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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96화 (196/229)
  • 196화 마경대전(4)

    조커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악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서열 69위 벨리알은, 승리에 도취되고 약자를 경멸하는 습성을 가졌다.

    “약자는 죽어야 한다.”

    세상의 존재 가치를 오로지 강함의 여부로만 판단했다.

    그런 그에게 빛의 아우라를 머금은 유진하가 말을 걸었다.

    “승자의 법칙이라는 건가요?”

    시큰둥한 말투.

    진심으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악마와의 대화는 유쾌하지 않았고, 더 길게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을 신봉한다면…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겠죠?”

    자신감이 아닌 자만심을 가지면 방심하게 되고, 결국 빈틈을 허용하게 한다.

    벨리알도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방심한 악마의 등 뒤를 파고들었다.

    “크억!”

    쌍단검으로 벨리알을 강하게 찔러 배후에서 기습했다.

    조커의 짓이었다.

    “어째서? 너는 죽었는데?”

    “분신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자신과 동일한 분신을 만든다.

    “아까 너와 싸운 건 미끼였다.”

    벨리알은 입에서 피를 쏟아 냈다.

    사실 72악마라면 악마의 눈이 있어 허상 같은 환상에 속지 않는다.

    일반적인 분신이라면 신기루처럼 악마의 눈에 바로 걸렸겠지만, 조커가 발현된 아우라는 본체와 완전히 동일하게 보인다.

    그걸 모르고 악마가 배후를 내보인 건 명백한 방심이었다.

    “전투에서 상대를 얕본다는 것은 패배의 길이지.”

    조커가 얕게 웃었다.

    리더 유진하는 조커의 진정한 강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일대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략과 함정도 즐긴다.

    막강한 전투력은 기본이고, 능수능란하며 변화무쌍한 적응력까지 겸비했기에 ‘행동의 자유’를 준 것이었다.

    “죽어라.”

    조커의 쌍단검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벨리알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정면으로 붙었다면 승산은 높지 않았겠지.”

    조커가 짧은 소감을 남겼다.

    상대는 72악마.

    일반 신좌에 견줄 만한 강자였기에, 정면 승부에서의 승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몸일 테니, 다시 나타나면 또 죽여 줘야겠군.”

    종말의 신화가 발동하지 않았기에 벨리알은 곧 부활할 터였다.

    “그쪽도 내가 맡을까?”

    조커는 새로운 적을 주목했다.

    일행의 배후에 나타난 세 명의 악마가 불온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쪽은 우리가 맡을게요.”

    유진하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듯 흔들었다.

    “그래?”

    유진하의 말을 들은 조커는 악마의 피가 묻은 칼날을 소매로 닦아 냈다.

    전투를 마칠 때마다 본인 특유의 루틴처럼 검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럼 그쪽은 맡겨 두지.”

    용건을 마친 조커가 홀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서열 62위 발라크.

    서열 56위 그레모리.

    서열 49위 크로셀.

    악마 셋을 놔두고도 여유로운 대응이었다.

    “에어리스.”

    유진하는 상황을 파악했다.

    이쪽도 숫자는 충분했다.

    대검의 에어리스.

    생환검의 레다.

    영류검의 유나.

    쌍둥이 세 자매는 검을 들고 악마들에 맞설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에어리스는 <뇌명의 참격> 푸른 번개의 아우라를 전신에 발현시켰다.

    “최선을 다할게요.”

    푸른 번개가 찌릿거리면서 에어리스의 온몸을 휘감았다.

    <전광석화>

    전속력으로 번개처럼 움직이며 악마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금!”

    원심력을 이용하기 위해 온몸을 빙글 돌리면서 대검을 휘둘렀고, 휘둘러진 대검은 전방위를 쓸며 베어 버렸다.

    “크으윽!”

    세 명의 악마 중 서열 62위 발라크에게 번개가 적중했다.

    한 바퀴를 돈 에어리스는 재차 베기를 이어 갔다.

    퍼억!

    둔탁한 대검의 공격이 발라크 육체에 연이어 작렬했다.

    푸른 번개의 아우라가 계속해서 악마의 육체를 이리저리 터트렸다.

    “크아아아악!”

    악마가 고통 속에 내지르는 비명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발라크가 마지막 힘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대검에 막혔다.

    “…젠장.”

    치명상을 입은 발라크는 스르륵 사라져 갔다.

    에어리스는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악마의 자취를 바라봤다.

    “후우.”

    몰아치는 에어리스의 위력은 이전보다 훨씬 빨랐고, 매서웠다.

    명부에서 실전 같은 수련을 벌이며 실력을 상승시켰기에, 신좌급인 72악마들과도 맞설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서열 56위 그레모리와 서열 49위 크로셀은 크게 놀라 동시에 높이 뛰어서 대검의 궤적을 피했다.

    하지만 거기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내 차례야.”

    이때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다.

    레다가 자신의 특성을 발현시켰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소환한다.

    “전갈자리.”

    레다의 배후에 전갈자리가 발현됐다.

    배후에 전갈자리를 발현할 경우 검으로 한 번 벤 대상의 육체를 1분간 구속시킬 수 있었다.

    명부에서의 수련을 마친 지금은 원래 위력보다 강해져 일반 신좌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젠장! 구속력인가?”

    서열 56위 그레모리가 레다의 검에 베여 구속력에 걸렸다.

    마치 족쇄에 온몸이 묶인 듯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 틈에 레다의 하얀 검이 빛을 발했다.

    촤악!

    악마 그레모리의 목을 정확히 베었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피.

    두 눈을 부릅뜬 악마의 머리.

    서열 56위 그레모리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젠장!”

    순식간에 72악마가 당해 버리자, 유일하게 남은 서열 49위 크로셀은 혼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분이 강림하시면 된다.’

    악마들의 주인이자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72악마 중 누구의 육체에도 강림할 수 있는데, 그분이 온다면 전세는 단숨에 바뀔 것이다.

    “제발!”

    악마답지 않지만 구원을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운수가 나빴다.

    “아!”

    악마 신은 현재 다른 수하에게 강림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와 싸우던 악마의 몸에 들어가 있어 여기로 올 수 없었다.

    “젠장할!”

    비통한 비명이 나올 즈음에, 유나의 영류검이 악마 크로셀의 몸을 관통했다.

    “반응이 늦네.”

    유나가 싱긋 웃었다.

    에어리스가 발산한 푸른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 탓에, 크로셀의 움직임은 제한적이었고 기회를 기다리던 유나에게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역시… 언니들이랑은 호흡이 잘 맞는다니까.”

    유나는 진흙으로 만든 임시 몸을 받았다.

    명부의 염라대왕에게서 받은 건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시오류…….”

    유나가 작은 목소리로 호흡하듯이 중얼거렸다.

    어머니 시오의 곁에 끝까지 남아 검술을 배운 덕분에, 유나의 검술은 완성형 기술에 가까웠다.

    “수라 베기.”

    어머니에게서 검술의 최종기까지 완벽하게 습득한 유나였다.

    ‘수라 베기’는 시오류의 최종기답게 엄청난 위력을 보이며 크로셀의 몸을 단칼에 갈라 버렸다.

    “크어어억!”

    72악마는 일반 신좌급에 비견되나, 세쌍둥이도 초월좌의 아이들이었다.

    범상치 않은 재능이 있었다.

    “끝냈다!”

    악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유나가 두 팔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언니들 내 실력 괜찮았지?”

    “잘했어. 멋진 마무리였어.”

    레다가 유나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안아 주었다.

    세 자매는 어느새 일취월장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흐음, 저게 자매라는 거구나.”

    이소민은 뭔가 깨달은 얼굴로 자매들을 지켜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제자매와 함께 싸운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몰랐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조금씩 알 거 같았다.

    “나도 동생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일어설 때도 됐고.”

    이소민은 누구보다 뛰어난 정신력으로 팀의 비타민 같은 활력소가 되어 주고, 돈에 집착이 있어 물품 수집을 도맡았다.

    그녀가 처음부터 돈을 원했던 이유는 동생의 병원비와 돈 없는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전부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 이루고 싶은 일이 남아 있어.”

    이소민은 초기 목적을 분명 이루었으나 아직 이루고 싶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나도 좀 활약할 여지가 있으면 좋겠는데.”

    팔뚝에 힘을 불끈 쥐면서 이소민이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도 명계에서 혹독한 수련을 벌였고 나름의 성취도 있어서 꼭 보여 주고 싶었다.

    ‘모두와 함께 돌아가는 것.’

    그걸 위해서 유진하, 에어리스와 끝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이소민 누나,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모두가 함께 귀환하는 것.’

    ‘무사히 돌아와서 함께 지내는 것.’

    이소민만의 목적이 아니라, 유진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성운전에 들어온 지금.

    이 길의 진정한 끝으로 가야만 영원한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형이 가던 길과 다른 길…….’

    회귀자 유성하가 끝까지 가려던 성운전의 마지막 길.

    그것만이 진정한 결말을 보게 해 줄 거라 생각했다.

    세쌍둥이와 어머니 시오의 생존.

    잠재 신화, 라그나로크의 개방.

    “종말의 신화 너머에 끝이 있을 거야.”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는 어쩌면 굳게 닫혀 있는 문과 비슷했다.

    그 문이 열리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

    반대로…….

    문을 닫혀 있기를 바라는 자도 존재한다.

    -난입자가 발생했습니다.

    “누군가 왔다?”

    새로운 존재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변이 벌어졌다는 걸.

    마경대전에 참가한 모두가 알아차렸다.

    -난입자는 네 명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 <괴물의 학살자>

    - <트로이 전쟁의 승리자>

    - <미궁의 공략자>

    - <기간토마키아의 종결자>

    마경대전에 난입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의 수식언을 듣자 유진하는 곧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올림푸스에서 보낸 자들이야. 4대 영웅을 전부 다 이곳에 보내다니.”

    난입자 네 명은 올림푸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들이었다.

    신화를 잘 안다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새로운 과제가 부여됩니다.

    난입자를 퇴출시키거나 소멸시키십시오.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모두가 잠시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된 에어리스가 조용히 눈치를 살폈다.

    유진하는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했다.

    “녀석들은 종말의 신화가 개방되지 않도록 우리를 막으려고 온 거야. 올림푸스는 이제 지켜보지 않을 생각인 거지. 최고의 영웅들을 보내서 승부를 걸었어.”

    올림푸스의 개입.

    마경대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올림푸스 성운이 본격적으로 간섭하자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올림푸스>

    <아비규환의 지옥도>

    거대 성운이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세상의 틀이 뒤틀리고 있었다.

    유진하는 변해 가는 흐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불안한 소식이지만 오히려 안심도 되네.”

    “진하?”

    에어리스가 놀란 눈으로 유진하를 쳐다봤다.

    “저들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내 방법이 옳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유진하는 평소와 다르게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이제 확신이 들었어.”

    올림푸스가 긴장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다는 소리였다.

    절체절명의 승부.

    걸출한 올림푸스 영웅들이 등장하며 <아비규환의 지옥도>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 * *

    외팔의 검사.

    시오는 허공을 바라보며 차분한 눈빛을 지었다.

    “올림푸스가… 가까워졌어.”

    까마득히 멀리 있던 존재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했다.

    <신멸의 구도자>인 그녀는 자신이 노리던 상대들과 만날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너희들을 사냥할 날만 기다려 왔다.”

    시오는 하나 남은 팔로 귀혼검을 높이 들어 위를 겨냥했다.

    대변혁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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