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마경대전(3)
아테나의 하얀 날개가 어둠의 소용돌이에 침식되고 있었다.
‘소멸하지 않지만 갇힐 수는 있다.’
어쩌면 영원한 지옥은 죽지 않은 채로 머무르는 감옥이 아닐까.
상대는 72악마의 신.
그는 마신이라 불리는 자였고, 부하들의 육체에 강림하여 싸우고 있었다.
“누구도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건 정의와 지혜의 여신인 너도 마찬가지다.”
서열 69위 데카라비아의 육체를 빌린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는 자신의 신격을 오롯이 발산하고 있었다.
올림푸스의 최상위 12신좌 아테나조차 혼자서 맞설 격이 아니었다.
“으윽!”
아테나는 어둠 속으로 휩싸여 갔다.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있었으나, 점점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수많은 손이 나타나서 발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듯했다.
철썩철썩.
마침내 아테나의 얼굴마저 침식되었다.
끝없는 심해 속으로 끌려 들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듯.
깊은 심해 속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죽음처럼 영원히 가라앉는다.’
시오에 이어 아테나마저 죽음의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였다.
파앗!
서열 69위 데카라비아의 등을 꿰뚫는 일격이 작렬했다.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 기척을 완전히 감춘 기습이었다.
“너는……?”
데카라비아가 입가에서 피를 토해 내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건장한 남자가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명계의 마왕>인가?”
올림푸스에서 독립된 성운.
명계의 지배자 하데스가 퀴네에 투구를 쓰고 서 있었다.
퀴네에 투구
-사용자의 모습과 기색을 완벽하게 감춘다.
악마들은 천하 만물을 꿰뚫는 눈을 가졌지만 퀴네에 투구가 지닌 투명 효과까지 볼 수는 없었다.
퀴네에를 쓴 하데스는 악마들에게 절대 발견되지 않기에,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웠다.
“너는 마신의 매개체에 불과하지?”
서열 69위 데카라비아에게 일격을 날린 하데스에게 주저함은 없었다.
악마의 육체에 강림하려면 연결된 아우라의 끈이 있어야 한다.
하데스는 단숨에 그 끈을 끊어서 연결을 차단했다.
“크억!”
데카라비아는 가슴이 뚫리는 큰 충격을 받고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72악마이니 죽지는 않을 터였다.
“다음에 보자.”
하데스가 손에서 아우라를 모았다.
<명계의 마왕>이 발휘한 파동은 순식간에 서열 69위 데카라비아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크아아악!”
먼지와 파편이 되어 흩어졌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종말의 신화가 발동하지 않으면 72악마가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시간을 벌 순 있겠지.”
하데스의 긴 수염이 잠시 휘날렸다.
퀴네에 투구를 옆구리에 낀 하데스는 바닥에 누운 아테나의 신변부터 확인했다.
“아테나, 괜찮은 거냐?”
“네.”
다행히 아테나의 상태는 무사했다.
“위험했다. 만약 저 지옥의 심해에 끌려갔다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어.”
심해에서 빠져나온 자는 아테나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하얀 도복을 입은 자가 물에 젖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미 심해 속에 잠겨 있던 자였다. 널 구할 적에 같이 꺼내왔지.”
아테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신멸의 구도자>네요.”
하얀 도복을 입은 금발의 여인.
앞서 마신의 손아귀에 의해 지옥의 심해 속에 갇혀 있던 시오는, 하데스 손에 이끌려 간신히 위로 끌어 올려졌다.
“들어 본 적이 있다. 신좌들을 죽이려는 자라고 말이다.”
하데스가 긴 수염을 만지면서 허리를 폈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
왼팔을 잃은 검사.
시오의 명성은 <명계의 마왕>에게도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신좌들의 적으로 알려진 자를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들었지만 눈치를 챈 아테나가 단호하게 말렸다.
“꼭 필요한 자입니다.”
물에 젖은 날개를 가다듬던 아테나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마경대전의 우승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테나는 올림푸스 소속임에도 명계의 소속으로 바꿔 ‘종말의 신화’에 참가했다.
“성운전의 대변혁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운전은 신좌들이 즐기는 게임처럼 변해 버렸고,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만이 고통스럽게 반복됐다.
아테나가 보기에 지금의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는 타락한 성운에 불과했고, 성운전 자체도 억압적이고 불합리한 지배 체제로 변질되었다고 여겼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려면 기존 체계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혁명은 피를 원했다.
“거기에 이 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냐?”
하데스의 물음에 아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멸의 구도자> 시오는 필수 불가결인 존재였다.
레다, 에어리스, 유나.
세쌍둥이의 어머니였기에 그녀의 죽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회귀자 유성하가 한 번도 구해 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죽으면 세쌍둥이 자매들은 결코 제대로 된 초월격으로 각성하지 못합니다.”
회귀자는 외로운 싸움을 거듭했다.
주변의 조력자들은 있었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하나씩 죽어야 했다.
지금은 달랐다.
회귀자는 뒷일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겼고, 그는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유진하…….”
아테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인 그녀가 3회전에 심판관으로 참여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여기가 ‘승부처’라고 여겼기에… 지켜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세쌍둥이 자매들이 전부 살아 있는 미래와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기적처럼 맞이한 기회였다.
“유진하는 종말의 신화를 발동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데스로서는 아테나가 신뢰하는 유진하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지혜의 여신이라 불리는 아테나의 식견을 믿을 따름이었다.
“종말의 신화를 개방하면 명계도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지옥도에서 해방될 수 있지.”
<명계의 마왕>은 올림푸스를 붕괴시키기를 원했다.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다.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
올림푸스와 성운전의 멸망을 원했지만, 모든 세계의 종말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최선은 라그나로크를 일으켜 올림푸스만 멸망시키고, 세계의 종말을 막는 거다.’
하데스는 고민했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많았어.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모두 비참했지.”
아테나도 동의했다.
“알고 있습니다. 신좌들은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니까요.”
회귀자조차 신좌들의 놀잇감에 불과했다.
유성하 이전의 회귀자들은 항상 성운전에 도전했지만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처럼 그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다가 버려졌다.
“이제는 다를 겁니다.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아테나는 옆에 누워 있는 외팔의 검사를 쳐다봤다.
<신멸의 구도자> 시오는 원래 3회전에서 죽을 자였지만 지금은 살아 있었다.
기적처럼 겨우 잡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것이었다.
“최상위 성좌들은 회귀자의 흐름을 전부 지켜보고 있습니다. 회귀자들이 결국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죠.”
여러 번의 기회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한 번이었다.
지금이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다음은 없을 겁니다. 이제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해요.”
대전략을 설계한 사람은 유진하였다.
그는 심연에 있을 적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얘기했다.
“종말의 신화를 개방하는 조건을 생각해 봤어요.”
첫 번째, <마경대전>에서 시작되어 <라그나로크> 신화로 이어진다.
두 번째, 필수 불가결한 존재들이 참가해야 한다.
“마경대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참가자가 있습니다.”
심판관은 염라대왕.
명부의 바리데기.
명계의 하데스.
헬헤임의 헬라.
72악마와 악마들의 신.
종말의 신화에 얽매인 존재들이 반드시 마경대전에 참가해야 종말의 신화를 발동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테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려다가 이내 다물었다.
모든 것을 말했다가는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성운전의 최상위 신좌들이 다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아테나의 의중을 눈치껏 알아차린 하데스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해의 물기를 털어 낸 아테나가 하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정의와 신념의 여신>다운 자태를 다시 회복하고 전의를 가다듬었다.
“이제 목표는 가까워졌어요.”
“악마들의 신을 찾아야겠군.”
“맞아요.”
퀴네에 투구를 든 하데스조차 난감하다는 듯이 당혹스러웠다.
72악마들의 신.
마신이라고도 불리는 존재와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72악마들의 육체를 빌려서만 강림하는 녀석이다. 진짜 육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왜 그런 걸까요?”
“모르지. 아무도 녀석이 왜 그러는지 모른다.”
지하의 혈투가 예정됐다.
72악마들에게서 강림하는 악마 신을 찾아내야 하는 과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이 부족하겠군. 어려운 승부가 되겠어.”
<명계의 마왕>조차 난제로 인식하는 과업이었다.
72악마의 육체를 오가면서 강림하는 존재를 대체 무슨 수로 찾아내겠는가.
심지어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가 발휘하는 격은 아테나와 하데스조차 정면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낼 수 있어.”
하얀 도복을 입은 시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신멸의 구도자>는 마신과의 정면 승부에서 철저히 패배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의지를 잃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본 건가?”
하데스는 시오의 행색을 바라봤다.
귀혼검을 챙기며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그녀는, 마신이 끌어당긴 지옥의 바닷속에 잠들어있었다.
까마득한 어둠의 바다.
깊은 심해 속에 갇혀 있었다.
“거기서 녀석의 진체를 보았어.”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는 심해 바다의 밑바닥에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녀석의 진체가 머무는 아지트였다.
“…녀석을 보았지.”
어둡고 고요한 심해.
물거품 속에 있던 자.
가장 차갑고 깜깜한 곳에서 악마들의 신이 홀로 있었고,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오는 악마들의 주인을 보았으나 녀석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누구도 올 수 없는 곳으로.
더 깊은 아래로.
* * *
툭, 투둑.
조커가 전방에서 돌아올 때마다 품에 괴물들의 머리를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우와, 소름이 끼치네.”
이소민은 닭살이 돋았다는 듯이 두 팔을 비비적거렸다.
“이게 선봉의 역할이다.”
천부적인 전투력을 가진 실력가답게 조커의 단검술과 판단력은 확실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녀석들을 혼자서 다 때려잡네.”
이소민은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괴물들의 머리를 대충 피하면서 말했다.
전투를 마친 조커는 단검에 묻은 피를 팔꿈치로 쓱쓱 닦아 냈다.
전신이 이미 괴물들의 피로 물들어 버린 상태임에도 무기 손질에 집중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유진하가 만류했으나 조커는 싸움을 계속 갈구했다.
“72악마들을 상대하고 싶다.”
역시나 전투를 원하는 조커다웠다.
산해진미를 끝없이 갈구하는 미식가처럼 조커는 끝없이 전투를 갈구했다.
에어리스의 어머니, 시오와는 다른 이유로 신좌들을 상대하길 원했다.
순수한 전투 의지였다.
“조심해요. 무언가 오고 있어요.”
멀리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에어리스가 경계심을 내비쳤다.
“…내가 갔다 오지.”
조커도 적의 기운을 느꼈는지 걸음걸이를 재촉했다.
선봉을 맡은 그는 유진하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자유로움이 조커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킬 방법이기에, 유진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항상 그렇게 조커의 행동을 풀어 줬다.
풀어 놓은 야수처럼.
조커는 구속에서 벗어 나야 강했다.
카앙! 캉!
자청해서 전방의 어두운 곳으로 다가갔다.
단검의 칼날 소리가 울려 댔다.
다들 조심스럽게 숨을 죽여 전면을 응시했으나 어둠 속이라 자세한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불온한 기운.
차갑고 날카로운 적의.
일순간 분위기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고, 낯선 자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다들 조심해.”
레다와 유나가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검을 꺼냈다.
건너편에 나타난 자는 72악마였다.
서열 68위 벨리알이었다.
“저건?!”
에어리스는 벨리알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머리였다.
자세히 보니 조커의 머리였다.
“조커가 당했다?!”
전원의 몸에 소름이 끼쳤다.
전투력에서는 자신감이 넘치는 조커조차 맥없이 당할 정도의 강자.
서열 68위 벨리알은 손에 묻은 피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더 있어?”
이소민이 뒤에서 똑같은 자취를 느꼈다.
저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서열 62위 발라크.
서열 56위 그레모리.
서열 49위 크로셀.
악마들의 그림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처럼 72악마들이 앞뒤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툭.
벨리알이 던진 조커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너희가 사냥당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