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종말의 신화전(10)
불멸이라던 신좌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갔다.
아폴론과 헬리오스마저 사라지자 하늘에는 유진하만 남게 되었다.
때마침 종말의 신화를 열어 가던 바리데기가 목표에 도달했다.
-지옥도와 지구 성운의 리더가 진격로를 마련했습니다.
-종말의 신화전 3단계를 시작합니다.
-라그나로크를 준비하기 위해서 ‘신화의 재단’을 만드십시오.
리더가 있는 자리에 돌과 흙을 모아서 탑처럼 쌓아 올리십시오.
탑이 완성되면 빛과 어둠의 아우라를 넣고 20일을 기다리면 됩니다.
“너무 오래 걸리네.”
바리데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소녀 같은 외모지만 <십대왕의 성모>라 불릴 만큼 많은 자식들을 낳은 신좌였다.
또 종말의 신화 전의 ‘리더’를 맡아서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20일이나 이러고 있으라는 건데 그러기에는 정말 길다고.”
바리데기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불만을 토했다.
연이어 올림푸스 신좌들을 쓰러뜨려서 기세가 올랐는데, 20일이나 기다렸다가는 상대가 정비하여 방어 태세를 갖출 터였다.
“괜찮을 거예요.”
그때,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다가왔다.
유진하였다.
“신화의 재단은 이미 완성되었거든요.”
“뭐?”
모두가 놀랄 틈도 없이 차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열리는 문 사이에서 복귀자들이 나타났다.
“진하.”
에어리스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이어서 조커와 이소민도 따라 나왔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지구로 갔던 귀환자들이 다시 복귀했다.
이들이 가짜 지구에서 명연기를 펼친 덕분에 신좌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자자, 이것도 가져왔다고요.”
이소민이 낑낑거리면서 묵직한 무언가를 메고 오더니 그대로 내려놨다.
“여기 신화의 재단이 왔다!”
쿵.
두툼한 돌로 만들어진 재단이 나타났다.
“아르테미스가 만든 거야.”
가짜 지구에 감쪽같이 속은 신좌들은 완벽하게 봉쇄당했다.
이 작전은 단순한 트릭이 아니었기에,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화의 재단은 전리품이 되었다.
“자, 어때? 완벽하지?”
이소민은 재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여유를 부렸다.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그렇게 원정대에 다시 합류했다.
“이소민 누나, 수고했어요. 에어리스도 고생했어.”
종말의 신화를 여는 리더는 바리데기에게 맡겼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리더는 유진하였다.
지금의 상황은 유진하가 준비한 대전략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어요.”
전쟁에는 예비 병력도 중요했다.
선봉과 주력이 전투에서 소모되면, 결국 후속 부대로 승패가 갈리곤 한다.
병력의 운용.
제갈공명도 항상 중요시하던 가치였다.
하얀 도복을 차려입은 <천재지변의 책략가>는 오랜 숙원을 이루려는 듯 심사숙고했다.
“상대의 주력이 궤멸 직전입니다. 신좌들이 많이 사라진 지금이 전 병력을 투입할 적기이죠.”
백우선을 든 제갈공명은 신선처럼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기다렸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온다.”
원정대의 배후에 새로운 차원 문이 열렸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낯익은 거구의 심판관이 나타났다.
“여어, 다들 무사했나?”
거대한 체구의 거인 염라대왕이 등장했다.
그와 함께 명부의 나머지 9왕이 연이어 나타났다.
“계획대로 잘되어서 다행입니다.”
반가운 목소리.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같이 있었다.
에어리스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자 표정이 환해졌다.
“괴도 알파!”
천공의 성에서 에어리스를 대신하여 희생했던 괴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가면과 망토를 쓴 그 모습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마드모아젤 에어리스, 오랜만입니다.”
괴도는 명부의 도움을 받아 진흙으로 만든 임시 몸을 부여받았다.
괴도 말고도 서초패왕 항우까지 다시 나타났다.
“대전쟁이 펼쳐진다는데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되겠나.”
항우는 명부에서 수련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를 뿜어내며 전장에 강림했다.
“오오.”
사투를 벌이던 원정대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 세력이 도착하고 있었다.
유나도 다시 나타났다.
“유나?”
놀란 에어리스가 서둘러 유나에게로 달려갔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무사히 돌아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에어리스 언니, 미안.”
유나가 볼을 간질거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은 아까 아레스한테 육체만 잃은 거였어. 영혼은 무사해서 바로 지옥도로 넘어갔지.”
“다시 임시 육체를 받은 거구나.”
진흙으로 만든 임시 육체는 얼마든지 재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유나만이 아니었다.
차원 문을 넘어온 수많은 영웅들도 그랬다.
“영혼만 무사하다면 다시 임시 육체를 받을 수 있으니까.”
유진하는 집결한 병력을 보면서 마지막 결전의 순간을 짐작했다.
올림푸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준비가 되었다.
승부처였다.
유진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잠깐만.”
반대편 저쪽에서도 차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저건?!”
나타난 차원 문에서는 다른 존재들이 넘어왔다.
이들은 올림푸스를 지지하는 성운에서 온 지원군들이었다.
“우리랑 같은 전략이었어.”
유진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도 3단계 신화의 재단을 만드는 순간을 승부처라고 여겼다.
그때 예비 병력까지 투입해서 총공세를 펼친다.
서로 똑같은 작전을 준비했다.
“엄청 많잖아.”
이소민은 화들짝 놀라서 저 멀리까지 쳐다봤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병력이 나타났다.
우리에 비해 최소 10배는 넘는 대규모 군대였다.
지휘는 아스가르드의 최고위 신좌 프레이가 맡았다.
“프레이라면 토르에 비견되는 신.”
<승리의 검을 사용하는 검신>
프레이가 전장에 섰다.
그는 토르의 묠니르와 더불어 아스가르드를 대표하는 명검의 주인이고, 전투의 신이기도 했다.
“와, 이거 제대로 붙겠는데?”
이소민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전쟁.
양측의 대병력을 집결시켜 결전을 앞두었다.
가짜 지구에서 가져온 신화의 재단이 마련되자 3단계가 마무리되었고, 4단계를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4단계는 ‘재단에 봉하는 불’
-신화의 재단에 성스러운 불을 지피면 종말의 신화, 라그나로크가 완성됩니다.
-성스러운 불을 만들려면 바람의 숨결과 지옥의 불씨를 얻어야 합니다. 해당 재료가 있는 성운에 가서 가져와야 하고, 두 개의 재료가 모이면 100일 후 완성됩니다.
-최종 4단계가 이뤄지면 모든 과업이 완성되며, 종말의 신화가 실현된 성운은 소멸합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성운전.
최후의 과제가 시작됐다.
“불씨도 가져왔어요.”
에어리스가 양손에 성스러운 불씨를 들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미 우리에게 있었다.
“승부는 이제부터…….”
전장에는 전운이 드리웠고, 모든 것을 건 양대 세력이 마침내 최종 결전을 개시했다.
함대에서 쏟아지는 포격.
자욱한 먼지와 파편.
고함과 함성이 뒤섞인 곳.
신좌와 인간.
모든 것이 뒤섞인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저 불을 막아.”
결국 종말의 신화가 열리느냐 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재단에 봉하는 불’을 둘러싼 사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에어리스가 불씨를 가지고 나아가려는데 무수한 적들이 나타나서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아아!”
개미 떼처럼 몰려든 적들을 뚫고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포위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놔라.”
프레이가 직접 나타났다.
그가 가진 ‘승리의 검’은 스스로 적을 베어 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토르의 묠니르에 비견되며,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큭!”
승리의 검이 에어리스에게 몰아쳤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어서 막아 내려 했지만, 검의 궤적이 변화무쌍했다.
절대 막을 수 없는 검이었다.
“아악!”
어깨와 다리를 베이자 에어리스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진 그녀를 보면서 프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희가 감히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프레이의 신격이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여긴 너희들의 무덤이 될 거다.”
전투의 신, 프레이가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발휘하며 인간들의 종말을 예고했다.
“허억, 허억.”
에어리스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추슬렀다.
하지만, 이 전투는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벌써 쓰러진 거니?”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어리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았을 텐데?”
희미한 그림자 속에 나타난 초월좌.
에어리스의 어머니, 시오가 나타났다.
“어머니……?”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의 등장에 에어리스는 크게 놀랐다.
담담한 쪽은 오히려 어머니였는데, 그 옆에 쌍둥이 언니 레다까지 함께 있었다.
“둘 다 정말 살아 있는 건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바라봐도 시오와 레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
허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었다.
“미안. 어쩔 수 없었어.”
레다가 짧게 소감을 밝혔다.
“지금 순간을 기다렸단다.”
시오는 종말의 신화가 열리는 미래를 보았다.
그 대가로 소멸할 운명에 처했으나 기적처럼 살아났다.
“명부가 도와줬어.”
명부는 죽음을 관장했다.
그래서 명부의 바리데기는 시오와 레다가 소멸하기 직전에 두 사람을 구해 줬다.
“유진하가 미리 얘기해 둔 거였지.”
시오의 죽음.
그 운명을 피할 유일한 길은 단 하나였다.
‘명부의 성화와 바리데기의 힘.’
바리데기가 둘의 영혼을 거둬서, 소멸하지 못하도록 성화의 빛과 숨결의 힘을 계속 불어넣어야 했다.
“돌아올 때가 지금이었어.”
모두가 패배하고 멸망하는 미래를 보았다.
시오는 그 종말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 다시 나타났다.
귀혼검의 본래 주인이 나타나자, 에어리스는 검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내가 나서마.”
시오는 귀혼검을 쥐었다.
익숙한 검의 이명이 느껴졌다.
“상대는 최강의 신좌구나.”
프레이는 전투의 신이자 검술의 신이었다.
‘승리의 검’은 아스가르드 최강의 무기였고, 라그나로크조차 막아 버릴 힘이 있었다.
“이 싸움… 내가 맡겠어.”
시오도 <신멸의 구도자>였다.
<승리의 검을 사용하는 검신> 프레이가 상대라면 이번 전장에서 가장 어울리는 적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대결이었으니까.”
시오와 세쌍둥이는 작은 별에 살았다.
언젠가 신좌들을 멸하고 성운전을 끝내기를 갈망하면서 수련해 왔다.
긴 세월, 긴 외로움.
그렇게 버티던 나날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이제 내 손으로 이루겠어.”
시오의 기세가 격렬하게 치솟았다.
<신멸의 구도자>를 넘어서 진정한 힘을 발현시켰다.
초월격
<황혼의 구도자>가 개방됐다.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에 강림한 <황혼의 구도자> 시오가 나타났다.
그녀는 종말의 신화를 이끄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너희 신좌들을 모조리 하늘에서 떨어뜨리겠어.”
귀혼검을 들어서 하늘에 있는 프레이를 겨냥했다.
모든 신좌에게 하는 경고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종말의 시간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