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마경대전(7)
-난입자 <괴물의 학살자>가 소멸되었습니다.
“페르세우스, 멍청한 녀석.”
혼자서 지하 굴을 탐방하던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가 이죽거리듯이 중얼거렸다.
“괜히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 역시나 자기 꾀에 넘어갈 녀석이었지.”
사자 투구를 쓴 우람한 체격의 영웅은 육중한 해머를 들고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상대는 주로 72악마들이었다.
“벌써 9명.”
뭉특한 둔기에는 검붉은 악마의 피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악마들의 몸통 자체를 분쇄하는 강력한 힘, 이것이 그의 장기였다.
어느새 피 칠갑이 되어 악귀처럼 전장에 선 듯했다.
“익숙한 전투의 냄새다.”
전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피의 냄새와 죽어 가는 비명들이 가득했다.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전쟁과 영웅은 같은 속성이니까.”
숱한 전쟁터에서 숨겨진 영웅들이 보석처럼 태어나곤 한다.
흩뿌려지는 피.
우렁찬 함성.
전쟁은 영웅의 요람이었다.
“어차피 새로운 영웅은 또 태어나는 법이고, 나는 여기서 친구의 복수를 하면 되는 거다.”
그는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였다.
올림푸스 최고의 영웅 자리를 놓고 항상 첫 번째 손가락에 꼽혔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사자 투구는 마치 전장에서 포효하듯이 입을 크게 벌린 형태로 머리에 씌워졌다.
“내 이름 헤라클레스, 이곳 지옥도에서도 승리하여 이름을 널리 떨치리라.”
이어서 다른 메시지가 들렸다.
-난입자 <미궁의 공략자>가 소멸되었습니다.
“테세우스도 당했다고?”
페르세우스는 몰라도 테세우스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검술과 집념이 가장 뛰어난 영웅인데, 그런 녀석이 당하다니…….”
테세우스의 검술은 헤라클레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파고드는 검날.
화려한 몸놀림.
그런 영웅이 맥없이 당했다?
“믿을 수 없군. 지옥도의 마경대전이 쉬운 전장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테세우스가 패할 줄이야.”
고난을 거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심지어 테세우스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던 영웅이었다.
“하데스에게 속아서 갇힐 뻔할 걸 구해 준 적이 있었지.”
명계에서 테세우스를 구해 준 사건을 계기로 친구가 돼,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런 테세우스의 죽음을 듣자 헤라클레스는 온몸에서 강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 이곳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겠어.”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
과거 종말의 신화, 기간토마키아를 종식한 영웅.
사자 투구를 뒤집어쓴 헤라클레스가 쿵쿵거리면서 걸어갔다.
그가 지하 굴 깊이 들어갈수록 둔탁한 충격파와 비명 소리가 더욱 울려 퍼졌다.
* * *
“별거 아니군.”
헤라클레스와 경쟁하던 영웅.
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는 기다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런 녀석들이 72악마인가?”
72악마들은 모두 신좌급이었지만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에게는 가벼운 적에 불과했다.
“숱한 전장에서 이보다 더한 적들이 많이 있었다.”
63위 안드라스.
29위 아스타로트.
16위 제파르.
명성 있는 악마들이 모조리 그의 창에 꿰뚫려 사라졌다.
원래라면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라 불리는 악마의 신이 72악마의 육체에 강림하지만, 지금은 후유증이 있는지 아주 깊은 정신의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주인이 잠들자, 악마들의 위세와 격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별것도 아니군.”
물론 악마들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죽지 않겠지.”
그들은 부활한다.
불멸이다.
종말의 신화와 연관된 자들은, 라그나로크가 개방되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다.
‘올림푸스의 신좌’
‘지옥도의 신좌.’
이들은 ‘라그나로크’에서만 생과 사를 결정짓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라그나로크가 열리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들의 세계는 존속한다.
“마경대회 자체가 불행의 씨앗이기에, 내가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종말의 신화가 열리지 않게 막을 수 있다.”
잠재된 신화.
라그나로크는 마경대전에서 개방된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는 창을 움켜쥐고 결의를 다졌다.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한 그는 지금 종말을 막겠다는 목표에 집중했다.
“헤라클레스와의 승부도 중요하나, 임무가 훨씬 중요하지.”
영웅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지하 굴의 최하층에 도착해서 마경대전의 우승자가 되고자 했다.
창끝을 벽에 대며 걸어가자, 칠판에 손톱을 긁듯 날카롭게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지옥도의 무덤이 되도록,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누구지?”
마음을 굳게 다잡은 금발의 영웅 앞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신과 비슷한 금발의 머릿결.
섬세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꺼풀 속에는 푸른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이 난입자인가요?”
여자의 말투는 차분했다.
마치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했다.
“맞아, 내 이름은 아킬레우스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는 창을 들어 어깨에 살짝 걸쳤다.
수많은 전장에서 가장 위대한 공적을 쌓은 영웅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저는 에어리스라고 해요.”
에어리스가 나타났다.
등에 멘 대검을 아직 뽑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가 아니라 대화를 선호해서 먼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당신들이 물러나기를 원하고 있어요. 난입자들은 정상적으로 참여한 게 아니잖아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올림푸스의 명을 받은 네 명의 영웅은 사명감을 가졌다.
종말의 신화를 저지하고 올림푸스를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내 앞을 막을 자는 없다. 목적에 방해되는 자들은 전부 적으로 여기고 죽였지.”
아킬레우스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검을 꺼내라.”
그의 기세는 이미 초월격의 아우라를 발휘하고 있었는데, 신좌가 아닌 영웅들은 초월좌가 되어 올림푸스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쪽은 혼자인가? 72악마들조차도 뭉쳐서 덤비는데. 단독으로 나서다니 경솔한 만용 같군.”
올림푸스의 대영웅.
아킬레우스의 위명은 이미 대다수 성운에도 크게 알려진 편이었다.
‘무적’이라는 명성.
그는 불사였고 불멸이었다.
“그 용기가 마음에 든다. 한 번 기회를 주지.”
아킬레우스가 여유를 부리듯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첫 공격을 받아 주마. 어디 최대의 힘으로 후려쳐 봐라.”
어떤 타격도 입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아킬레우스가 가진 무적 신화는 극소수의 신좌와 초월좌가 가진 특성 같이 매우 희귀한 가치를 가졌다.
자만심을 가질 만했다.
“이왕이면 내 목을 베어 봐라.”
아킬레우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 말을 들은 에어리스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아우라를 개방하며 대검을 꺼내 테세우스를 겨누었다.
<뇌명의 참격>
푸른 번개의 아우라 수십 개가 에어리스의 주변에 내리치며 이리저리 꿈틀거리듯이 움직였다.
“번개의 아우라?”
수많은 신화 중 번개의 뇌명은 가장 강력한 힘으로 알려졌다.
올림푸스의 제우스.
아스가르드의 오딘.
신화급 양대 성운의 가장 강한 신좌들도 번개가 주력이었다.
“조금은 흥미가 생기는데?”
푸른 번개의 자락이 서서히 에어리스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전광석화>
전력의 속도와 베기로 나아간다.
전력을 발휘한 에어리스가 나아갔다.
푸른 번개가 감도는 대검으로 단숨에 아킬레우스의 상체를 베었다.
일격이었다.
카아앙!
마치 딱딱한 벽을 치듯이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살결을 베었다는 느낌이 아니었고, 진한 충격이 전해져 손바닥마저 저리게 만들었다.
“그게 다인가?”
아킬레우스의 눈빛은 허무하다는 듯이 고요했다.
전심전력으로 휘두른 에어리스의 대검은 무의미할 만큼, 아킬레우스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 못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적이었다.
“실망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야.”
아킬레우스는 그럴 거라고 알았다는 듯이 무시의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알겠지? 네가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을?”
무적 신화의 아킬레우스.
하지만 그의 신화는 결코 무적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들어 봤어요.”
무적 신화는 단순했다.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를 스틱스강에 넣고 숨결을 불어넣으며 무적으로 만든 것이 끝이었으니까.
<테티스의 호흡, 불멸의 가호>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잡아서 강에 넣었고, 때문에 전신을 강에 담구지 못했다.
결국, 발목은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아킬레스건이 공략할 부분…….’
널리 알려진 아킬레우스의 약점이었다.
다행히 에어리스는 유진하에게 그 신화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기회는 남아 있었다.
“하아아압!”
필사적인 기합 소리와 함께 에어리스가 몸을 비틀어 아킬레우스의 뒤로 향했다.
목표인 발목을 향해서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경쾌한 파열음이 들렸다.
에어리스의 베기가 정확히 아킬레우스의 약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다들 내 발목이 약점인 것으로 알고 있더라?”
아킬레우스의 표정에서 묘한 미소가 번져 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설마 내 어머니인 테티스 여신이 그렇게 멍청하리라 생각했어?”
에어리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나를 스틱스강에 넣었다. 그런데… 밧줄을 이용하면 온몸을 넣을 수 있잖아.”
실제로 아킬레우스는 밧줄에 묶여서 강에 전신을 담갔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왜 발목이 약점이라는 헛소문이 퍼진 걸까.
“아주 쉬운 일이지. 발목 얘기는 내 어머니가 일부러 헛소문을 퍼트린 거야.”
거짓된 신화.
아킬레우스는 ‘위장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무적의 약점이란 달콤한 거짓말을 해 놓으면, 적들이 아주 쉽게 걸려들거든.”
어머니 테티스의 혜안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일부러 멍청이라는 오명을 감수한 것이었다.
실제 아킬레우스는 약점이 없는 무적이었다.
“이제 알겠어? 신좌들의 손바닥에서 너희는 놀아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아테나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성운전의 숨겨진 본질이었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한다.’
큰 충격이 닥칠 무렵.
아킬레우스의 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신화격
<테티스의 호흡. 불멸의 가호>
초월격
<전능적 창술의 길>
미친 듯이 몰아치는 창술이 에어리스의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아아악!”
에어리스는 저 멀리 튕겨 나가서 지하 굴의 벽면에 강하게 부딪쳤다.
양 무릎을 꿇었으나 다행히 대검을 땅에 꽂아서 쓰러지지 않고 버텨 냈다.
“쿨럭.”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에어리스가 상대할 만한 격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창술의 영웅이자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테티스의 호흡. 불멸의 가호>가 있어서 무적이었다.
‘완전무결.’
함부로 붙이기 힘든 수식언을 공공연히 입에 달고 사는 영웅.
아킬레우스는 압도적인 존재였다.
“허억, 허억.”
지친 기색으로 비틀거리는 에어리스가 포기하지 않고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푸른 번개는 아직 전신에 서려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끝나지 않았어요.”
아킬레우스가 종말의 신화를 막겠다는 사명감이 있다면, 에어리스도 어머니와 자매들을 지키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마경대전을 초토화시켜서 종말의 신화를 막고 모든 존재를 가지고 노려는 올림푸스의 영웅.
무적의 신화를 가진 아킬레우스를 상대로 에어리스는 다시 대검을 들었다.
에어리스 대 아킬레우스.
전투가 결말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