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결전 준비(9)
무수한 회귀의 잔재들이 집결했다.
“형이 살아온 흔적들…….”
유진하는 이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항상 자기 자신의 흔적에게 쫓겨야 했던 유성하.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들도 유성하의 본체의 안전을 우선시했다.
회귀자가 살아온 흔적인 이들은, 본체를 위협하는 강력한 적이 나타나면 그 녀석부터 먼저 제거하려 한다.
“간다.”
모든 유성하가 일제히 기운을 발휘했다.
초월격 <검강의 방어>
전원이 같은 힘을 사용하며 시오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와라.”
시오는 차분하게 바라봤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유성하들을 바라보면서 귀혼검과 자신의 기운을 가다듬었다.
하나씩.
정확하게 검을 휘둘러서 회귀의 잔재들을 베었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
<검기의 화신>
신격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 절반.
모든 힘을 모아서 유성하 무리와 맞섰다.
“하아아압!”
<검기의 화신>이 아우라로 이뤄진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회귀의 잔재가 연이어 터져 나갔다.
유성하들은 <검강의 방어>를 둘렀으나, 초월격과 신격이 융합된 시오의 힘에는 맥없이 뚫렸다.
“방어는 포기한다.”
모든 유성하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어차피 통하지 않는 방어라면… 차라리 모든 힘을 공격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공격에 집중하지.”
회귀자 유성하의 <검강의 방어>는 어디까지나 무의미한 죽음을 막아서 불필요한 회귀를 줄이려 획득한 방어적인 성격의 힘이었다.
따라서 확실한 공격이 필요한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초월격
<일도양단>
하나의 검이 만물을 두 개로 갈라 버린다.
무엇이든 가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검이 이 힘을 버티지 못해 사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반적인 검이 아닌 지금 손에 쥔 검붉은 검처럼 강인한 검만이 이 힘을 버틸 수 있었다.
-파마의 영검
신좌와 초월좌의 방어를 뚫고 베어 버릴 수 있다.
파마의 영검과 초월격 <일도양단>.
이 두 개를 가진 유성하는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었다.
“무수한 회귀를 하면서 의미 없는 죽음은 맞이하지 않았다.”
항상 절망적일 만큼 강한 상대가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여겨지는 시오를 비롯해, 지옥의 여왕 헬라 같은 강적들이 있었다.
“죽고 또 죽었지만 계속 도전했다.”
더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갔다.
동시에 반복적인 대결을 하면서 상대의 공격에 차츰 익숙해졌다.
“그 패턴.”
시오는 강해졌으나, 그녀에게도 버릇이 있었다.
휘두르는 검에 일정한 궤적이 있었다.
신좌를 상대하는 검술과 <검기의 화신>을 가졌어도, 유성하는 이미 수도 없이 싸워 온 덕분에 익숙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다.”
회귀의 잔재들은 모두 유성하였다.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인생을 걸었고.
같은 감정을 받았다.
“알고 있다.”
시오의 기세가 훨씬 막강해졌더라도 이미 익숙한 궤적이었다.
쏟아지는 그녀의 검기를 마치 공략법을 외운 듯 피해 갔다.
“큭!”
시오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유성하를 처음 만났지만, 이들은 자신과 숱하게 싸웠을 것이다.
‘내가 어디로 공격할 것이고, 어떤 버릇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어.’
시오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회귀자를 상대로는 변수를 만들기 어려웠다.
지금껏 휘두르는 자신의 검술이 있었는데, 변화를 주려고 무리하게 비틀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상대는 유성하, 무수히 많은 회귀를 반복한 회귀자다.’
시간을 거슬러 무수한 실전을 거치며 단련된 실력자였다.
가볍게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강하다.”
무수하게 달려드는 유성하들.
두려울 정도로 겁이 없었다.
“상황을 바꾸겠다.”
시오는 결심했다.
회귀의 잔재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자, 시오의 강대한 힘으로도 버틸 수 없었다.
하늘에 균열이 생기듯.
서서히 시오의 격이 무너지고 있었다.
“좋아.”
이대로 가면 자신이 먼저 무너진다.
‘역으로 승부를 걸겠어.’
전략을 바꿨다.
회귀의 잔재들은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목숨을 내던지며 덤벼들고 있는데, 여기서 과감하게 힘을 빼 버리면 어떨까.
자신에게 몰려들던 회귀의 잔재들은 강대한 위협이 사라졌다 생각하며 다시 자기들끼리 내분에 휩싸일 것이다.
본체 유성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본체를 노릴 거다.
‘무수한 저 유성하들 중에서 진짜를 찾을 수도 있어.’
힘을 줄인다.
그게 시오가 선택할 역전의 방법이었다.
‘해 보겠어.’
시오는 결단을 내렸다.
무섭게 뒤덮던 초월격의 힘을 순간적으로 없앴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던 검은 기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큭!”
달려들던 유성하 무리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오의 아우라가 갑자기 사라지자, 다들 행동을 멈춘 것이었다.
“우으으.”
회귀의 잔재들은 명령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었다.
본질은 육체를 잃고 진짜 본체를 갈망하는 자들이었다.
시오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본능적으로 본체를 원했다.
“크으으.”
회귀의 잔재들은 고요히 기다렸다.
그들은 본체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서서히 고개를 돌려 진짜 유성하를 쳐다봤다.
“저기인가?”
시오도 그들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회귀의 잔재 속에 숨어든 진짜 유성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뒤바뀌고 있었다.
“나를 노린다?”
유성하도 그제야 눈치챘다.
앞으로 나아갔던 밀물들이 어느새 썰물이 되어 돌아오듯이.
회귀의 잔재들은 시오가 아니라, 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카앙.
초월격의 힘이 실린 검격이 무수히 쏟아졌다.
회귀의 저주처럼 남은 잔재들은 다시 유성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강의 방어>
유성하는 회귀의 잔재들의 공격을 방어의 초월격으로 받아 냈다.
다행히 회귀의 존재들은 시오를 상대하느라 힘을 많이 소모해 자신을 압도할 기량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힘은 진짜 유성하에 비해서 약간씩 약했는데, 힘까지 많이 소모한 상태다 보니 숫자가 많아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거였다.
시오가 바람처럼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파고든다?!”
돌진은 한 줄기 번개처럼 빨랐다.
회귀의 잔재들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 시오가 공격을 날렸다.
피할 여력이 없었다.
유성하에게 검날의 끝이 다가왔다.
콰직.
피와 살을 꿰뚫는 소리.
유성하를 노리는 일격이 작렬했다.
“어?”
귀혼검은 누군가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유성하는 아니었다.
“왜 네가?”
귀혼검에 맞은 사람은 레다였다.
시오는 자기 손으로 첫 번째 딸을 찌르고 말았다.
“허억.”
레다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 역할은 유성하와 함께 싸우는 것…….”
유성하의 여정에서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은 레다와 에어리스 쌍둥이 자매였다.
이번 회차에는 달랐다.
에어리스는 유진하의 곁으로 보내 버렸고, 레다만이 유성하와 함께했다.
“내 역할은 유성하에게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
목숨을 대가로 기회를 한 번 더 마련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어머니 시오에게서 탈출했을 적에, 레다와 에어리스는 수없이 위기에 빠졌었다.
그때마다 유성하가 나타나서 두 사람을 구해 주고, 성장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성운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준 은인이었다.’
유성하와는 가족처럼 살았다.
언젠가 목숨을 살려 준 보답을 하려 했고, 레다 자신이 대신 죽어 줄 마음도 먹었다.
‘지금이 그때.’
지상에 있을 적부터.
에어리스와 유나가 모르게 준비하고 있었다.
‘유성하를 지킨다.’
시오의 검이 결국 레다의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레다?!”
자신의 딸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시오는 얼른 양팔로 받아 주었다.
“어머니?”
레다는 시오의 품에서 헐떡였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내려앉았다.
“…….”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비통한 절망이 감돌기 시작했다.
“언니……?”
밑에서 지켜보던 에어리스와 유나의 표정도 잿빛으로 변해 갔다.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를 앞두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레다의 생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수고했다. 그만 쉬렴.”
시오는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 가는 레다를 바라봤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회귀의 잔재들이 덤벼드니, 유성하는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유진하, 여기서 나가라.”
“형?”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의 시오는 누구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시공간은 곳곳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여기는 무너질 곳이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붕괴된다. 이제 나가야 해.”
레다의 죽음이 번지고 있었다.
유성하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터였다.’
유진하도 알고 있었다.
회귀자는 이미 수없이 레다와 에어리스의 죽음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에 익숙했다.
하지만, 감정까지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뚝뚝.
유성하의 볼에서 물이 흘렀다.
“죽음은 무수히 봤지만, 레다의 죽음을 보면 항상 마음이 무겁다.”
처음으로 그의 어깨가 떨렸다.
유성하는 망설일 기회도 없었다.
카앙.
감정이란 없는 회귀의 잔재들이 검을 벼락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차원 문 개방.”
차원 문을 개방시켰다.
아까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유성하는 차원 문을 열어서 다시 나갈 생각이었다.
“같이 가자.”
“형?”
유성하가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라그나로크가 열릴 거야. 마지막 힘을 모을 때가 되었어.”
“…….”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형의 뒷모습만을 보던 어린 동생이었으나, 이제는 엄연히 달라졌다.
“너의 힘이 필요하다.”
유성하가 재촉했다.
하지만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진하?”
“…….”
형의 제안을 받았다.
드디어 동생이 아니라 하나의 파트너이자 동료로서, 형에게 인정받았다는 소리였다.
“나는 여기 남겠어.”
“뭐?”
유진하의 결정은 예상외였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었던 형의 제의를 거절했다.
“형에게서 인정받은 것은 좋지만, 나는 이제 예전과는 달라졌어.”
“성장한 걸 말하는 거냐?”
“아니.”
자신만의 성장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더 중요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동료도 있고, 파트너도 있고, 협력자도 있었다.
“나는 원정대의 리더야. 누구도 두고 갈 수 없어.”
마음을 굳건하게 다졌다.
리더가 되어 이 싸움의 마지막까지 동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가.”
동생 유진하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래서 더는 권유하지 않기로 했다.
“알았다. 너의 뜻대로 해라.”
유진하는 스스로 모든 과정에 참여했고, 회귀자가 못 해낸 과업을 이뤄냈다.
‘유성하의 길과 유진하의 길.’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였기 때문에 형은 동생을 믿기로 했다.
“에어리스와 유나를 부탁한다.”
세쌍둥이 자매 중 남은 두 사람의 안위도 유진하에게 맡겼다.
그렇게 유성하는 차원 문 너머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형…….”
회귀자가 사라지자, 잔재들도 다시 차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귀자의 운명.
회귀할 때마다 잔재들이 남아 영원히 자기 자신을 쫓아다닌다.
자신과의 끝없는 숨바꼭질을 반복하는 운명이었다.
“종말의 신화에서 다시 만나겠지.”
다시 만난 형과의 이별.
그리고…….
쓰러진 레다를 끌어안은 시오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처럼.
그렇게 숨죽이고 있었다.
“어머니, 언니.”
에어리스와 유나는 감히 그쪽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잔상만이 드리운 이곳.
“…….”
어머니와 레다는 무너져 가는 시공간의 잔해 속에 남았다.
“가자.”
유진하는 에어리스와 레다만을 데리고 공간의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겨진 두 사람.
시오와 레다는 결국 시공간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