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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207화 (207/229)

207화 마경대전(15)

언제부터였을까.

어둡고 깊은 정신의 영역에서 악마 신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왜 혼자가 되었을까.’

72악마를 수하에 두고 한때는 지옥도의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며,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부터였지.”

지옥도 성운에서 지내던 날.

악마들끼리 사소한 분란은 있었으나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살아가던 때.

갑자기 쳐들어온 신좌들이 있었다.

‘악마와 비견되는 존재.’

하얀 날개의 사자, 천사들이었다.

천사와 악마의 전쟁.

‘성마대전’이라고 명명된 전쟁이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됐다.

“12번이 넘는 대전쟁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온몸이 쑤시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천사가 찌른 검에 의해 자신의 육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흔적도 남지 않는 싸움이었지.”

성마대전은 완전한 승자도, 완벽한 패자도, 없이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부서진 세계와 죽은 자의 잔해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의지가 사라졌어.”

소년은 기나긴 전쟁에서 육체와 많은 악마들을 잃었다.

원래는 1000명이 넘은 악마들이었으나 겨우 72명만이 남았다.

그 후로 실어증에 걸린 듯 정신의 영역에 혼자 틀어박혔다.

“이제는 혼자 있겠어.”

가끔 72악마들의 육체를 빌어서 강림할 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동안 지옥도는 명계와 명부의 세상이 되었고,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완성되었다.

그래도 관여하지 않았다.

더 큰 싸움을 원하지 않았고, 혼자서 외톨이처럼 지내고 싶었으니까.

소년은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혼자 가만히 있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신화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종말의 신화겠지…….’

언젠가는 종말의 신화가 어떻게든 오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영원하거나.

혹은 영원하지 않거나.

종말의 신화는 세상의 흐름을 결정하는 물줄기에 속한다.

어떤 존재라도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가 온다면 내 역할도 있을 거야.”

그래서 소년은 기다렸다.

새로운 육체와 종말의 신화가 열리는 날이 올 때까지.

“네가 악마들의 신이지?”

그리고…….

한 사람이 찾아왔다.

“여기에 계속 혼자 있었던 거야?”

인간이었다.

“야이, 사람이 묻는데 최소한 대답이라도 하는 척은 해라.”

“나도 이곳에 막 들어왔는데, 네가 알려 줘야 적응할 수 있잖아.”

해맑고 명랑한 목소리의 여자.

인간이지만 어쩐지 겁이 없고 당돌하게 다가왔다.

‘없애 버릴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생각을 바꿨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너에게 육체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나는 그걸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고.”

여자는 대단한 각오를 가졌다.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겠다니.

이제껏 성공한 자가 하나도 없어 사실상 자살 행위에 가까웠는데도 고집을 부렸다.

“괜찮아. 나도 다 걸었거든.”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기대는 없었으나 그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네 이름은 뭐지?”

“이소민이야.”

이소민.

왠지 오래 기억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매번 반복되는 실패를 알면서도 소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손이 닿았다.

살아 있는 존재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잠깐 느껴졌으나, 이내 소년의 스산한 기운이 바로 차단했다.

‘나는 모든 육체를 집어삼키는 존재이기에…….’

생명체의 온기는 어차피 죽으면 사라지는 것.

의미를 두지 않았다.

쿠웅.

소년의 영혼체가 그녀의 육체에 들어가자 예상된 결과가 일어났다.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거야.”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72악마를 통솔하는 주인이 가진 위압감과 아우라는 너무나 위협적인 기세였다.

닿자마자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육체마저 녹아 버리고 만다.

“응?”

그런데… 느낌이 달랐다.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미약한 기운의 생명체였다.

자신의 영혼체를 감당할 기운은 애초에 없기에, 지금쯤 육체가 녹아 버려 흔적도 없이 소멸해야 했다.

죽은 사람처럼 늘어졌지만, 사라지지 않고 온전했다.

“이건?”

심장 박동이 있었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생명체만이 가진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멀리서 한 사람이 더 다가왔다.

하얀 도포를 두르고 나타난 또 다른 여자였다.

“당신은 아까 겨뤄 봤던……?”

소년은 한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눈매의 여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시오.”

<신멸의 구도자>라 불리던 그녀 역시 초월좌가 되어 이 싸움에 개입했다.

“둘이서 동시에 날 찾아온 건가?”

“맞아. 부탁을 받았지.”

유진하의 결정이었다.

이소민 혼자만 짊어지기에 너무 큰 부담이라고 생각해서, 한 사람을 더 보냈다.

“나 역시 너처럼 혼자 오래 있었으니까.”

“…….”

“내가 낳은 아이들이 날 떠나고 혼자 남아 있었지.”

옛 추억이 떠올랐는지 시오가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레다, 에어리스, 유나.

세 자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갔다.

이제 자신의 역할은 아이들의 앞날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가고, 나는 남았지.”

“너도 고독하다는 건가?”

“상실감도 있어.”

잘되기를 바라며 가르쳤던 자식들이 사라지는 기분.

우울한 감정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야. 떠나간 자식들이 잘되리라는 기대감도 있으니까.”

“기대감?”

“잘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당신도 같겠지.”

“나는 애초부터 혼자였다.”

“그렇지 않아.”

시오는 악마 신 소년이 잊고 있는 자들을 떠올려 줬다.

“72명의 존재들이 당신에게 남아 있어.”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72악마는 자신의 강림을 약간만 받아 낼 수 있는 개체였고, 동시에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그랬지.”

악마들도 자신의 주인을 지킨다.

소년은 수하 악마들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영혼체를 받아낼 존재가 없다면,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받아 낼 거다.”

시오의 전신에서 강렬한 생명의 의지가 타올랐다.

아까 이소민이 가진 온기와는 다른 분위기의 기세였다.

“그게 너의 의지인가?”

소년이 물어봤다.

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두 명이 힘을 합치면 된다.

“우리도 그럴 거야.”

이소민과 시오.

둘이 동시에 나섰다.

‘가장 정신력이 강한 사람.’

어떤 역경에서도 정신력이 무너지지 않으며, 일행의 멘탈까지 되살리는 ‘이소민’.

아이들을 위한 자기희생과 신좌들을 향해 강렬한 목표 의식을 가진 ‘시오’.

이 두 사람의 정신력이라면 악마 신이라도 담아내리라고 여겼다.

‘두 사람의 정신력을 믿는다.’

그때였다.

죽은 줄 알았던 이소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아암! 잠깐 잠들었나?”

방금 쓰러졌던 이소민이 하품과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슥슥 풀었다.

“너희 같은 자들은 처음 본다.”

시오와 이소민을 보면서 악마 신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이소민.

처음부터 버텨 내는 시오.

둘 다 각자의 방식과 마음으로 당당하게 버텨 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너희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건 역시 무리야.”

솔직한 의견이었다.

두 사람의 정신력이 뛰어나기는 하나, 수백억 년이나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라 불렸던 자신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기는 부족했다.

“아마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기껏해야 10분이 한계다.”

“10분?”

“그것도 너희들이니까 되는 거야.”

소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잠재된 상태로 너희 둘의 의식 속에 있겠다. 그것도 반으로 나뉜 상태에서. 그래야 해.”

두 사람은 절반씩 소년의 영체를 받아야 했다.

“필요한 상황이 되면 내가 강림하도록 하지.”

<어두운 심해의 정신 영역>에서 살아가던 소년은 이제 고독에서 벗어나, 이소민과 시오의 정신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너희들이 성장하면 언젠가는 진정한 강림이 이뤄지겠지.”

마치 계약 같은 관계였다.

이소민은 동의했다.

“좋아.”

시오도 받아들였다.

“그러지.”

종말의 신화 라그나로크에서 마지막 중추였던, 악마 신이 마침내 참전을 확정했다.

“너희 두 사람의 몸에 가겠다.”

소년의 영혼체가 나뉘기 시작했다.

반으로 나뉘자 같은 외모를 가진 소녀가 나타났다.

소년과 소녀.

72악마의 주인.

악마 신은 자신의 영혼체를 두 개로 나누어 이소민과 시오에게 각각 들어갔다.

“이제 가겠어.”

검은 안개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소민과 시오는 각각 하나씩 악마 신의 영혼체를 흡수했다.

“흐읍.”

검은 기운이 짧은 시간에 스며들자 이소민은 뭔가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절반으로 줄어서 그런지 아까처럼 정신을 잃은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무슨 힘이 들어온 느낌인데?”

특별한 기분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악마 신은 잠재된 의식의 영역에 있을 테니까.

언젠가는 제대로 나올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가야겠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잠재된 종말의 신화가 있는 곳.

두 사람은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향했다.

* * *

1년마다 지옥도의 패자를 가리는 마경대전이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야.”

회귀자 유성하가 하던 말이었다.

항상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절망하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한다.’

유진하는 그 말을 기억했다.

형이 남긴 회귀의 과정은, 한 인간의 무한한 도전이자 삶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 무수한 실패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었다.

실패는 선구자의 이정표였기에.

“이제 다 모였어요.”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헬라.

<명계의 마왕> 하데스.

<십대왕의 성모> 바리데기.

<72악마의 주인> 악마 신.

절대 협력한 적이 없었던 모두가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신기의 창.”

마경대경의 우승 조건은 저 창을 뽑는 것이었다.

우승을 상징하는 신기의 창이 이제는 종말의 신화를 여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같이 잡도록 해요.”

네 명의 신좌들의 공동 우승이 라그나로크를 여는 시작점이었다.

성운전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다.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가 눈앞에 있었다.

“됐어요.”

유진하는 모든 결과를 감내할 생각이었다.

올림푸스, 아스가르드와 전쟁으로 성운전을 무너뜨리고, 세상의 종말까지 확산되지 않게 막아야 했다.

쉽지 않은 과업이지만, 모두와 함께 이 전장에 당당히 나설 생각이었다.

“구체제인 성운전을 뒤엎고… 신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의 목표가 모두의 가슴에 새겨졌다.

“종말의 신화를 발현시킨다.”

4신좌가 동시에 신기의 창을 움켜잡았다.

불가능이라 불렸던 대연합이 결성되자,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지옥의 빛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을 꿰뚫을 듯한 빛줄기를 보면서 유진하는 작은 감상을 남겼다.

“새로운 길이 열린다.”

마침내 성운전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아무도 알 수 없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성운전의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잠재된 신화가 해방되었습니다.

-<라그나로크>가 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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