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결전 준비(6)
“신좌들의 죽음. 나는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어.”
시오는 자신과 만났던 신좌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는 기쁨을 주었고.
그녀에게 세 아이를 가지게 한 보람을 주었으며.
마지막에는 깊은 상처를 주었다.
“신좌들은 나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지.”
너무나 믿었기에 배신당했을 때의 아픔을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잿더미에서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는 결심으로 살아왔다.”
세쌍둥이 자매를 낳은 후에 그 결심은 확고한 결의가 되었다.
“끝없이 다짐했어.”
버려진 자신과 아이들.
외로운 행성, 그곳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세 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신좌들을 철저히 무너뜨릴 날만을 기다렸다.
“지금…….”
시오의 기세가 완벽하게 개방됐다.
지금의 시오는 3회전의 시오와 수준이 달랐다.
지옥도를 거치면서 막강한 적들을 쓰러뜨린 그녀의 성장세는 누구보다 빨랐다.
시오의 귀혼검이 빛의 자락을 잘랐다.
“진하!”
에어리스의 외침조차 들리지 않았다.
뒤틀리는 시공간의 요동에 모든 소리가 묻혀 가고 있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유진하와 어머니.
에어리스는 소중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가 끼어들 때가 아니야.”
세 자매의 맏언니 레다는 에어리스가 나서지 못하도록 어깨를 부여잡았다.
놀란 에어리스가 쳐다보자 레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다 언니?”
레다의 눈빛은 서글펐으나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고요했다.
“어머니는 이미 결단을 내렸어.”
레다는 별자리로 점지한 기운을 어머니에게 알려 줬다.
어머니 시오는 불길한 미래에 대해 듣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종말의 신화의 미래를 엿보기로 결심했다.
‘미래시’였다.
“어머니가 외로운 행성에서 홀로 버티며, 그토록 기다려 왔던 종말의 신화야.”
“레다 언니.”
“오늘 어머니는 사라질 거야. 그리고 나에게 알려 줬어.”
레다는 어머니에게서 신화의 미래를 들었다.
그래서 모두의 미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미래를 들었고, 앞으로의 계획도 결정했어.”
미래를 안다면 바꿀 기회도 있다.
시오는 자신의 목표였던 신좌들의 종말을 위해서 자신마저 버렸다.
“지금이 그 순간이야.”
지켜보던 에어리스와 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두 사람만의 싸움이 아니라, 모두의 미래가 걸린 대결이기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아야 했다.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허억, 허억.”
빛의 자락이 사라진 유진하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부서지는 시공간의 파편 아래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반면 지옥도에서 무수한 적을 참살시킨 시오의 기세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다른 기운도 있어.”
시오의 육체에는 72악마의 주인도 잠재된 상태였다.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
악마들의 신 혹은 마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기운이 그녀의 기운에 조금씩 묻어나오고 있었다.
<신멸의 구도자>의 기운에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의 기운이 뒤섞인 것이다.
초월격과 신격의 조화.
시오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있었다.
“크윽!”
헤라클레스를 제압한 성화의 빛으로도 시오와 악마 신의 초월격에는 버틸 수 없었다.
콰아아.
미친듯한 검기가 어두운 저편에서 무수히 날아오고 있었다.
어슴푸레 보이는 검격은 압도적인 공포처럼 다가왔다.
찰나의 시간.
셀 수 없을 만큼 겹겹이 쌓여 가는 검기가 계속 늘어났다.
무수한 검의 세례가 피할 수 없는 궤도로 날아왔다.
검날이 사방을 완전히 포위하듯 날아오자, 유진하는 바늘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한 검기망에 몰렸다.
“피할 곳은 없어졌다.”
체스에서 최후의 한 수.
체크메이트를 앞둔 순간이 되었다.
“마지막 하나의 검.”
시오는 마지막 검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짓 한 번이면 유진하는 작은 빛조차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꿰뚫릴 터였다.
“…….”
정적과도 같은 시간.
긴 흐름처럼 느껴졌으나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할 짧은 순간이었다.
“종말의 신화는 다른 미래로 가야 해. 네가 없어지면 바뀔 거야.”
미래를 바꾸길 원하는 그녀.
끝 언저리에 도달한 순간에서 마침내 검격을 내던졌다.
마지막 검이 검기망에 갇혀있는 빛을 향해 나아갔다.
“끝이다.”
지평선을 가르듯이 쾌속으로 날아와 유진하에게 정확히 작렬했다.
그 순간.
마치 우주에서 별이 소멸하듯이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막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무수한 파편들이 흩어졌다.
별의 부스러기처럼.
부서진 잔해처럼.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다.
“진하!!”
에어리스의 비명이 공허한 공간에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빛처럼.
섬광처럼.
별빛의 최후처럼.
빛은 긴 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슥슥.
한 사람이 단검의 칼날을 팔꿈치 사이에 닦았다.
백가면을 얼굴에 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상대를 베어 버렸다.
원체 혼자 활동하는 걸 좋아해서 단독으로 행동하는데, 지금도 홀로 다른 성운에 들어와 있었다.
“젠장, 네 놈은 누구냐?”
전설급 성운.
뱀파이어의 세계는 난데없이 나타난 단 한 명의 존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를 멸하려고 온 자이다.”
조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인간 성운에서 왔다는 사실도 숨겼다.
“너희가 라그나로크에 참가할 거라고 알고 있다.”
종말의 신화.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는 연합 성운이 되었고, 남은 성운들은 어느 한 편을 들 수 있었다.
물론 관망할 수도 있으나, 그랬다가 결말이 났을 때 승리한 성운의 보복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한쪽을 선택했다.
“뱀파이어는 올림푸스와 유력한 동맹 관계지.”
라그나로크 개최까지 6개월 가량이 남았다.
적이 될 성운은 미리 가서 제거하는 편이 유리했다.
“그래서 너희를 모조리 궤멸시켜서 종말의 신화에 끼어들지 못하게 막을 거다.”
단독으로 잠입한 조커.
마치 암살자처럼 쌍단검을 쥔 채로 뱀파이어 성운에 혼자 나섰다.
“크윽!”
뱀파이어는 전설급 성운이고 실제로도 준신화급 성운에 해당했다.
하지만 조커는 그곳에 홀로 들어가서 그야말로 학살에 가까운 신기를 선보였다.
“다들 뭘 하는 거냐. 침입자는 겨우 한 명이다.”
뱀파이어들은 무리지어 조커를 상대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일지라도 상대는 조커였다.
피범벅이 된 양복과 백가면을 쓴 조커의 살벌한 모습을 보자, 뱀파이어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주춤주춤.
자기도 모르게 물러날 뿐,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먼저 오지 않겠다?”
조커의 입가가 미소로 번졌다.
저들은 무수한 뱀파이어의 사체와 파편 속에서 홀로 선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포에 전염된다.
승자가 압도적인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가 가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검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조커의 단검이 뱀파이어의 목을 갈랐다.
“크윽!”
그들은 피로 이루어진 존재였고, 단칼에 죽지 않았다.
애초에 뱀파이어는 피를 전부 소모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난격.”
조커의 칼날이 무수히 번뜩였다.
갈가리 찢어 버리듯 상대의 육체를 조각으로 갈라 버렸다.
피를 소모해서 육체를 회복할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많은 피를 소모하게 된다.
“너희 힘의 원천인 피가 무한대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무한이 아니면 결국 피는 말라 버리고 만다.
그것이 뱀파이어의 죽음이었다.
“크으으윽!”
또 하나의 뱀파이어가 결국 모든 피를 소모하고 죽었다.
조커가 베어 버린 단검의 자국은 그사이에 적어도 300번은 되었다.
계속 베어 버리면 뱀파이어는 피가 말라 버려서 결국 소멸하는 것이다.
“후우.”
조커의 호흡이 잠깐 흐트러졌다.
숨을 한 번 돌리더니 전신의 아우라를 처음과 변함없이 유지했다.
“수라 같은 자다.”
뱀파이어들조차 조커의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
무수한 피의 바다와 시체 속에 우두커니 선 악귀.
수라의 길에 들어선 자.
<삶과 죽음의 경계선>
초월격
<죽음의 경계를 비웃는 자>
두 개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지금의 조커는 웬만한 신좌와 충분히 겨룰 만큼 막강한 초월좌가 되었다.
천재적인 전투 센스.
죽음을 넘어선 사투에서 끝없이 싸우는 투사.
“남은 시간에 하나씩 결판을 내겠어.”
유진하의 대전략에서 조커에게 부여된 임무는 간단했다.
‘유력한 성운에 가서 연합을 맺거나 아니면 처리하라.’
단독 결정권을 부여했다.
전권을 위임한 것과 같았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조커는 처음에 오자마자 뱀파이어에게 대놓고 선언했다.
복종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전설급 성운에 홀로 들어가서 호기롭게 선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피로 물든 단검과 양복과 곳곳에 핏자국이 번진 백가면.
살의에 찬 아우라로 가득한 초월격.
결과는 학살이었다.
지력 : S
전투력 : EX
민첩 : EX
정신력 : SSS
체력 : S
부족한 평가를 받은 체력에서도 점점 성장해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일반 뱀파이어로는 상대가 안 되니 결국에는 성운의 주인이 나서야 했다.
“내가 뱀파이어 성운의 모든 가문을 아우르고 있는 가주다.”
망토를 두른 하얀 피부의 남자가 격식을 갖춘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창백한 피부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곱상한 외모와 깊은 눈매를 가진 자가 붉은 피를 머금으며 나타났다.
“드디어 나타났나?”
조커는 처음부터 공간의 주인을 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싸움도 좋고 학살도 괜찮지만, 다른 성운에도 가야 하니 시간이 부족했다.
단숨에 성운을 끝내려면 주인을 없애는 편이 나았다.
“이름은……?”
가주가 순순히 밝혔다.
“뱀파이어의 주인은 드라큘라라고 불린다. 그쪽은?”
“…무명이라고 해 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잠시 후, 두 개의 초월격이 격돌했다.
죽음의 경계선을 오가는 조커.
피의 주인 드라큘라.
그들의 승부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피와 단검.
미친 듯이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승부가 이어졌다.
* * *
마지막 칼날을 받은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귀혼검을 든 시오가 모든 결말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빛은 저물 것이고 끝이 왔다고 여겼다.
유진하는 그렇게 최후의 기억을 가졌다.
하지만, 그 검은 유진하에게 닿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앞에 있었고, 시오의 검격을 받아 냈다.
“당신은?”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초월좌 시오의 검격을 받아 내다니.
당연히 보통의 인물은 아닐 터였고, 이 힘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형?”
항상 지켜봤던 뒷모습.
어릴 적부터 항상 유진하의 앞을 나아가던 사람이었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
그가 얼굴을 돌리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잘 버텼다.”
그의 말은 따사로운 햇살처럼 따뜻했다.
회귀자 유성하였다.
“이제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라. 그럼 너도 저 여자처럼 신화의 저편에 매몰되어 사라지는 존재가 될 테니까.”
유성하가 이곳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