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마경대전(9)
“전부 탈락인가?”
마경대전에 난입했던 올림푸스의 4영웅은 마지막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한심한 녀석들.”
사자 투구를 쓴 건장한 체구의 영웅이 어깨에 육중한 망치를 멘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아킬레우스까지 당했다니.”
무적의 신화를 가진 아킬레우스.
어쩌면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라 불리는 자신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겨뤄 볼 만한 강자였다.
불멸의 존재인 녀석을 어떻게 소멸시킨 것일까.
“조금은 긴장해야겠어.”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아비규환의 지옥도>였고, 명부와 명계의 강력한 신좌들이 즐비한 세계였다.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할 것이다. 종말의 신화만 막으면 끝나는 일이니까.”
마경대전에서 우승하면 종말의 신화는 그대로 종료된다.
쿵쿵.
헤라클레스는 육중한 몸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지금까지 그가 제압한 신좌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무수히 많았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반가운 신좌들이 있군.”
헤라클레스의 앞에 두 명의 신좌가 나타났다.
하얀 날개를 펼친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와 <명계의 마왕> 하데스가 길을 막았다.
“여신과 마왕이라,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야.”
“버릇이 없기는 여전하구나.”
하데스는 긴 수염을 쓸어 담으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명계의 지배자를 앞에 두고 덤비는 영웅이 있다니.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건가?”
헤라클레스가 웃었다.
“나는 올림푸스 전체를 지배하는 제우스의 아들이니까.”
하데스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올림푸스 12신좌를 이끄는 최고신, 제우스가 헤라클레스의 든든한 배후였다.
제우스의 아들은 세상에 두려운 일이 없었다.
“나 역시 그분의 딸입니다.”
하얀 날개의 여신이 나섰다.
아테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아테나, 오랜만이군.”
“그대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헤라클레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누이가 화내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지.”
아테나를 향한 조롱이었다.
순간 아테나의 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헤라클레스의 목덜미를 스친 창의 궤적이 진하게 허공에 자국처럼 남았다.
“하하, 내 목을 노리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웃음소리가 지하 굴에 퍼졌다.
가소롭다는 듯 헤라클레스의 비웃음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여. 신좌를 모욕한 죄는 죽음으로 처벌하겠습니다.”
아테나는 하얀빛의 창과 방패를 움켜쥐었다.
헤라클레스는 한눈에 그 무기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올리브 창과 아이기스 방패인가.”
신좌가 무기를 꺼낸 이상, 모욕죄로 처벌하겠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날 여기로 보낸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당신을 막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날개를 펄럭이자 하얀 깃털이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이 흩어졌다.
올리브 창은 정확히 헤라클레스의 심장을 겨누었다.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
헤라클레스.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
올림푸스 최정상의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시작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전투의 시작 신호가 되었다.
아테나가 쾌속 돌격으로 헤라클레스에게 향했다.
“크윽!”
격렬한 파열음이 들렸다.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도 나쁘지 않은 무기였지만, 성유물급의 창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창에 닿자마자 몽둥이는 분쇄됐다.
“역시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다재다능한 여신이었다.
정의, 신념, 전쟁, 지혜, 공정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다.”
헤라클레스는 맨손 격투가 더 뛰어난 전사였다.
그가 머리에 쓴 사자도 성운을 위협할 정도의 괴물이었으나, 헤라클레스의 괴력에 당해 버렸다.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아테나에게 맞서려고 달려들었다.
“아니?!”
아테나의 허를 찌르는 반격이었다.
올리브 창은 무기를 분쇄하는 힘이 있어서, 이 창을 내지르면 웬만한 상대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찔리게 마련이다.
헤라클레스는 달랐다.
‘기회다.’
되려 달려들어 아테나의 상체를 향해 우람한 주먹을 내질렀다.
뇌리에 박히듯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이 한 방으로 여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헤라클레스는 믿었다.
“아이기스?”
아테나의 왼손에서 빛의 방패가 발휘됐다.
아이기스 방패.
아테나를 전쟁의 여신으로 만들어 준 최고의 무구였다.
“누구도 뚫을 수 없는 방패입니다.”
차분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아테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헤라클레스는 거대한 영웅이지만 아테나 역시 전투에서 강인한 신좌였다.
서로 한 수를 주고받은 지금.
본격적인 대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헤라클레스, 그대를 여기서 무릎 꿇릴 것입니다.”
아테나의 아우라가 강하게 치솟자, 하얀 날개가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헤라클레스조차 긴장하여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과연 내 누이로군.”
“그 입에서 다시는 모욕적인 말을 못 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테나가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에서 회전하며 돌격했다.
올리브 창은 헤라클레스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칫!”
예리한 찌르기에 헤라클레스는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공중에 떠서 창을 내지르니 위에서 내려찍는 느낌과 비슷했고 반격은 무리였다.
또한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비틀어 움직이는 변칙적인 움직임도 뛰어났다.
“쉽지 않군.”
빠르게 치고 빠지는 아테나의 행동은 노련했다.
주먹을 내지를 기회도 없었다.
아이기스 방패까지 있으니 어렵게 한 공격도 막힐 터였다.
“신좌들은 이래서 마음에 들어.”
위기에 몰렸지만 헤라클레스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신좌들도 두려워하던 숱한 괴물을 맨손으로 때려잡은 영웅이었기에.
‘이제 움직임이 보인다.’
그는 아테나가 휘두르는 창의 궤적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는 말 그대로 천부적인 투사였다.
아테나의 공격을 피하다가 어느샌가 손을 뻗어 올리브 창을 잡아 냈다.
“?!”
당황한 아테나의 낯빛이 차갑게 바뀌었다.
고고하던 자세는 사라지고, 창을 잡히면서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닿는 범위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누님, 기억하십니까?”
헤라클레스의 표정이 이죽거렸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올림푸스의 신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는 걸 말입니다.”
거대한 주먹이 아테나를 향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여서 아테나는 왼손에 든 아이기스 방패를 발동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상대가 헤라클레스가 아니었다면.
“누님도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던 그 전장에서… 나는 기간테스 거인들을 전부 제압했단 말입니다.”
아이기스 방패에서 파열음이 거칠게 퍼졌다.
신좌의 무구이지만 아이기스 방패는 무적이 아니었다.
헤라클레스의 힘은 방패의 방어력을 상회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으아아아아!”
영웅의 고함이 울렸다.
어퍼컷이 아이기스 방패로 막던 아테나를 올려 쳤다.
지하 굴에서 천장으로.
부서지는 천장에서 저 하늘로.
아테나는 산산이 부서지는 아이기스 방패의 파편과 함께 하늘로 날아갔다.
“으윽!”
역시나 대단한 완력이었다.
헤라클레스는 모든 성운을 통틀어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자부해도 틀림이 없었다.
지하 굴에서 튕겨 나가 하늘에 머문 아테나는 다행히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불멸이기에 죽지는 않으나 <정의와 신념의 여신>이자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라는 자존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기간토마키아에서 너희 올림푸스 신좌들은 내 뒤에 숨어 있었다.”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굴에 있던 헤라클레스가 어느새 빠르게 뛰어올라, 공중에 있던 아테나와 마주했다.
“아버지는 너에게 기대했어.”
아테나가 대답했다.
헤라클레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날 종말의 신화에서 써먹으려고만 했지.”
헤라클레스와 아테나의 전투가 하늘에서 재차 벌어졌다.
연신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며 아테나는 반격의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에게는 없는 날개를 펄럭여서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회전했다.
지상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앞서더라도 하늘에서는 아테나가 훨씬 유리했다.
“기간테스 거인들은 12신좌만을 견제했다. 너희들만 철저히 분석해서 제거하고 종말의 신화를 완성시키려고 했지.”
헤라클레스가 지상에 내려왔다.
그의 기세는 지하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제우스는 기간테스의 허를 찔렀다. 초월좌 영웅들을 키워 내서 비밀 병기로 사용했지.”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이런 영웅들을 길러 내어 기간테스의 종말 신화를 막아 내려고 계획했다.
“승리를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맞아. 덕분에 나도 태어났으니까.”
헤라클레스가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 호쾌하게 소리쳤다.
“그래서 나는 종말의 신화를 막아 낸 영웅이 되었다. 뒤에 숨어 있던 올림푸스의 신좌들이 참 볼만했지.”
아테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좌들을 조롱하는 말투였다.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까지 종말의 신화를 두 번이나 이긴 올림푸스는 결코 만만한 성운이 아니었다.
“그대의 위명은 인정하나, 경솔하고 자만하는 자세는 영웅의 풍모가 아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전투에 불려 가는 자.
어디서든 올림푸스의 명을 따라야 하는 자.
“용병이다. 그게 너희 신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겠지.”
헤라클레스는 영웅의 사명감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나섰다.
“난 마경대전에서 우승하여 지하 세계도 정복하겠다.”
명계와 명부까지 모조리 정복할 기세였다.
헤라클레스는 한계를 모르는 자였다.
공중에 머문 아테나가 날개를 펄럭이며 창을 추슬렀다.
“헤라클레스, 그대의 무례함을 여기서 끝내 주겠습니다.”
“가능하면 해 보시지.”
헤라클레스와 아테나.
마지막 결착을 앞두고 초월격과 신화격을 발휘하고 있었다.
강렬한 아우라가 위아래에서 격돌했다.
헤라클레스의 주먹.
아테나의 창.
서로에게 내지르는 일격이 강하게 마주쳤다.
결착의 순간이었다.
“…….”
부서지는 갑주와 비틀거리는 눈빛.
하얀 깃털이 흩날리며 전쟁의 여신이 무릎을 꿇었다.
“끝났다.”
무투의 헤라클레스.
종말의 신화를 막아 낸 영웅다웠다.
전쟁의 여신도 힘으로는 도무지 막아 낼 수 없었다.
“올림푸스 신좌는 불멸입니다.”
죽지는 않는다.
그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다시 부활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러나서는 안 됐다.
‘내가 사라지면 부활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유진하와 약속했던 종말의 신화가 정말로 열리면 아테나는 참가할 수 없게 된다.
부서지는 상체를 부여잡던 아테나가 흩어져 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았다.
“빨리 보내 드리지.”
헤라클레스가 서서히 아테나 쪽으로 다가왔다.
육중한 체구의 영웅이 다가오는 동안에 아테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
헤라클레스는 기세를 발휘하며 걸어갔다.
그러다 아테나를 노리던 주먹을 별안간 허공에 냅다 갈겼다.
“하데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숨은 자가 있었다.
하데스의 퀴네에 투구.
<명계의 마왕>은 자취를 완전히 감춰 주는 투구를 가져서 꽤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러나…….
제우스에 버금가는 하데스지만, 현재의 헤라클레스의 힘은 그것에 맞먹는 격을 가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허공에 주먹을 내밀자, 반경에 거대한 지진처럼 충격파가 발생했다.
하데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있을 만한 범위에 거대한 충격파를 날린 것이었다.
그 충격은 자취를 숨긴 <명계의 마왕>조차 직격이 아니어도 타격을 받을 정도였다.
퀴네에 투구가 부서졌다.
“과연 기간테스 거인들을 몰살시킨 대영웅이라는 건가?”
투구가 망가진 하데스는 긴 수염을 쓸어넘기며 정체를 드러냈다.
헤라클레스의 기세는 이미 올림푸스의 권능에 맞먹을 만큼 강대했다.
“명계의 마왕과 전쟁의 여신, 내 힘은 당신들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럴 거 같나?”
하데스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신좌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격언이 있다.”
헤라클레스는 바로 대답했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한다?”
“하나 더 있다.”
회심의 한마디였다.
“신좌들은 항상 최후의 수를 준비한다.”
<명계의 마왕>은 결코 허언을 내뱉는 신좌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하얀빛과 검은빛이 지하 굴에서 뿜어져 나왔다.
“뭐지?”
뚫려 버린 지면에서 빛과 어둠이 뒤섞인 빛줄기가 발산됐다.
헤라클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구냐?”
폭발적으로 치솟는 하얀빛과 검은빛의 흐름 속에서, 두 명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검은빛은 헬라.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하얀빛은 유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