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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212화 (212/229)
  • 212화 결전 준비(5)

    백지상태의 시공간.

    어제는 시오와 세 쌍둥이 자매가 여기서 수련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하얀 코트를 입은 유진하가 함께했다.

    “정장 스타일의 옷이 분위기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유진하가 몸을 풀며 말을 걸었다.

    시오는 평소 입던 하얀 도복이 아니라 어제 산 정장을 쫙 빼입었다.

    옷을 바꿔 입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잠깐 입은 거야. 원래 옷은 수리를 맡겼고.”

    옷을 수선하는 게 아니라, 수리한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예전 도복이 보통 옷은 아닌가 보네요?”

    “그럼, 어지간한 공격은 막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으니까.”

    입고 다니던 도복을 수리하는 동안만 입는다는 의미였다.

    시오가 귀혼검을 서서히 꺼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도복을 벗은 시오의 전신에서 이전보다 더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다.

    요기에 가까운 아우라였다.

    “꼭 저와 대련해야 하나요?”

    유진하는 왜 하필 그녀가 지금 자신과 대련하려는 건지, 그것도 기세까지 끌어올려서 싸우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저와 진검 승부할 이유가 있나요?”

    “너의 진짜 실력을 제대로 알고 싶으니까.”

    시오는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하곤 기세를 더욱 끌어올렸다.

    “종말의 신화에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원했던 결말이 있어.”

    시오가 원하는 결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에어리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너희들과도 관련된 일이긴 해. 하지만 지금 말하지는 않으마.”

    시오의 타오르는 듯한 아우라가 서서히 귀혼검으로 옮겨 갔다.

    그러자 마치 귀신의 비명처럼 검에서 이명이 울렸다.

    ‘대체 왜?’

    에어리스도 시오의 진의가 궁금했다.

    어제 실전과 같은 대련을 했을 때에도 느끼지 못헀던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초월격의 아우라.’

    지금이 어머니의 전력이었다.

    “…….”

    지켜보던 레다와 유나도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저 상태의 어머니를 제지하는 건, 현재 자신들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했다.

    “알겠습니다.”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는 대련이라 했지만,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각오했다.

    그녀가 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말해 둘게. 내가 아는 미래에… 너의 자리는 없어.”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녀의 의지는 진심이었다.

    “종말의 신화에서 너의 자리는 없어. 그리고 너는 반드시 선택하게 될 거야.”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한 어투.

    확신에 찬 소리였다.

    “라그나로크에서… 네가 선택한 길은 우리가 패배하는 길이 될 거다.”

    “내가… 패배의 계기?”

    라그나로크가 열린 이상, 어떤 결말이든 결판날 것이다.

    하지만 유진하의 선택이 종말의 신화를 판가름한다니.

    저렇게 확신에 찬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준비해라.”

    시오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 때보다 결의가 넘치는 그녀는 이미 전력으로 싸울 준비가 되었다.

    “나는 <신멸의 구도자>. 내 아우라는 종말의 신화 전반에 반응한다. 덕분에 흐름을 한 번 엿볼 수가 있었지.”

    “예지입니까?”

    “예시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해. 나는 엿보았을 뿐이니까.”

    <신멸의 구도자>

    신좌를 멸하려는 자.

    그녀는 종말의 신화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였지만, 미래를 훔쳐 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알려 줬어.”

    레다가 말했다.

    “레다 언니……?”

    에어리스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레다의 고유 특성이 발현됐다.

    “별자리로 미래를 점칠 수 있어. 자세한 과정까지는 아니어도 대략적인 분위기는 읽을 수 있지.”

    “그럼 종말의 신화도?”

    “맞아. 나는 절망스러운 분위기를 점치고 말았어.”

    레다는 손에 작은 별, 하나를 소환하고 있었다.

    불길한 미래를 점지한 예언자처럼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의 압도적인 우세였어. 우리에게 승산은 없었지.”

    불온한 공기가 감돌았다.

    에어리스와 유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다가 이어서 얘기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고… 결국 선택하신 거야.”

    “선택이라뇨?”

    “<신멸의 구도자>는 애초에 종말과 연관된 초월격이니까 미래를 엿볼 수 있거든.”

    레다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어머니 시오는 위험한 점괘를 받고 이미 결심을 굳혔던 거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종말의 미래를 바꾸겠다.’

    “어머니는 개방된 종말의 신화를 엿봤어. 그리고 확인했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종말의 미래를 엿본 대가는 컸어. 어머니는 목숨을 걸었지.”

    미래를 엿본 대가는 목숨이었다.

    에어리스와 유나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시오는 이미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바친 상태였다.

    “목숨을 대가로 바친 탓에, 남은 시간은 오늘 하루뿐이야.”

    시오는 사라질 운명이 되었다.

    백화점에서 돌아온 후에 레다와 함께 불길한 미래를 점지했기에.

    그 절망의 미래를 먼저 보고서 유진하에게 대련을 신청한 것이었다.

    “대련이 아니라 승부…….”

    레다의 표정은 어두웠고, 시오의 눈빛은 진지했다.

    “진하… 어머니…….”

    지켜보던 에어리스는 받아들이기 힘겨운 순간을 맞이했다.

    “종말의 신화에서 패배할 거야. 결정적인 순간에 한 사람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거야. 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유진하, 너다.”

    종말의 신화를 엿본 자.

    시오는 미래를 뒤집으려고 했다.

    ‘내 남은 하루.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야.’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시오의 전신에는 아우라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난 봤어. 너의 선택으로 모두가 라그나로크에서 패배하는 미래를 바꾸겠어.”

    시오의 귀혼검이 유진하를 향했다.

    “그것은 불안의 존재인 유진하, 너를 없애는 거야.”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알겠습니다.”

    유진하도 상황을 이해했다.

    패배하는 미래를 본 이상, 시오의 결심은 되돌릴 수 없을 거였다.

    <신멸의 구도자>

    신좌와 초월좌를 상대하면 전투력이 폭발적으로 증강한다.

    정면에서 귀혼검의 기세가 치솟았고, 시오는 귀신의 형상처럼 살벌한 아우라를 발현했다.

    “제가 선택할 수 없도록 제거하려는 건가요?”

    “…맞아.”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네가 선택하도록 놔두지 않겠어.”

    시오는 마지막 불꽃같았다.

    “알겠습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텅 비어 버린 공간에는 한 사람만 살아나갈 수 있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빛의 창살처럼 뻗어가는 원형체가 배후에 발현됐다.

    빛과 어둠.

    광활한 공간에서 두 사람의 기운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거니?”

    시오가 눈부신 빛을 발휘하는 유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 힘으로는 날 상대할 수 없어.”

    검보랏빛 요기가 빛을 집어삼킬 듯이 몰아쳤다.

    빛의 아우라는 뛰어나지만 <신멸의 구도자>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를 상대하려면 그 격에 맞는 힘이 필요했다.

    유진하는 새로운 빛을 가지고 있었다.

    <명부의 등대>

    명부를 밝히던 그 빛의 정체는, 생명체에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모인 불이었다.

    생명의 빛.

    <성화>

    유진하는 손에서 지옥도의 성화가 나타났다.

    초월격 <성화의 빛을 받은 자>를 발휘한 것이었다.

    <성화의 빛을 받은 자>

    <신멸의 구도자>

    두 개의 초월격이 나오자, 하늘과 대지가 우그러들었다.

    균열이 일어나 시공간이 뒤틀리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콰앙.

    둘은 힘을 다해 격돌했다.

    서로의 모든 것을 건 대결이 벌어졌다.

    “진하…….”

    에어리스는 곳곳에서 부딪치는 번개의 자락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격돌하는 두 사람의 자국이 공간에 진하게 정전기처럼 남았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

    시오는 귀혼검으로 빛줄기를 잘라 내려고 했으나, 유진하의 움직임이 빨랐다.

    카앙.

    되레 시오의 빈틈을 보고 반격하며 들어왔다.

    ‘강해졌다.’

    전율이 일어날 만큼 강한 빛의 기세가 온몸에 느껴졌다.

    초월격 성화의 빛은 이전보다 강했다.

    올림푸스의 패자였던 영웅 헤라클레스마저 무릎 꿇렸던 유진하의 위명은 이미 많은 성운에 널리 퍼졌는데, 이번 대결에서 그 위명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질 수도 있다.’

    지금의 유진하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라그나로크에서 봤던 미래에서도 비슷했다.

    성화의 초월격은 강렬한 빛줄기를 뿜어내며 전장을 지배했다.

    하지만 유진하는 신화의 한 페이지가 되지 않았다.

    “결말이 다가왔지.”

    폭발에 휩싸인 대지.

    무수한 연기와 비명.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의 공격으로 모두가 전멸 직전에 처했다.

    그때, 유진하는 선택의 갈래에 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유일한 빛으로 남을 것이고, 빛의 날개 여덟 장을 펼칠 것이다.

    시오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로 그렇게 가리라.

    그것이 미래에서 본 광경이었다.

    “내 선택이…….”

    종말의 신화를 완성시키거나, 혹은 실패로 만든다.

    모두의 운명이 유진하의 선택에 맡겨지는 것이었다.

    ‘외로이 고고하게 우뚝 선 초월좌.’

    마지막 순간의 결정.

    유진하는 하늘에 남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존재들이 숨죽여 마지막 결정을 지켜보리라.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가 완성 혹은 실패하는 순간이 벌어지기를…….

    “내 선택은…….”

    종말의 신화를 결정짓는다.

    그때, 유진하는 바닥에 힘을 잃고 쓰러진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에어리스…….”

    빛을 잃고 쓰러진 그녀가 마지막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결정하게 된다.

    “내가 선택할 결말은 하나뿐이야.”

    유진하의 선택은 시오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이었다.

    “바꿔야 한다.”

    미래를 엿본 그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어. 네가 죽어야 미래는 바뀐다.”

    시오의 검이 유진하의 심장을 겨누었다.

    ‘미래의 결말을 손에 쥔 자.’

    ‘종말의 열쇠를 가진 자.’

    그 사람이 유진하라면…….

    역으로 그를 죽이면 미래가 바뀔 것이다.

    “종말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어.”

    시오는 결의를 다졌다.

    <신멸의 구도자>가 가진 힘을 모조리 발산해서 귀혼검으로 단숨에 성화의 빛을 잘라 버렸다.

    “빛을 자르는 검으로…….”

    시오의 정장이 나풀거렸다.

    이 전투는 미래를 바꾸는 첫걸음이 된다.

    유진하가 사라진다 해도, 그녀가 원하는 미래가 이뤄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신좌들을 멸하겠다며 살아 온 삶이기에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시오에게 주어진 단 하루.

    목숨까지 버린 집념으로 초월격 <신멸의 구도자>는 극한의 아우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지와 집념으로 빛의 자락을 잘랐다.

    “끝이다.”

    성화의 빛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늘이 잘리듯 거대한 충격파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참격.

    그 일격으로 결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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