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마경대전(10)
“네가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라는 녀석이냐?”
헬라는 짙은 보랏빛의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로 나타났다.
핏기없이 새하얀 피부는 어쩐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그게 당신이군.”
헤라클레스는 헬라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동시에 가진 지옥의 여왕.’
‘종말의 잠재 신화, 라그나로크에서 주역을 맡을 신좌.’
“지옥도에서 가장 싸워 보고 싶은 신좌였지.”
아테나와 하데스에 도전하는 영웅은 지옥도의 마경대전마저 정복할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명부의 바리데기와 더불어 정말 붙어 보고 싶었다.”
염라대왕의 어머니, <십대왕의 성모>라 불리는 명부의 바리데기.
헬라와 라이벌의 관계였는데, 바리데기의 이름을 듣자 헬라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지금은 나부터 생각해 줘야 해.”
묘한 미소 속에 감춰 둔 속셈이 있었다.
얼른 싸우고 싶다는 의미였다.
“종말을 일으키려는 신좌와 종말을 막으려는 초월좌. 과연 누가 이길까?”
헬라의 육신에서 검은 아우라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헤라의 영광이라는 네 이름 헤라클레스… 이제 곧 헬라의 영광이 될 거야.”
헬라가 가볍게 웃으면서 힘을 퍼트리자 대지가 검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지옥의 여신은 세상을 자신의 지배력 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기간토마키아 신화를 끝장냈다는 그 실력. 내가 시험해 주지.”
지면을 뒤덮은 아우라 속에서 불가사의한 형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처럼 치솟는 그것들은 그림자 형상의 괴물들이었다.
“바라던 바다.”
헤라클레스도 전신에 강렬한 노란빛의 아우라를 휘감았다.
헬라의 그림자가 대지에서 솟아나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양 주먹을 불끈 쥐면서 헬라의 그림자와 격전을 벌였다.
무투의 헤라클레스.
지옥의 여왕 헬라.
둘은 지상과 하늘을 오가며 천둥 번개처럼 충격파를 터트렸다.
맹렬한 혈투가 벌어졌다.
앞서 헤라클레스와 전투를 벌였던 <정의와 신념의 여신>은 날개를 모두 잃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테나 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흩날리는 아테나의 깃털 속에서 하얀빛의 아우라를 가진 유진하가 다가왔다.
“유진하, 당신이군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테나가 여기서 당해 버렸다면 부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에 전쟁의 여신이 불참한다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큰 전력 손실이 될 뻔했다.
“유진하, 당신이 헬라와 같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조금 전에 만났습니다. 아무래도 헤라클레스를 상대하려면 헬라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다고 봤거든요.”
물론 헬라만이 헤라클레스와 맞설 유일한 상대는 아니었다.
“내가 상대할 수도 있었지.”
시오도 어느새 옆에 나타났다.
“<신멸의 구도자>입니까?”
외팔의 검사는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을 추스르며 다가왔다.
부상을 떨치려는 듯 아테나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따로 부축은 받지 않았다.
“여기서 결판이 나겠군요.”
잠재된 라그나로크 신화의 향방은 헬라와 헤라클레스의 싸움에서 결론이 날 터였다.
세계관의 유지 혹은 종말.
어떤 결말이든 반드시 하나의 끝으로 가게 될 터였다.
“지켜보겠습니다.”
유진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전투의 끝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거라고.
회귀자 유성하.
형이 가지 못한 길이 열릴 거라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는 길.”
마치 빅뱅처럼 우주를 아우르는 최초의 폭발이 세상을 뒤흔들 터였다.
유진하는 머릿속에다 성운전의 흐름을 하나씩 그려 나갔다.
대전략은 하나의 궤도를 이루듯 섬세하게 뻗어 나갔다.
“결국에는… 모든 것의 결착으로.”
세상의 흐름이 막바지로 치닫는다.
그것이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때가 되어야 확인할 수 있었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한다.’
‘신좌들은 최후의 수를 준비한다.’
그리고.
숨겨진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신좌들은…….’
그 생각이 들기 직전.
헤라클레스가 어깨를 펼치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헬라, 계속 거기서 지켜만 볼 건가?”
공중에 뜬 헬라는 아우라에서 뽑아 낸 그림자 형체들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헬라의 그림자들은 일반 성좌급에 해당하는 위력을 지녔으나, 헤라클레스의 힘은 그것들을 초월했다.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지.”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투기가 끓어올랐다.
그림자 형체들이 감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의 매서운 아우라가 발휘됐다.
“으아아아아!”
놀라운 기세로 단숨에 하늘로 뛰쳐 올라갔다.
전면에다 주먹을 내지리는 헤라클레스를 보면서 헬라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리다.”
헬라는 검은 날개를 펼쳤다.
검은빛 아우라의 거대한 날개를 배후에 발현시켰고, 검은 벽을 무수히 겹쳐서 앞에 만들었다.
“크윽!”
헤라클레스의 주먹은 검은 벽을 하나하나 부수며 나아갔지만, 끝내는 78장의 검은 벽에 막혀버렸다.
“여기는 내 권능이 지배하는 곳이야.”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헬라의 힘은 자신의 아우라가 닿는 모든 것을 지배하거나 거기서 힘을 뽑아 낼 수 있었다.
주변 전역이 헬라의 아우라에 뒤덮였다.
심지어 이곳은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우습게 보지 마라, 헤라클레스. 종말의 신화 하나 깨 부쉈다고 네가 최강인 줄 아냐?”
“크윽!”
헤라클레스가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여전히 사방은 검은빛의 아우라로 뒤덮였고 지옥의 힘은 헬라의 차지가 되었다.
이 능력은 회귀자 유성하가 189번이나 헬라에게 당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역시나 지옥의 이름을 가진 값이 있군.”
헬라의 힘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강대했기에 헤라클레스도 처음으로 감탄했다.
천지를 뒤덮는다는 감상이 어울릴 정도였다.
“전력으로 싸울 정도는 되어야 지옥의 여왕이겠지.”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더 강해졌다.
마침내 진정한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초월격
<12과업의 완성>
헤라클레스가 영웅으로 성장하기 위해 통과했던 과제들이었다.
머리에 쓴 사자 투구와 전신에 가득한 상처들은 저 과업을 수행하며 얻은 흔적이었다.
“으아아아아!”
이제까지 보였던 힘의 수십 배에 필적하는 기세를 폭발적으로 발산했다.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초월격의 아우라 <12과업의 완성>이 뻗어 나갔다.
“이게…….”
헬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 힘에 신경이 거슬렸는지, 아까 만들었던 검은 벽들을 일제히 창으로 바꾸었다.
“받아라.”
무수한 창이 쏟아졌지만, 초월격을 발휘한 헤라클레스의 기세에 닿자마자 흩어져 버렸다.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
<12과업의 완수>
제우스가 숨긴 회심의 수는 역시 헤라클레스였다.
그 자격을, 그는 힘으로 증명했다.
치솟은 두 개의 기운이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엉키기 시작했다.
헬라와 헤라클레스의 대결은 접전으로 이어졌다.
헤라클레스가 초월격의 힘으로 무엇이든 때려 부수면, 헬라는 무엇이든 막아 내려고 아우라를 뿜어냈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으아아아아!”
헤라클레스가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그 기세에 헬라도 감탄했다.
‘기본적인 아우라로 맞설 녀석이 아니야.’
눈빛을 번뜩이자 감춰 뒀던 붉은 눈이 새빨갛게 드러났다.
신격.
<분노하는 지옥의 눈>
붉은 눈에 비치는 모든 생명체에게 구속구를 채운다.
“으음?”
헤라클레스의 왼쪽 발목에 검은 족쇄가 채워졌다.
헬라의 저주계 신격이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하겠다는 건가.”
당황스러운 상황인데도 금세 냉정한 정신력으로 버텨 냈다.
신격을 꺼냈다는 건.
그만큼 헬라도 상대를 인정했다는 소리였기에 자신감이 들었다.
‘붉은 눈을 피해야겠군.’
헤라클레스는 완력만 뛰어난 영웅이 아니었다.
특유의 동물적이고 야수적인 본능이 있었다.
‘저 시야를 피하고, 돌아가서 내려친다.’
사냥꾼의 자세로 괴물 같은 헬라의 틈을 찌를 생각이었다.
카앙!
왼팔에도 족쇄가 채워졌다.
헬라의 붉은 눈에 두 번째로 걸린 모양이었다.
“쳇!”
헤라클레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어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헬라의 눈을 피해 이동했다.
“몸집이 커서 둔한 줄 알았는데, 다람쥐 같은 모습도 있었구나.”
재빠르게 따라가는 헤라클레스.
붉은 눈으로 쫓는 헬라.
이들의 숨바꼭질이 공중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찰캉, 오른쪽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졌다.
온몸을 채워 가는 족쇄가 부담스러웠으나, 헤라클레스는 조금씩 헬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여신의 자취가 어렴풋이 보였고 거의 따라잡았다.
온몸에 저주의 족쇄를 채우는 붉은 눈에 맞닿기 직전 도달했다.
“으아아아!”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헬라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작은 상처가 생긴 지옥의 여신이 부릅뜬 붉은 눈을 더 짙게 떴다.
동시에 헤라클레스의 오른 손목에도 족쇄가 채워졌다.
이제는 양팔과 양다리에 모두 족쇄가 채워졌다.
팔다리의 움직임이 전부 봉쇄됐다.
“아직이다!”
헤라클레스가 머리를 크게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최후의 일격으로 헬라의 이마와 정확히 부딪쳤다.
박치기였다.
“크억!”
초월격의 힘이 공중에서 폭발하듯이 파열음과 함께 퍼져 나갔다.
조각조각 부서지는 파편과 강렬한 충격파가 퍼져 나가 대지까지 뒤흔들었다.
“결착이다.”
마지막으로 버티는 자가 이긴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투두둑, 헤라클레스의 전신을 옥죄었던 족쇄들이 부서졌다.
“해방인가.”
헤라클레스는 한결 가벼워진 육체를 느끼며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헬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주계의 붉은 눈은 사라졌다.
“당신이 졌어.”
“…….”
영웅의 위업은 지옥의 여왕과도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막강했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는 날개를 전부 잃고 추락했고.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헬라는 붉은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그럴까?”
헬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싸움에 흥겨운 듯이 즐거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사라진 붉은 눈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기간토마키아에서의 네 싸움을 지켜봤다. 지금은 그 이상인 것 같구나.”
“지옥의 여왕에게 칭찬을 받은 건가?”
헬라클레스가 크게 웃었다.
“나는 불멸이고 여기서는 누구도 날 이길 수 없어. 지옥에서는 말이다.”
헬라의 육신은 검은빛 아우라를 빨아 당겼다.
본능적으로 어둠을 탐닉하는 지옥의 여왕에게, 이곳은 무한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너의 무지막지한 힘은 대단하다. 마경대전에서 우승해도 인정할 수 있어.”
회귀자 유성하 이후로 인정한 자는 헤라클레스가 처음이었다.
“더 싸워 보고 싶지만, 마경대전이 끝나 가는군. 다음에 또 붙어 보자.”
지옥에서 무려 헬라를 상대하고도 비등하게 맞선 헤라클레스였다.
제안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경대전이 끝나면 그렇게 하지. 대결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
라그나로크 잠재 신화를 막으려는 자.
그 위명에 걸맞은 초월좌였다.
아테나, 하데스, 심지어 헬라까지 지나치고, 마경대전의 우승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헬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다음에 나설 녀석에게 널 맡기려고 싸움을 그만 둔 거니까.”
“누구를 말하는 거지?”
지옥도의 강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바리데기와 염라대왕 정도가 남아 있으나, 저주에 걸려 돌로 굳어 버리는 바람에 완력은 늘었지만 움직임이 대폭 느려졌다.
헤라클레스와 싸우러 올 상황이 아니었다.
남은 건 72악마의 주인 정도였다.
“아마 그 녀석이랑 마경대전의 우승을 가르는 싸움을 하게 될 거다.”
헬라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호언장담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서 천천히 한 사람을 지목했다.
“저기 있다.”
하얀빛의 아우라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가 그곳에 있었다.
“유진하가 너의 마지막 상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