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종말의 신화전(11)
라그나로크 대전장.
양대 세력이 명운을 걸고 부딪쳤다.
싸움은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데스 대 포세이돈.
시오 대 프레이.
‘신화의 재단’과 ‘재단에 봉하는 불’을 둘러싼 치열한 사투가 계속되었다.
유진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빛의 아우라를 머금으며 적들이 운집한 곳을 혜성처럼 지나쳤다.
“후우.”
죽이고 또 죽여도 적이 계속 나왔다.
최후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은 성화의 빛조차 하나의 섬광에 불과했다.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지지부진한 전장이 이어지자 서서히 배후에 있던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서는 건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검은 그림자를 거둬 내고 마침내 최후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올림푸스의 제우스.
아스가르드의 오딘.
두 명의 최고 신좌가 등장했다.
“이제 황혼을 거둘 때가 되었다.”
<절대적인 존엄자> 제우스가 근엄하게 얘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벼락같았다.
단 한 번의 고함에 무수한 번개가 내리꽂히는 느낌이었다.
“반역의 존재들을 모조리 처단할 시간이다.”
<만물의 지배자> 오딘이 외쳤다.
제우스처럼 오딘도 번개의 자락을 떨어뜨렸다.
불벼락의 제우스.
궁니르의 오딘.
이들의 번개 하나는 웬만한 성운 하나를 통째로 부숴 버릴 파괴력을 지녔다.
“드디어 나타났어.”
거대한 벼락을 머금은 두 최고 신좌의 등장을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공경하고.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라그나로크의 모든 것은 여기서 판가름이 날 터였다.
“천뇌.”
제우스와 오딘이 힘을 합치자, 천 개의 번개가 미친 듯이 내리쳤다.
무수한 벼락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으아아아!”
“크억!”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절규하고 절망하는 자들이 전장에 가득했다.
치열한 전투의 함성은 사라지고 비통한 신음만이 가득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진하…….”
에어리스는 지친 기색으로 힘겹게 몸을 추슬렀다.
벼락이 내리치는 와중에도 ‘재단에 봉하는 불’을 가까스로 지키고 있었다.
“허억, 허억.”
간신히 성불을 지키고 있었지만,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아슬아슬했다.
제우스와 오딘은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에어리스가 가진 재단의 불을 주목했다.
“그 불을 내놔라.”
제우스가 명령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아수라장이 된 전장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번개의 신좌였다.
모두가 지친 지금.
제우스와 오딘의 등장은 승패를 가르는 결정타가 되었다.
“허억, 허억.”
유진하도 지친 몸을 겨우 추스르고 있었다.
사방에는 자욱한 연기만 가득했고, 주변에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대참상이 벌어진 현장.
살아남은 존재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제우스와 오딘의 번개가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천 개의 벼락.’
저 낙뢰가 다시 떨어진다면 지상에 살아남을 존재는 아무도 없을 거였다.
“아…….”
에어리스는 재단의 불을 힘겹게 품에 안아서 지켰지만, 최후의 저항에 불과했다.
곧 떨어질 벼락은 죽음과도 같았다.
저기에 맞았다간 부스러기 하나도 남지 않고 소멸한다.
“절대 줄 수 없어요.”
에어리스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이 순간은 어머니 시오가 미래에서 봤던 광경이었다.
거의 태반이 사라진 대전장.
제우스와 오딘의 위세가 뒤덮은 이곳에서 에어리스는 죽음 직전에 내몰렸다.
여기서 유진하는 선택해야 했다.
‘에어리스를 살리는 것.’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한다면 오딘과 제우스의 용서를 받을 수도 있었다.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성운전은 세상을 다시 지배할 것이고, 모두가 신좌들에게 종속된다.
굴욕적인 패배이지만, 에어리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재단의 불을 지피겠다.’
에어리스의 의지는 강했다.
만약 천 개의 번개를 맞더라도, 마지막 힘을 다해 재단의 성불을 지킬 것이다.
어떻게든 지킨 후, 유진하에게 성불을 건넨다.
빛의 아우라를 가진 그라면, 고요해진 지금의 전장에서 ‘신화의 재단’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미끼는 에어리스.
다만, 그녀는 반드시 죽는다.
“허억, 허억.”
유진하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에어리스를 살리고 신좌들에게 항복하느냐.
아니면 에어리스를 잃고 라그나로크를 실현하느냐.
‘시오가 봤던 미래.’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깊었지만, 너무나 슬프기도 했다.
“에어리스…….”
그녀는 어떻게든 재단의 불을 주려고 했다.
‘모두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 없어요.’
알고 있었다.
어머니 시오, 쌍둥이 자매.
함께 싸운 모두가 원하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에어리스는 단호했다.
“…….”
거친 숨을 고르며 아직 살아남은 시오도 에어리스의 생각을 읽었다.
<신멸의 구도자> 시오는 신좌들을 증오했다.
방만하고 오만한 제우스 같은 신좌들은 다른 평범한 자들을 노예처럼 여겼다.
그는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영웅을 키우는 그릇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능욕을 당했다.’
시오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신좌들을 믿고 사랑했고 모든 걸 바쳤다.
세쌍둥이를 임신했으나 제우스에게 버림받았다.
‘대가를 치러야 해.’
시오만 겪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친구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 버려지고 죽었다.
영웅 헤라클레스도 헤라의 질투를 받아 저주를 받았을 정도이니.
‘…복수하는 마음으로.’
결국 시오는 동그랗게 부푼 배를 품은 채로 혼자 외로운 행성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결심했다.
‘모든 신좌들을 없애겠다고.’
지금의 에어리스도 그랬다.
성운전이라는 체계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했다.
신좌들을 위한 세상에서 남은 자들은 죽음조차 차별받을 만큼 차별받고 있었다.
그 세계를 바꾸고 싶었다.
“진하…….”
에어리스는 처음 유진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기억을 잃은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줬던 사람.
항상 옆에서 함께 했으며 지켜주었던 사람.
“저는… 결심했어요.”
마지막 순간.
에어리스는 자신이 유진하를 지키고 싶었다.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주저하지 말아 달라.
간절한 부탁을 보냈다.
유진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몰아치는 천 개의 번개.
저 두려운 공포가 내려친다면 모든 것이 가루가 될 터였다.
‘이제는 마지막…….’
최후의 선택이 남았다.
시오는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유진하는 에어리스를 살리는 것을 선택한다는 걸.’
세상 모든 사람이 살아 있더라도.
에어리스가 없는 세상은 유진하에게 의미가 없었기에.
항상 최선의 선택과 모두를 위한 싸움을 했지만, 처음으로 그 신념이 무너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에어리스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나는…….”
유진하는 기운을 가다듬었다.
에어리스를 구하려면 제우스와 오딘에게 항복하는 길이 유일했기에.
“나는 신좌들에게…….”
천천히 한 손을 들며 하늘을 향해 뻗었다.
저 하늘의 제우스와 오딘을 향해서 신호를 보냈다.
“항복을…….”
마지막 결정의 순간이 되었다.
“하지 않겠다.”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부탁을 들어줬다.
시오가 봤던 미래와 다른 선택을 내렸다.
그 순간.
무수한 차원 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에게도 최후의 수가 남아 있으니까.”
오딘과 제우스까지 나타난 이상.
이들과 맞설 가능성이 있는 자가 딱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지금 열리는 무수한 차원 문에서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취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회색 코트를 입은 사람.
끝없는 회귀의 굴레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초월좌가 나타났다.
“회귀자 유성하.”
유진하의 형.
회귀자 유성하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전장에 출연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어.”
오딘과 제우스가 최후의 수라면, 이쪽도 회귀자 유성하를 아껴 두고 있었다.
비장의 카드는 먼저 쓴 쪽이 불리한 법이다.
유성하는 반전의 서막을 알렸다.
“이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차원 문에서 같이 등장한 회귀의 잔재들은 본체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위협적인 적부터 제거하려고 덤벼든다.
제우스와 오딘은 최강의 신좌였고, 강대한 위협으로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간다.”
유성하와 회귀의 잔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큭!”
승리 일보 직전에서 회귀자의 방해를 받자 제우스는 당황했다.
오딘과 함께 번개의 방향을 바꾸어 공격했다.
콰아앙.
마침내 양대 성운의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가 정면에서 격돌했다.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진동했다.
“진하!”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지친 기색은 있었지만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쪽으로 갈게.”
유진하가 빛의 아우라로 움직였다.
에어리스가 가진 재단의 성불을 함께 옮기기 위해서 그녀를 덥석 안았다.
“아…….”
두 사람은 함께 빛의 아우라에 휘감겨 나아갔다.
신화의 재단을 향해서.
마지막 결말을 향해서.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 * *
지구는 평온했다.
사람들은 한가롭게 햇빛을 받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빠앙.
자동차가 지나가고, 시내는 평소처럼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만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갔다.
“항상 그랬지.”
호텔 옥상에는 푸른 머리의 마스터가 혼자 있었다.
그녀는 지구 성운을 만든 창조주였지만 결코 사람들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자유는 그것이니까.”
자유는 어쩌면 불합리할 수도 있었다.
때로는 악인이 이길 수도 있고, 전쟁이 벌어지거나 무수한 생명이 희생될 수도 있다.
그들은 신을 원망할 것이다.
신이 있다면 대체 뭘 하는 거냐고.
“내가 뭘 하겠어. 그냥 어쩔 수 없이 지켜보는 거지.”
창조주는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가짜 지구 덕분에 이곳은 살았는데…….”
아레스와 아르테미스 같은 신좌들이 가짜 지구로 넘어간 덕분에, 이곳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무사했다.
“다들 어떻게 싸우고 있을까.”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 연합 성운에 넘어간 원정대의 소식은 아직 없었다.
“돌아오지 않으려나?”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다.
바람이 불어와서 머릿결을 휘날렸다.
마스터는 마음을 진정하듯 가슴에 손을 대고 호흡을 크게 했다.
“기다리고 있어.”
유진하, 에어리스, 이소민.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여정은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
자유과 복종.
신과 인간.
성운전이라는 체계를 깨 버리고, 수많은 시공간이 새로운 개벽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기존의 체계에 굴복하느냐.
“유진하…….”
그의 이름을 불러 봤다.
원정대의 실질적인 리더인 그에게 모든 부담이 짊어졌다.
“무사히 돌아와. 모두와 함께…….”
마스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커다란 관문이 생겨났다.
“저건 뭐지?”
폭풍우가 휘몰아치자 마스터는 고개를 들어 지켜봤다.
찬란한 광채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관문이 있었다.
‘최후의 관문’.
마침내 성운전이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