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결전 준비(2)
“오랜만이다, 유진하.”
변함없이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는 요원이 있었다.
M이었다.
“잘 있었나요? M.”
반가운 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M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진하도 반갑다는 듯이 M과의 재회를 맞이하며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요원 일은 요즘 어떤가요?”
“그럭저럭. 네가 없으니까 조금 불편했던 정도?”
M은 테이블에 비치된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커피 한 잔? 아니면 다른 것도 있는데…….”
“그냥 커피 마실게요. 오늘은 많이 춥네요.”
찬바람이 불어 날씨는 쌀쌀했다.
어느새 겨울이 되어 코트를 입지 않으면 온몸이 떨릴 만큼 차가웠다.
보글보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커피 향이 맡아졌다.
“자, 여깄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은 유진하가 한 모금을 마셨다.
달콤하고 따스한 커피가 차가웠던 몸을 녹여 주었다.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또다시 만나는구나.”
M이 살짝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함께 싸웠던 전우를 만나는 기분이 이럴까.
묘한 감정이 들었다.
“역시 살아 있는 게 낫네요.”
유진하도 따라 웃으며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이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세상은 차갑게 변해 갔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았다.
“요즘 현장에 나가기 보다는 사무실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사무실에서 매일 자료도 분석 하고, 보고서도 정리하고.”
책상에는 서류 뭉치와 파일들로 가득했다.
살짝 건들어서 살펴보려는데 M이 만류했다.
“아아, 건들지 마. 대충 놓은 거 같아도 나만 찾을 수 있게 정리가 되었거든.”
“아, 그렇군요.”
복잡하게 쌓인 서류 더미 속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방해하지 않으려고 유진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필요한 작업이 있어서 그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서 일어난 M은 그쪽으로 향했다.
“마침 딱 맞춰서 왔어.”
또 다른 손님?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문이 열리고 하얀 도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아…….”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백우선을 흔드는 그 사람은 제갈공명이었다.
“선생님이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유진하.”
제갈공명은 한 손에는 백우선을 든 채로 여유로운 자세로 다가왔다.
“3회전에서 지구로 귀환하고는 선생님을 처음 뵙네요.”
“유진하 군의 소식도 잘 들었습니다. 지옥도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대략 들었답니다.”
“구체적으로 알려 드릴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잘 들어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는 부분이 아쉽군요.”
유진하는 제갈공명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장에는 특유의 흐름이 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투마다 풍기는 내음과 분위기는 각각 전혀 다르다.
전장의 지휘관은 그런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생생한 경험이라…….”
피부에 닿는 분위기를 중시하는 전략가.
제갈공명의 책략은 항상 상대의 수준에 맞춰서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변화무쌍, 적재적소.
상대의 격에 맞춰서 전략을 만들었다.
“걱정하자 마십시오. 생생하게 볼 방법이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미소를 지었다.
유진하가 되물었다.
“방법이요?”
“유진하 군이 지옥도에서 성운전을 벌이는 동안, 우리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구 성운의 영웅들도 그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치열하게 노력하며 서둘러 강해지고 있었다.
“저희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서 움직였습니다.”
“두 개의 팀이라면……?”
유진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듯이 떠올랐다.
“하나는 원정대로 나가고, 다른 팀은 남아서 개발을 한 건가요?”
제갈공명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우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렇게 진행했답니다.”
역시 유진하다웠다.
천재적인 지략가는 지구 성운에서 일어난 일을 쉽게 예측했다.
“원정대는 제가 이끌었고, 거기서 많은 영웅들이 성장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제갈공명은 자신의 명성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
<천재지변의 책략가>는 삼국 시대의 흐름을 뒤바꾼 천재였고, 전략의 귀재였다.
지략에서 유진하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우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선생의 말이 맞아. 우리는 충분히 세력을 불려 놨다.”
M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서류에 기록된 보유량은 카드와 무기가 예전에 비해 1000% 이상 늘어났다.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 불리는 그분께서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 주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어 그리스 지식을 집대성한 위인이었다.
그는 이론의 정립에 뛰어났고, 보급 문제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실력을 선보였다.
“순간 이동 카드도 많이 늘어났네요.”
카드 목록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순간 이동 카드였다.
전투력이나 방어력에 관련된 카드는 신좌들을 상대로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보조 카드는 쓰임새가 달랐다.
“이 카드라면 기동력 부분에서 힘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준비를 많이 해 뒀다.”
M은 자신만만하게 서류 장부를 보여 줬다.
아리스토텔레스와 M은 보급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 성운의 전력 표다.”
-공간 번호. 23,790,547,824.
면적 : A → S
전투력 : A → U
문명 : B+ → A
지성체 인원 : A
자원 : C → A
유진하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인류 최고의 영웅들이 힘을 합쳐 지구 성운은 급격한 성장을 이뤄 냈다.
“전투력은 U등급이네요?”
U는 최상급으로 취급됐다.
전투력이 꽤 높게 평가되었다.
“원래는 A+였지. 그런데 유진하, 너희가 돌아왔잖아.”
그랬다.
신좌나 초월좌가 소속된 성운은 전투력에서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유진하 일행의 복귀는 초월좌의 등장을 의미했다.
“유진하, 너도 있고. 세 자매와 시오, 조커도 있다.”
이소민은 빠졌지만… 전력 면에는 큰 차이가 없는 부분이니 대충 넘어갔다.
제갈공명이 오랜만에 만난 유진하를 훑어봤다.
“초월격이라고 들어 봤습니다. 그 힘이 엄청나다는 것도요.”
중요한 이야기였다.
신격과 초월격은 한계를 넘어선 최고의 경지를 의미했다.
이들의 힘은 하나의 성운 전체를 포괄하는 무력을 가졌다.
“어떤 성운에 간다면 신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힘이죠.”
제갈공명도 그 힘의 수준은 직접 본 적이 있었다.
3회전에서 아테나와 시오의 전투를 보면서 천지가 뒤틀리는 충격파를 목격했다.
“일반 신좌가 가진 힘도 대단하지만, 최상위 신좌는 그보다 한 수 위라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천지개벽을 일으킬 수도 있는 힘이라더군요.”
정확한 표현이었다.
초대형 성운 올림푸스 같은 곳의 존재들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힘을 가졌다.
오로지 힘과 무력.
압도적인 지배력.
성운전 전체를 지배하고 법칙을 만들었다.
“세상이 종말하거나. 혹은 우리가 멸망하거나.”
어떤 결말이든 일어날 터였다.
제갈공명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묘수를 찾아내야 했다.
본능적으로 전력 파악부터 시작했다.
“우리 측에서는 어떻습니까? 초월격이 가능한 사람이 소수이군요.”
현재 이곳에서 초월격이 가능한 사람은 몇 손가락에 불과했다.
유진하, 에어리스, 시오, 조커, 아테나 정도가 전부였다.
레다와 유나는 초월격 직전에 있었다.
라그나로크까지 150일도 안 남았으나, 곧 초월격의 경지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했다.
“레다와 유나까지 친다면 일단 7명은 되는 거군요.”
제갈공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상위로 분류하면 유진하와 시오, 아테나 정도로 축약할 수 있었다.
“라그나로크 신화에서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에는 최상위 신격이 몇 명입니까?”
천재 전략가는 하나하나 바둑을 두는 듯 전략의 맥을 짚고 있었다.
유진하도 거기에 맞춰 솔직하게 대답했다.
“올림푸스 12신좌가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이 빠졌으니 11신좌겠네요.”
“그게 최소한이라는 거군요. 더 있을 수도 있겠네요.”
“제우스라면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기간토마키아> 때도 헤라클레스 같은 초월격 영웅을 길러 냈다.
누가 어떤 식으로 튀어나올지는 예측 불허였다.
“아스가르드 성운은 어떻습니까?”
“오딘, 토르, 티르 3신좌가 버티고 있어요. 그 외에도 헤임달과 프레이 같은 강자들도 즐비하죠.”
저들은 최상위 신좌들만 쳐도 족히 20명에 달하는 총집결 수준이었다.
그보다 아래인 일반 신좌급은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규모일 터였다.
“우리 쪽에도 지옥도가 있어요. 최상위 신좌는 헬라와 하데스, 바리데기가 있네요.”
제갈공명은 양측의 핵심 인원들을 비교해 봤다.
“최상위만 보면 저쪽은 20명. 우리는 다 포함해도 5명이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갈공명은 결과를 숨기지 않았다.
“전력에서는… 솔직히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다.”
“…….”
유진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확실히 열세였다.
하지만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에 어떻게든 전력을 키워야겠군요.”
결론은 간단했다.
제갈공명은 삼국 시대에 원래 부족한 전력으로도 끝까지 맞섰던 인재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상황을 뒤집는 출중한 계책은 물론, 보급과 전력 확충에도 유능했다.
“저도 선생님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유진하도 결의를 다졌다.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전략을 함께 구성하기 전에 일단 이것부터 봐야겠습니다.”
제갈공명은 아까 얘기했던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안테나와 렌즈가 달린 조그만 물체였다.
“원정에서 얻은 물건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랍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요?”
“이걸 사용하면 극장의 영사기처럼 타인의 기억을 화면에 띄워서 볼 수 있죠.”
기억의 영사기.
이 물체는 타인의 기억을 스크린으로 선명하게 보여 준다.
지금까지 유진하가 겪은 4회전 과정을 제갈공명도 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머리에 끼우면 됩니다.”
제갈공명이 직접 유진하의 머리에 기억의 영사기를 끼워 주었다.
“자, 이제 4회전의 시작부터 머릿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어쩐지 취조를 받는 느낌이네요.”
유진하가 가벼운 농담을 걸었다.
살포시 웃음을 짓던 제갈공명이 유진하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기부터입니다.”
기억 속 4회전의 모든 과정이 펼쳐졌다.
명계의 바리데기, 염라대왕과 만남은 물론 마경대전에서 헤라클레스와의 결전까지 모두 펼쳐졌다.
“…대단한 싸움이었군요.”
모든 기억을 지켜본 제갈공명은 짧은 소감을 남겼다.
역시 전투를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대지에 작렬하던 초월격의 힘.
헬라와 헤라클레스의 기세를 볼 때는 제갈공명조차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엄청난 대결이었어.”
M도 감탄하듯이 내뱉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결전을 직접 목격한 두 사람은 그제야 앞으로 싸울 신좌들의 강대한 수준을 예감했다.
“좋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그럼 유진하 군과 대전략을 짜야겠군요.”
제갈공명에 이어 M도 나섰다.
“나는 전력 표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으니까.”
M의 분석력이 발동했다.
많은 자들의 실력을 살피던 냉철한 분석력으로 신좌들의 능력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유진하, 너의 능력치부터 다시 수정해야겠다.”
“아, 제 능력치요?”
M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래, 너부터 시작하자. 너의 새로운 능력치를 기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