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종말의 신화전(2)
“하암.”
유나가 하품을 하자, 마치 전염되듯이 다른 사람들도 입이 늘어지도록 크게 벌렸다.
“가만히 있으려니까 졸리네.”
1단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두보 마련을 해야 했는데, 중요한 점은 누가 리더인지 들키지 않고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모두가 리더인 척하는 수밖에 없네요.”
리더는 두 다리로 서서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야 교두보가 마련이 되는데, 실수했다가는 리더의 정체가 밝혀진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리더처럼 보이려면 똑같은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죠.”
<천재지변의 책략자> 제갈공명도 같은 의견이었다.
리더를 숨기려면 전부 리더처럼 행동해야 했다.
“결국 모두가 같이… 하루 동안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의견은 없었다.
리더가 죽으면 지는 게임에서, 리더의 정체는 반드시 숨겨야 했기에.
“그래서 따분하더라도 같이 좀 기다려요.”
하는 수 없이 전원 집합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심심하다.”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서로 재밌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으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 헬라가 음습한 목소리로 과거에 있었던 얘기를 할 적에는 공포 분위기로 바뀌기도 했지만.
“저게 뭐죠?”
에어리스가 먼 곳에서 낯선 기색을 발견했다.
일행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할 즈음에 수상한 기색은 아우라를 발휘하며 나타났다.
“누가 온다.”
유진하도 알아차렸다.
모두가 그 강대한 기운의 정체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올림푸스, 아스가르드의 연합 성운에서 최초로 나타난 신좌가 분명했다.
“…긴장해라.”
조커는 짧은 말을 하며 상대방을 예의주시했다.
접근만으로 모두에게 위압감을 주는 강대한 존재는, 하얀 망치를 든 아스가르드 최고위 신좌 중 하나인 토르였다.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그가 대지에 내려앉았다.
“너희들이 라그나로크를 연 녀석들이냐?”
짙게 깔리는 먼지와 파편 속에서 듬직한 체구의 신좌가 눈빛을 번개처럼 번뜩였다.
“토르, 너냐?”
헬라가 낯이 익다는 듯 바로 웃음을 지었다.
같은 오딘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이제는 서로 대적하는 신좌로 만나게 되었다.
“후후, 누님이 올 줄은 몰랐는데?”
토르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져 갔다.
헬라는 아스가르드에서 추방된 신좌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오딘의 뜻에 따라 전부 가루로 만들어 버리려고 왔다.”
“그 무식한 망치로 말이야?”
번개가 서린 망치.
묠니르라 불리는 이 무기는 성운전에서 가장 유명한 장비였다.
물론 헬라는 토르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없었다.
“너는 <두려움이 없는 번개> 신좌로, 나는 <지옥의 여왕>이 되었다.”
“누님한테는 가장 음침한 기운이 있어. 누가 봐도 지옥에 가장 어울리잖아.”
토르가 도발을 걸었다.
일부러 싸움을 걸듯이 최대한 건들건들 고개를 흔들었고, 건방지게 다리를 떨었다.
“헬라, 도발에 넘어가면 안 돼요.”
유진하는 서둘러 헬라를 제지했다.
다행히 헬라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아마 평소의 헬라 성격이라면 바로 달려들어서 싸웠을 것이다.
지금은 이를 악물고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아버지한테서 묠니르도 나만 받았지.”
토르는 헬라가 가장 싫어할 만한 말을 계속 걸었다.
묠니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확실히 헬라의 신경을 건드렸다.
“토르, 약을 올리려고 온 거냐?”
“후후. 어떤 생각일까.”
토르는 아스가르드 성운에서 가장 많은 신화를 만들었다.
강력한 상대와 겨루기를 좋아했고, 사건을 일으키며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곤 했다.
아스가르드 신화의 중추를 담당하는 신좌였다.
그런 토르가 혼자 왔고.
섣불리 싸울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서 계속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누님이 그렇게 석상처럼 가만히 있으니까 심심하네. 무슨 기념비라도 되었어?”
“이 녀석!”
헬라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옥에 버려진 후 굴욕과 모멸감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힘겹게 돌아와서는 토르에게 놀림이나 당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토르, 너는 진짜 곱게는 안 죽일 거야.”
“그 꼴로 가능하겠어?”
묠니르가 확 날아왔다.
헬라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망치를 한 손으로 받아 냈다.
망치에서 터지는 번개의 위력이 사방에 감돌았다.
“진짜 못 참겠다.”
정전기처럼 퍼지는 번개의 자욱이 느껴지자,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헬라가 분노를 터트렸다.
“이거 돌려주마.”
묠니르부터 다시 던져 버렸다.
토르는 가볍게 망치를 받아서 여유를 부렸다.
“누님, 실력 좀 보자.”
“원한다면 죽여 줄게.”
헬라가 마침내 두 발을 대지에서 떼었다.
리더가 아니라는 표시였다.
“어쩔 수가 없군요.”
제갈공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작전에서는 호흡이 중요했다.
마치 체스와 비슷하다.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말들이 필요한 법이다.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판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리더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는 자기 진형을 무너뜨리게 되죠.”
제갈공명이 탄식했다.
“진형이 무너지면 팀이 무너지고요.”
화답하듯이 유진하가 대답했다.
작전대로 진행하려면 호흡이 중요했는데 쉽지 않았다.
“신좌의 제어란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천재지변의 책략가> 제갈공명은 백우선을 흔들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헬라는 이미 전투에 들어갔고,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강대한 토르를 상대로 서로의 신격을 겨루듯이 산을 무너뜨리며 싸움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유진하의 눈빛은 차분했다.
“예상했던 것 아닌가요?”
어차피 지옥도의 신좌들이 완벽하게 따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헬라가 토르를 막아 준다면 그것도 괜찮은 거죠.”
토르는 아스가르드의 가장 강한 신좌 중 하나였다.
헬라급은 되어야 맞상대할 수 있었다.
“상대의 가장 좋은 말을 우리의 말로 상대한다.”
장기나 체스에서는 상대의 같은 말과 교환하는 수가 있다.
토르 대 헬라.
이 둘은 서로 격돌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고, 사실 유진하와 제갈공명의 예측 범위 안에 있었다.
“헬라가 리더는 아니라는 걸, 초반에 들킨 게 아쉬울 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쉬움이 남았지만 헬라는 자신의 본분을 완전히 잊지 않았다.
“1단계에서는 나 혼자 싸우겠다.”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드는 나머지 세력들이 보이자, 헬라가 강하게 투지를 불태웠다.
“얼마든지 와라.”
그들은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가 키운 정예 병력들이었으나 최상위 신좌인 헬라의 기세를 뚫을 수는 없었다.
“누님은 나부터 신경을 써야 해.”
하지만 토르가 아무리 묠니르 망치를 휘둘러도 헬라의 신격은 깨버릴 수 없었다.
“쳇!”
헬라는 검은빛 아우라의 거대한 날개를 배후에 발현시켰고, 사방에 검은 그림자를 퍼뜨렸다.
무수히 솟아난 헬라의 그림자들이 군대처럼 진영을 이루고, 덤벼드는 적들에 맞섰다.
그림자 병력 대 연합 성운의 군대.
헬라, 그녀는 혼자서 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분노하는 지옥의 눈>
그림자 병력과 겨루던 적들은 헬라의 눈동자에 닿자마자 팔다리에 족쇄가 채워졌다.
헬라 혼자서 수만의 적을 압도하고 있었다.
“과연 누님인가?”
강대한 헬라의 전투력을 직접 보자 토르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번졌다.
“역시나… 라그나로크의 신좌.”
이제는 토르도 불사가 아니었다.
이번 싸움에서 지면 그도 죽는다.
‘죽을 수도 있다.’
성운전에서 불사를 유지하던 때와 달라졌기에, 토르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하하,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구나.”
묠니르를 들고 적의 머리를 무참히 후려갈기던 토르.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져 나가는 적을 보면서 만족하던 난폭한 그였다.
문제는 헬라가 토르보다 더한 상대라는 사실이었다.
“동생아? 어떠냐?”
헬라를 끌어내는 작전은 통했으나, 예상보다 그녀의 아우라는 막강했다.
헬라의 붉은 눈동자.
저 시선에 닿으면 어떤 존재라도 족쇄가 채워진다.
“크윽!”
토르조차 그 저주의 힘에 얽매이고 있었다.
“역시 종말의 신화답구나.”
이대로 가면 토르도 봉쇄당할 수 있었다.
“좋다. 그렇다면 승부를 보자.”
<두려움이 없는 번개>
토르는 번개를 전신에 둘렀다.
묠니르에는 번개를 증폭시키는 힘이 있었고, 증폭된 번개의 자락은 하늘을 뒤덮었다.
<번개의 형상>
마치 우월한 신의 형체처럼,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번개의 신이 강림했다.
“좋다. 승부를 보자.”
토르는 자신의 육체를 거대한 번개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헬라의 붉은 눈은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를 족쇄 채울 수 있지만, 생명체에게만 작동한다.
<번개의 형상>처럼 소환된 형체에는 작용하지 못했다.
“귀찮은 동생이구나. 내 능력에도 나름 대응할 준비를 했어.”
어차피 아까 공격하던 아스가르드의 군대는 모조리 족쇄에 묶어 놓아 괴멸된 상태였다.
사방에 흩어 놓은 자신의 그림자들을 모아서 토르의 번개 형상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정면에서 붙자.”
토르 대 헬라.
아스가르드에서 오딘의 핏줄이었던 두 명은 전력으로 격돌했다.
‘나도 안다. 내가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헬라는 멋대로 움직였지만, 교두보를 마련하는 싸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목적은 토르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목표는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를 이루는 거야.’
자존심이 강한 헬라였기에 목적의 본질까지는 잊지 않았다.
어차피 도발에 넘어갈 거라면, 본인이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각오를 다진 뒤였다.
“아마 누님은 여기서 결말을 보고 싶겠지?”
번개의 형상으로 발현된 토르도 이미 헬라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님이 당하는 거야.”
헬라의 기세는 기본적으로 저주에 속하는 힘이었다.
순수 무력.
전투력에서는 토르가 훨씬 막강했다.
<초대형 묠니르>
번개의 형상이 감돈 묠니르 망치가 대지를 내려칠 듯이 거대해졌다.
“누님에게 선택권을 주겠어. 이 망치를 피하거나…….”
번개의 형체가 된 토르의 눈빛이 슬며시 옆을 바라봤다.
“아니면… 저 밑에 있는 녀석들에게 작렬하거나.”
1단계 교두보를 만들려고 둘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던 원정대가 있었다.
토르의 목적도 헬라와 결판을 내는 게 우선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종말의 신화를 끝내 버리는 거다.”
토르도 본분을 잊지 않았다.
종말의 신화를 이루려는 헬라처럼, 토르는 어떻게든 막아 내야 했다.
“라그나로크는 이 일격으로 끝난다.”
리더를 숨기려다가 토르를 너무 근접까지 접근시킨 게 실수였다.
묠니르 망치는 근접전에서 최강에 속하는 무기였기에, 어떻게든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해야 했다.
“토르가 제일 먼저 올 거라고는 예상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저 일격의 묠니르는 절대 피할 수 없어요.”
유진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시작부터 원정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번개의 형상을 두른 묠니르의 위세는 하늘을 뒤틀어 버릴 수준이었다.
저게 내려친다면 대지를 짓뭉개 버리고 완전히 파괴시킬 것이다.
“끝장이다.”
토르가 소리쳤다.
지상 최대의 묠니르가 하늘에서 단 한 번의 일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