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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206화 (206/229)

206화 마경대전(14)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헬라.

<십대왕의 성모> 바리데기.

<명계의 마왕> 하데스.

지옥을 대표하는 신좌들이 모여들었다.

끝없이 반복하고 싸우던 그들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결의했다.

“이미 올림푸스는 전투태세에 들어갔어.”

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리데기는 그런 헬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원래 제멋대로 싸우던 녀석이 너잖아.”

서로 오래된 경쟁 관계라서 그런지, 이제는 대립하더라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들 해라.”

하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바리데기와 헬라가 벌이는 신경전을 그동안 숱하게 봤던 터라, 이제는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해묵은 감정은 결국 녹아 가는 법입니다.”

세 명의 신좌를 지켜보던 유진하가 한마디를 더했다.

이들은 수백억 년을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처음에는 싸우고 대립했지만, 이제는 같은 적을 앞두고 협력할 때가 왔어요.”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 지옥도에 왔을 때부터 그들은 세력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지옥에서 가장 강력한 신좌로 인정받기 위해서…….’

자존심으로 시작된 싸움은 영원할 정도로 반복되었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이 흘렀고, 서로 싸우는 나날만 끝없이 흘러갔다.

“이제는 양측의 세력이 모여 결판을 내야 해요.”

빛의 아우라를 머금은 유진하는 종말의 신화에 관여된 신좌들을 모으고 있었다.

서로 반목하고 싸우던 신좌들을 한데 모아서, 절대 이뤄지지 않았던 협력을 이뤄 내고 싶었다.

지옥에서 유일한 빛.

유진하는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 모두를 이끌어 가야 했다.

“셋은 모였어요.”

헬라, 바리데기, 하데스.

마지막 한 명이 부족했다.

“72악마가 남았습니다.”

악마는 지옥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존재였다.

이들을 빼놓고 지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었다.

가장 오래된 유물처럼 악마들은 깊은 그림자처럼 자리 잡았다.

72악마를 이끄는 신좌.

악마들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라도 오지 않으면 잠재 신화는 열리지 않아요.”

세 명이 뭉쳐도 한 명이 빠지면 대연합은 불가능하다.

종말의 신화도 열리지 않는다.

“이제 끝이 가깝다.”

마경대전은 서서히 끝나가던 중이었고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세상을 보듯이 하데스의 눈빛은 고독했다.

“악마 신은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심연의 바닷속.

그 어딘가에 잠든 악마 신은 누구도 자취조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하는 달랐다.

“반드시 올 거예요.”

차분하면서도 묘한 설득력이 실린 말이었다.

어려운 과업을 앞두었음에도 초조한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었다.

“데려올 사람을 이미 보냈거든요.”

72악마의 신.

악마 신을 마중 나가서 데려올 수 있는 적임자가 있었다.

바리데기와 헬라는 둘 다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 외톨이를 데려온다고?”

불가능한 소리였다.

지옥의 신좌들조차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갓 들어온 인간이 대체 어떻게 만나겠다는 걸까?

“정말이야?”

슬쩍 바리데기가 날아와 유진하의 곁에 머물렀다.

“정말? 확실하지?”

뭔가 동그랗게 떠오른 바리데기의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근처에서 지켜본 유나는 뭔가 경계심을 느꼈는지 에어리스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에어리스 언니, 저 신좌가 자꾸 유진하한테 붙는 거 같은데 저거 위험한 거 아니지?”

동생 유나가 조심하라고 하자, 에어리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게 괜찮을 거야.”

유진하와 딱 붙은 바리데기.

명부 십대왕의 어머니이지만 외모는 귀여웠고 무엇보다 강하고 인자한 성품까지 지녔다.

“…언니, 정말 괜찮겠지?”

“하하.”

에어리스와 유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자매들의 맏언니, 레다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은데.”

손에 검을 쥐고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대비했다.

세 자매의 맏이라는 부담감이 있어서 동생들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검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조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레다의 곁에 다가와 중얼거렸다.

레다가 세 자매의 선봉이라면, 조커는 원정대의 선봉이었다.

두 사람은 묘한 면에서 같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믿어도 된다.”

단독으로 살았고.

누구도 믿지 않았던 조커.

빛의 아우라 속에 있는 유진하는 조커도 신뢰하고 있었다.

‘지옥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잠재된 종말의 신화가 열리기까지.’

마지막 난관을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세상은 침묵 속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네가 악마들의 신이지?”

<어두운 심해의 정신 영역>

심연보다 더 깊은 지하였다.

이곳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고, 섣불리 들어온 자들은 영원한 바닥으로 가라앉는 무서운 공간이었다.

“누구지?”

이 고요한 지하의 한구석.

한 명의 소년 같은 존재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밑바닥을 빙빙 돌리자 마치 물결처럼 동그란 파장이 퍼져 나갔다.

“당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야.”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보다 깊은 영역에 그녀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이라고 들었어.”

72악마들의 주인.

악마 신의 수식언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그쪽에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이소민이었다.

“인간이구나.”

소년은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혼자 있는 이곳에서는 누가 와도 상관이 없었다.

“여기에 계속 혼자 있었던 거야?”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소민은 속으로 발끈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유진하가 맡겼으니까.’

네 번째 신좌인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를 설득할 사람이 필요했다.

유진하는 그 중요한 임무를 맡을 사람으로 고민 끝에 최적의 적임자를 선택했다.

이소민이었다.

“정말 내가 설득할 수가 있을까?”

“가능할 수도 있어요.”

가능성이라…….

100%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상대가 악마 신이라서?

아니면 이소민 자신이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어느 쪽이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설득하면 되려나?”

“그냥 평소의 이소민 누나처럼 하면 괜찮아요.”

“평소의 나처럼……?”

이소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짝 미소를 짓던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외골수에 은둔형에 가까워요. 그런 녀석을 끌어내려면 친화력이 좋고 긍정적인 사람이 필요해요.”

“흐음. 친화력과 긍정적이라…….”

어쩐지 칭찬처럼 듣기에 좋은 소리였다.

이소민은 기분이 좋아지자 표정이 크게 밝아졌다.

“그건 확실히 내가 낫지.”

“걸어 볼 가치는 있어요. 이소민 누나라면 말이에요.”

유진하의 동료 중에 정신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이소민이었다.

친밀함과 활달함.

긍정적인 이소민이 어둠 속 은둔자를 빛으로 끌어낼 거라고 믿었다.

‘후우, 직접 보니 더 긴장되네.’

이소민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멀리 등을 보이며 주저앉은 악마 신 소년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 냈다.

상대는 악마 신이기에 실수라도 했다가는 바로 자신을 죽여 버릴 수 있었다.

‘설득하겠어.’

간절한 마음이었다.

유진하는 평소의 이소민이라면 가능하다고 얘기했다.

그 말에 이소민은 목숨을 걸었다.

“야이, 사람이 묻는데 최소한 대답이라도 하는 척은 해라.”

“…왜?”

상대는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라 불리는 악마들의 주인이었다.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생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소민은 옅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이곳에 막 들어왔는데, 네가 알려 줘야 적응할 수 있잖아.”

대답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실수는 바로 죽음이었다.

“이곳에서는 네가 선배라는 거지.”

“…별거 없어.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곳이야.”

소년은 관심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정신의 영역. 심연보다 더 깊은 바닥. 여기 들어온 녀석은 꽤 되지만 계속 버티는 자는 없었지.”

정신의 감옥과도 같았다.

소년이 굳이 공허한 장소를 거처로 삼은 데는, 누구의 간섭에서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싶어서였다.

“처음부터 너 혼자 여기 있었어?”

정신의 영역에서는 마음을 굳건하게 다져야 한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지면 자신의 존재마저 침식되기에.

무수한 존재가 왔어도 소년만 혼자 남은 이유였다.

“누구도 있을 수 없는 곳이야.”

밑바닥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깊은 바닥에는 가라앉은 존재들이 있었다.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아래에 보였다.

“…….”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이소민은 참아 냈다.

“혼자 계속 있다 보니까 너는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가 되었구나.”

“맞아.”

소년은 순순히 대답했다.

72악마를 수하에 두고 자유자재로 그들의 몸에 빙의하여 싸울 수 있는 존재였다.

형체를 잡을 수 없는 자와 같았다.

“여기 계속 있을 거니?”

“아마도…….”

“그래.”

이소민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다가가기만 할 뿐.

어둡고 차가운 이곳에서 꺼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채로 소년의 곁에 다가가 살짝 앉았다.

“같이 하면 더 재밌어.”

밖으로 나가자고 권유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따로 사정이 있을 테니까.

마음은 급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녀석들의 육체에 강림하기도 하던데?”

“가끔 수하들에게 하지.”

악마 신 소년은 외톨이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다른 육체를 빌려 강림한다.

그것은 역으로 말해,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나가지 않는 건 아니다.

녀석도 그럴 생각이 있다.

이소민에게도 그 부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너한테 알맞은 몸이 없어서 안 나간 거였어?”

72악마의 몸에 강림하는 존재.

다르게 말하자면, 녀석의 진짜 육체는 없다는 소리였다.

‘이제 알았어. 유진하가 왜 나를 보냈는지.’

이소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심연보다 더 깊고 어두운 곳에서 왜 자신이 악마 신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인지.

‘내가 녀석의 그릇이 되어야 해.’

강림하는 자.

녀석을 끌어내려면 그릇이 되어야 한다.

‘72악마의 주인이자 악마 신이 강림할 육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녀석을 이곳에서 내보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말 골 때리네.’

이소민은 속으로 황당했으나 내심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이 골칫덩어리 악마 신 소년을 자신의 몸에 정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은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후우.”

한숨이 나왔다.

다른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이소민이라도, 이렇게 어둡고 깊은 악마의 정신 영역에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이미 발목이 조금씩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좋아. 해 보자.”

크게 마음을 먹은 이소민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너에게 육체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나는 그걸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고.”

쭈그리고 있던 소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소년의 눈빛은 공허했고,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이, 너 실망한 거야?”

큰마음을 먹고 육체를 빌려주겠다는 데도 저 시큰둥한 반응이라니.

이소민이 발끈했다.

“당신은 무리야.”

“뭐라고?”

“내가 가진 힘과 기운을 받아들이기에 약하다고. 수많은 존재들이 도전했지만 다들 내 기운에 녹아 버렸어.”

소년의 대답은 확고했다.

‘날 받아들이면 넌 죽는다.’

분명한 메시지였다.

이소민은 크게 마음을 먹었다.

“…하는 수 없지.”

이제 되돌아갈 길은 사라졌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자신의 몸과 정신을 믿어야 했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다 걸었어.”

이소민은 단호해졌다.

삶과 죽음.

어쩌면 그 너머의 고통마저 받아들일 각오였다.

“…….”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림할 수 있는 육체는 오래도록 계속된 소년의 진짜 소망이었다.

어떤 육체도 버티지 못한 악마 신의 혼령을 과연 저 여자가 받아 낼 수 있을까.

정답은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매번 반복되는 실패를 알면서도 소년은 어쩐지 이소민의 기세를 보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해 보자.

선택은 그녀가 했다.

결과는 곧 나올 터였다.

소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소민의 목덜미에 닿자 스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동공이 사라지듯이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내가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라 불리는 이유는 하나…….”

강림하고 싶지만 그럴 육체가 없었다.

“모든 육체는 어둠에 삼켜진다.”

소년의 혼령체를 받아들인 이소민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이윽고…….

소년은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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