래? 나랑 비슷한 이야기하지? 이제 더 하는 건 무리라고 그러지?]

“야. 혹시 네가 미리 연락했냐? 나 좀 설득하라고?”

[에이... 먼저 연락해서 형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본 건 맞는데, 형을 설득하라 그러진 않았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한 정도?]

“진짜냐?”

[진짜지, 그럼. 다음 시즌 준비도 열심히 하길래 선생님한테 연락해서 몸이 버틸 수 있냐고 물었는데, 어휴... 선생님도 걱정하더라. 그 선생님 딱 팩트만 전달하기로 유명한 분인데, 오죽하면 그 선생님이 걱정을 해주냐.]

“야, 야. 오늘은 나 걱정해주는 거 듣기도 피곤하다.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니까 이제 그만 넣어둬.”

병원을 나선 영도는 잠시 마트에 들렀다.

빡빡한 식단조절을 병행하면서도 마지막 남은 경쟁력인 파워까지 붙여야 하는 상황.

개인 트레이너가 짜준 식단에 맞춰 장을 보는 것도 큰일이었다.

[어휴... 어떻게 10년을 그러고 사냐? 안 힘들어? 형 10년 동안 먹는 것들 거의 안 바뀌었지?]

“안 바뀌었지.”

[하여튼 내 형이지만, 참 존경스럽다.]

“평소에도 좀 그렇게 존경해봐라. 네가 존경하는 게 평소의 나인데, 왜 평소에는 그렇게 기어 오르냐?”

그때, 영도의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에나 잠깐 입에 대다가 10년도 넘게 입에도 안 대고 있는 알코올, 술이었다.

“...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할까? 술이 무슨 맛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

[... 형은 명절에도 술은 입에도 안 대잖아. 웬일이야?]

“그냥 마음이 좀 복잡하네. 너나 선생님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더니 심난하기도 하고.”

[하루쯤 평소 안 하던 짓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나쁘지 않지. 괜히 마트에서 술 사다가 혼자 청승떨지 말고 나랑 오랜만에 같이 한 잔 할까?]

“됐어. 내가 혼술은 해도 너랑 술은 안 마신다. 밖에서도 매일 술 마시고 다니는 놈이 무슨... 수 쓰지 마, 새끼야.”

[와... 안 넘어오네...]

“에휴, 됐다. 안 마셔. 그래도 아직은 미련이 남아서 못 마시겠네.”

[그래, 그렇게 해. 갑자기 변하면 탈난다더라. 결심 서는 날 나랑 한 잔 하자.]

결국, 영도는 카트에 술을 담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은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심난한 날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이 꼴이 되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비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수차례의 수술과 재활에도 여기까지 유영도라는 인간을 끌고 온 게 그 미련인데, 이제 와서 쉽게 버릴 수 있을 리가.

“아니, 이놈의 고물이 또 왜 이래? 카센터 들어갔다 온지 얼마나 됐다고!!”

[휴우... 그놈의 고물 좀 가져다 버리라고 내가 몇 번 말했냐. 센터에 쓰는 돈 딱 반만 줄여도 새 차 하나 뽑을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10년도 더 전에 중고로 뽑은 차를 아직도 타고 있어?]

“이제는 진짜 바꿔야겠네. 슬슬 매달 수리비가 차 할부금보다 더 나오기 시작했어. 오! 시동 걸렸다.”

[하여튼 참 별나... 센터에 쓰는 돈 1/3을 아껴도 충분히 시설 좋은 센터에서 운동하면서 차까지 뽑았을 텐데, 그걸 타협을 못 해서...]

“자, 자. 그만. 너 오늘 잔소리가 좀 많이 길다? 거기까지만 해두라고. 시동 걸렸다. 운전해야 하니까 끊는다.”

야구와 야구를 위한 자기 관리.

이제는 굴러가는 게 신기한 이 차는 영도가 두 가지를 제외한 것들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2군 선수의 연봉으로 어떻게 그런 수준의 관리가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존재이기도 했고.

실제로 운동 관련 장비를 제외한 영도의 모든 물건이 다들 비슷한 상태였다.

[이번엔 진짜로 그거 바꿔! 형이 안 바꾸면 내가 갖다 버린다?]

“알았어, 알았다고. 아니, 차가 굴러만 가면 됐지, 뭘 또 그렇게...”

[그래서 바꾼다고!?]

“그래, 그래. 바꿀게. 바꾼다고 했는데 또 왜 그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이야 당연히 속이 상했다.

아들이, 형이 뻔히 안 될 것 같은 것에 매달려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지켜보고 응원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영도 역시 그런 가족들에게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저 언제나 그래왔듯 열심히 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생이 크게 바뀔 거란 기대는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지만, 할 수 없지만, 그저 해왔던 걸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과 더불어 이런 상황들이 조금씩 영도에게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크으, 크으윽...”

그날 밤, 평소처럼 일찌감치 잠들었던 영도는 새벽 중 잠에서 깨어 팔꿈치를 부여잡았다.

“그래, 아플 때도 되긴 했지...”

이제는 낯설지 않은 통증이었고, 낯설지 않은 상황이었다.

팔꿈치, 무릎, 허리, 발목 등 부위마다 돌아가면서 난리라 이제 평화롭게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는 날이 더 적었다.

“근데 왜 오늘이냐고... 안 그래도 오늘 많이 힘들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또 이렇게 아파...”

이젠 익숙한 통증과 익숙한 전개였지만, 오늘의 상황이 익숙함을 익숙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연년생 형제로 인생의 거의 전부를 함께 한, 에이전트로 벌써 10년도 넘게 야구선수로서의 삶까지 함께 한 동생의 진지한 설득.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의사의 은퇴 종용.

그런 일을 연달아 겪고도 술 한 잔 편히 못 마시는 본인이 한심해 쓰게 웃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통증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자다니...

영도는 아슬아슬하게 겨우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놓치고 말았다.

“왜! 왜! 난 그냥 제대로 된 야구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원래 내가 있어야 했던 자리에 단 한 번이라도 서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수술과 재수술, 3차 수술까지 거친 첫 번째 부상과 재활, 그 뒤로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운동선수로서의 시간이 끝났음을 순간적으로 확신해버린 탓이었다.

인생을 걸었고, 남들에게 내 인생을 걸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살아왔다.

이제 그 인생을 걸었던 야구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 번 터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왜... 왜... 대체 왜...”

그렇게 온몸의 힘이 다할 때까지 울다가 슬슬 탈진해 쓰러지듯 잠이 들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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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이미 탈진할 때까지 한바탕 뒹굴고 날뛴 영도는 현실과 꿈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었다.

들려선 안 되는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타나면 안 되는 곳에서 나타난 글자들을 보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그랬기에 그저 이상한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평소대로의 유영도다운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대체 이게 뭔 일인지... 그럼... 일단 2번...”

<어라? 2번은 안 되는데? 내 출연 분량이... 진짜 2번으로 되겠어요? 아무리 열심히 훈련했다지만, 정상이 아닌 몸으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 1번은 진짜 말도 안 되는 능력치를 가질 수 있는데? 한 시즌 100홈런, 커리어 1,000홈런도 꿈이 아닌데!?>

“시끄러워... 내 것이 아닌 것에 의존할 정도로... 허술하게 살아오진 않았...으니까...”

이후 영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영도가 잠든 이후 언제 무슨 소리가 들렸냐는 듯 집 안이 조용해졌다.

다만, 누군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역시... 내가 사람을 좀 잘 봤네요. 앞으로도 조용히, 하지만 확실히 지켜볼게요.>

< 끝과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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