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어느 2군 선수의 하루 > (1/200)

돌아온 홈런왕 - ⓒ 미에크

한국을 떠난 비운의 유망주가 돌아왔다

=======================================

< 어느 2군 선수의 하루 >

“후욱, 후욱, 후욱...”

얼핏 봐도 없는 게 없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트레이닝 센터 내부.

마치 이 곳을 전세낸 것처럼 트레이닝에 매진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스어엇! 일고오옵!! 세 개... 만 더!!”

트레이너도, 함께 운동하는 사람도 없지만,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계속해서 자신의 한계를 맞닥뜨리는 한 남자.

그저 운동을 좋아하는 일반인은 아닌 듯 팔꿈치와 무릎, 발목 등 곳곳에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수술자국이 보였다.

일반인은 보기만 해도 고통을 느낄 정도의 흉한 수술자국을 여러 개, 심지어 같은 부위에 여러 개를 달고 있음에도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하드 트레이닝을 이어가는 남자.

누군가 함께 있었다면 숨소리마저 조심할 만큼의 무거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형... 또 여기 있네.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우리 형이 갈 데가 여기 말고 또 있나?”

그 순간, 이 남자를 형이라 부르는 또 다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고, 동시에 이 공간을 지배하던 무거운 분위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운동기구들을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노려보던 남자의 얼굴에도 어느새 개구진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이 새끼야. 내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냐? 여기 등록하느라 이번 달 쓸 돈도 없는데...”

“그래, 말 잘했다. 내가 뭐랬어? 여기 말고 적당히 괜찮은 센터도 많다고 했어, 안 했어? 정신 좀 차려. 형 지난 시즌에도 최저 연봉이었고, 이번 시즌도 최저 연봉 벗어나기 힘들다니까? 어우... 여기 한 달 회원비만 대체 얼마야?”

“아이고... 네가 내 에이전트지, 내 마누라냐? 내 연봉으로 너까지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번 돈 내가 쓰겠다는데 왜 그래?”

“형아, 형아, 이 형, 니미야... 형이 양심이 있으면 한 번 여기 좀 둘러봐라. 만년 2군한테 이 삐까뻔쩍한 트레이닝 센터가 가당키나 하냐? 우리 엄마 복장이 터져요, 복장이. 형 좀 말려보라는 우리 엄마 잔소리에 하나밖에 없는 형 동생은 고막이 터지고.”

“동생아, 동생아, 이 망할 동생아... 형님이라고 불러주는 건 좋은데, 숨을 좀 이상한데서 쉬었다고는 생각 안 하냐?”

그랬다. 메이저리거가 와서 훈련해도 모자라지 않을 이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이 남자는 만년 2군에 최저 연봉을 수령 중인, 흔하디흔한 프로야구 2군 선수였다.

유영도.

고교 2학년까지만 해도 초고교급 유망주로 유명했지만, 부상으로 쓰러져 만년 2군이 된 흔하디흔한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에휴... 그래, 내가 형을 몰라? 형 자존심에 한 번은 1군에서 옛날처럼 날아다니고 싶겠지. 근데 형도 알잖아. 솔직히... 이제 형은 한계야. 테크닉도, 멘탈도 아니고 몸뚱이가. 형 몸뚱이가 지르는 비명이 안 들려?”

“......”

에이전트이자 친동생인 남자는 오늘 날을 잡고 찾아온 듯했다.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던 조금 전과 달리 얼굴의 표정을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형. 야구선수도 운동선수야. 아무리 신체능력의 중요성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덜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강인한 신체가 필요하다고. 근데 형은 어때?”

“......”

“팔꿈치에만 칼을 세 번 댔어. 그래, 이제 우투로 전환했고, 야수로 전향했으니 왼쪽 팔꿈치는 그렇다 치자. 양 무릎에도 도합 세 번 칼 댔고, 발목이랑 허리도 계속 치료받는 중이지? 요즘은 목도 정상이 아니라면서.” 

“... 어차피 난 수비도 제대로 못 하잖아. 가끔 1루만 지키는 정도인데, 타석에는 충분히...”

“형. 형도 알잖아.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서른다섯에 수술만 일곱 번, 수비도 안 돼, 주루도 안 돼, 컨택도 평균 정도에 그나마 봐줄 거라고는 장타밖에 없는데 무릎이랑 허리가 고장 났으니 그것도 안 돼... 이렇게 훈련하면 뭐가 달라져? 장타가 살아있다고 쳐도 서른다섯, 그렇다고 타격이 압도적이지도 못한 선수한테 지명타자 자리를 주겠어?”

사실, 영도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현재 팀은 물론, 그 어떤 팀에서도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걸.

동생 승도의 말대로 잘난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발악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후우... 형. 진짜 심각하게 하는 말이야. 형, 이제 형 계좌에 돈이 없어. 부상 전에 프로 계약금이라도 받았으면 몰라, 부상 때문에 대학까지 갔다가 받은 계약금이 2천인가? 연봉도 8천을 넘긴 적이 없고, 작년에는 심지어 최저 연봉이었잖아. 그런데 자기관리에 쓰는 돈은 거의 메이저리거 수준이니 남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영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단순히 발악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관리하기도 했다.

부상과 수술, 재활로 적지 않은 시간을 날리고 포지션까지 바꿔야 했으니 몸 관리라도 철저히 해야 조금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장비만 쓰고, 좋은 곳에서만 훈련했다.

거기에 수술하고 재활할 때마다 구단에서 나오는 돈에 사비를 더해 최고 수준의 케어를 받았다.

버는 돈은 쥐꼬리인데, 쓰는 돈은 KBO 탑클래스 선수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기형적인 수익/지출.

계좌가 말라도 오래 전에 마르는 게 당연했다.

“이제 30대 중반이야. 몸은 다 망가져서 선수로 더 뛴다 해도 형이 꿈꾸는 1군에서의 맹활약은커녕 1군에 올라가는 것 자체, 아니, 2군에서 활약하는 것도 어렵고. 이 바닥도 나이가 깡패인 거 알잖아. 형보다 훨씬 조금 훈련하고 신나게 놀아제끼면서 몸도 막 굴리는 20대 초반 어린 애들이 몸뚱이만 믿고 날뛰어도 형보다 나아.”

“그럼, 아주 잘 알지. 내가 열일곱 이후로는 가져보지 못했던 그 쌩쌩한 몸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스포츠는 결국 몸뚱이가 핵심이야. 형도 이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둬. 슬슬 다음 인생 준비해야지.”

“다음 인생이라... 야구선수가 아닌 유영도라...”

“정신차려. 야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했지. 근데 그게 뭐? 그거 별거 아냐. 형도 이제 겨우 30대 중반이라니까? 야구선수라면 환갑이지만, 밖에서는 아직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젊은 나이라고.”

“하하하,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너도 여기서 흥분하고 있는 거고.”

”맞아. 나도 아직 정신 못 차려서 형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형도 알지? 나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는 거? 인맥도 좀 만들었어. 얼마 전에는 형 다녔던 중학교 야구부 코치 자리도 가져왔다니까? 말만 해. 언제든 중, 고등학교 코치 정도는 가져다 줄 테니까. 감독? 쉽진 않겠지만, 할 수 있어. 스카우트? 에이전트? 말만 해. 이 동생이, 아니, 잘난 형 에이전트가 책임지고 형 다음 인생 설계해줄 테니까.”

잔인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 하나밖에 없는 형이 아직도 찬란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발악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했을 터였다.

그 찬란했던 과거라는 것도 고작 아마추어 시절, 벌써 20년 가까이 된 대과거였으니 그럴 수밖에.

영도 자신도 본인이 한심했으니 하나밖에 없는 형의 그런 꼴이 걱정되는 것도 당연하지.

“승도야.”

“어. 뭐? 말만 해. 뭐가 하고 싶은데?”

“미안한데, 나는 아직도 야구가 하고 싶다. 어떡하냐?”

“형...”

하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영도는 아직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비루한 마무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모르는 거지. 내가 아무리 고등학교 때 잘 나갔다 하더라도 그런 애들이 한둘인가? 프로 와서 스무스하게 사라진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그랬을 수 있을 거야.”

“......”

“근데 아닐 수도 있었던 거잖아. 내 미래는 찬란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아직은 그만둘 수가 없네. 그 쓰레기들 때문에 내 야구가 이대로 끝난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분이 안 풀려... 라고 물으면 내가 눈치가 없는 거겠지. 에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설득할 수가 없잖아.”

열일곱 무렵에 있었던, 영도의 찬란했던 야구 인생을 한 순간에 시궁창에 빠뜨린 그 사건.

그 사건과 그 일에 관계된 이들을 언급하자 승도도 더 이상 영도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사건은 영도는 물론 영도의 가족 모두에게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오케이,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말리려고 하면 계속 그 이야기 꺼낼 거고, 그럼 우린 거기서 더 말리지 못할 테니 아예 끝까지 가보지, 뭐. 분이 풀릴 때까지 한 번 해봐, 그럼. 나도 에이전트를 맡아버렸으니 뭐 어쩌겠어? 분 풀릴 때까지는 도와줄게. 엄마 잔소리는... 에이씨... 그건 좀 힘든데...”

“고맙다, 새끼야. 역시 힘들 땐 가족밖에 없네. 동생이라고 하나 있으니 이렇게 힘이 된다, 야.”

“형이나 그렇지... 난 어디 웬수 같은 형 하나 만나가지고 이게 뭔 꼴이야? 형한테 쏟을 정신을 다른 A급 선수한테 쏟았으면 떨어지는 수수료가 어마어마할 텐데, 이게 무슨 시간 낭비, 인력 낭비냐고?”

“뭐라고? 야! 취소다! 힘이 되긴 개뿔, 어디서 이런 웬수가... 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오랜만에 한 번 푸닥거리 좀 해?”

“어어? 거기 딱 서! 운동선수가 어디 일반인을 때리려고!”

“너도 선출이잖아!”

“아니, 야구 못해서 깨끗하게 접은 게 대체 언제인데! 아무리 망가진 몸이라도 일반인한테는 흉기야!!”

끝을 알고 있음에도, 그 끝이 화려하긴커녕 더없이 초라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하는 상황.

형제는 그 비참함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억지로라도 웃었고, 평소처럼 투닥거렸다.

비참한 끝이 정해진 길을 함께 걷게 된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아오, 진짜! 좀 오라니까!? 지금 잡혀주면 한 대로 끝내준다고!”

“됐네요! 내가 잡히면 죽겠지만, 그 무릎에 잡히면 죽어야지. 일찌감치 운동 관둔 덕분에 내가 또 무릎은 쌩쌩하거든!”

“너... 앞으로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운전할 때도 조심해라. 진짜 언제든 세 대, 딱 세 대만 때릴 테니까.”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어야지. 집밖에서는 기자들이랑 붙어있을 거다. 어디 해보려면 해보던가!!”

"지금 나한테는 기자도 안 붙어, 새끼야!!"

< 어느 2군 선수의 하루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