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마경대전(2)
“허억, 허억.”
<마경대전>은 항상 최하층에서 결판나곤 했다.
지하 1층부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
지독한 비명.
“다시 만났군.”
머리에 뿔이 달린 존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는 72악마에 속한 자였다.
“71악마 단탈리온인가.”
하얀 도복을 차려입은 외팔의 여검사가 녀석의 살기를 느끼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죽지 않는 불멸인가.”
“크크, 종말의 신화가 안 열리면 우리는 영원불멸이니까.”
71악마 단탈리온은 이미 한 번 시오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검에 갈기갈기 찢어졌으나, 불멸의 능력이 있는 신좌급이라서 다시 부활했다.
“최상위 신좌나 너희 같은 72악마 급을 죽이려면, 라그나로크 신화가 정말 필요하겠어.”
종말의 신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죽일 수 없다.
성운전의 법칙 때문이었다
외팔의 검사, 시오의 매서운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죽어도 살아난다면 다시 죽이면 돼.”
“크크, 그게 가능할까?”
하얀 옷자락을 들어 올린 시오는 검을 움켜잡고 전투 자세에 들어갔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매년 우승자를 가르는 ‘마경대전’.
72악마는 이 길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적이었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은 자리에 없나?”
71악마 단탈리온은 헬라를 의식했다.
시오는 혼자였다.
“서로 연합이지만 각자 움직이는 편이 나아. 그래야 훨씬 폭넓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신멸의 구도자>라는 수식언을 가진 시오는 악마들을 두려운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72악마는 ‘일반 신좌급’이었고, 그 정도면 굳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크크크크,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거 같은데.”
71서열 단탈리온이 양손에서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악마의 격.
<비틀리는 뿔의 함성>
악마의 전신에서 두 개의 아우라가 공명하듯이 맹렬하게 발산됐다.
주변 반경을 모조리 뒤흔들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그 막강한 힘의 아우라 앞에서도 시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잠잠히 있었다.
“그 정도로는 나한테 피해를 줄 수 없어.”
태연하게 귀혼검을 뽑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검을 움켜쥔 시오의 손이 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참격.
참격에는 단숨에 단탈리온의 아우라를 갈라 버릴 기세가 담겨 있었다.
촤악!
악마를 가르려는 찰나.
녀석에게 알 수 없는 위화감을 강하게 받았다.
“……?”
이전과는 다른 무시무시한 아우라.
71악마 단탈리온의 힘이 아니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저편에서 서서히 몰아치는 기운처럼 음습하게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근원적인 어둠.’
격이 다른 차이.
72악마가 발휘할 힘이 아니었다.
“72악마의 주인?”
신좌급 72악마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자.
악마의 신.
마신이라 불리는 자.
단탈리온의 육체에는 악마의 신이 발산하는 기운이 휘감기고 있었다.
“힘을 빌렸지.”
입꼬리를 올리던 단탈리온.
이제는 단탈리온이라 부를 수 없이, 전혀 다른 미지의 존재가 녀석의 육체를 매개체로 삼아 강림하고 있었다.
“당신이……?”
시오의 눈빛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다.
강림한 악마의 신.
단탈리온은 자신의 육체를 그들의 신에게 맡겼다.
“나는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
목소리부터 바뀌었다.
어둡고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지옥의 끝자락에서 작게 속삭이면서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힘이었다.
“큭!”
<신멸의 구도자> 시오조차 처음 겪는 압박감이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근원적인 어둠의 힘이 거대한 압박을 주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마치 어두운 낭떠러지로 무한히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72악마에는 내가 강림할 것이다. 너는 그 첫 번째 제물이 될 것이니…….”
단 한마디.
그것은 명령이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쿠웅!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악마의 신의 강림.
마경대전의 시작부터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 *
“어머니?”
에어리스는 순간적으로 소름을 받았다.
“기운이 사라졌어?”
어머니 시오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쌍둥이 자매인 레다와 유나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진하, 무언가 있는 거 같아요.”
지하 1층.
들어오자마자 큰 변화를 느끼기는 유진하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난관이 등장한 듯했다.
“72악마급이 아니다.”
조커도 얼굴에 쓴 백가면을 만지는 손가락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는데, 상대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낀 듯했다.
강자의 등장을 인식한 것이다.
“그 이상이라는… 거네요?”
유진하는 걸음을 멈췄다.
한 번 발휘됐던 그 전율의 기운이 지진파처럼 퍼져 나갔고, 모두가 그 여파를 느끼고 있었다.
“지하 전체를 뒤흔드는 힘…….”
본능적인 위협.
다들 정면으로 싸워서는 안 되는 힘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뭐, 어떻게든 가 보면 알겠지?”
이소민이 일행 중 유일하게 씩씩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외로 가장 대범하게 앞장서서 나아갔다.
“다들 뭐해? 어차피 지하로 계속 내려가야 하잖아.”
가장 먼저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 이소민을 보면서 루나는 아리송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언니는 안 무섭나?”
정신력 최강.
이소민의 진가는 절대 겁먹지 않는 마인드에 있었다.
일행에서 모두의 정신력을 보강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유나는 처음 봐서 굉장히 낯설게 받아들였다.
“아까 그 막대한 기세를 느끼고도 태평하다니. 저 언니도 의외로 대단하다.”
뒤에서 수군거리든 말든.
이소민은 밝게 웃었다.
“나는 내 갈 길을 갈 거야. 기운이 뭐 어쩌라고?”
모두가 두려움에 전염돼 혼란스러워할 수 있었는데, 이소민의 긍정적인 정신력으로 문제없이 해결되었다.
“우리도 가요.”
유진하가 콧잔등을 만지며 뒤이어 따라갔다.
전투 의지를 다시 되찾은 조커도 합류했다.
“내가 앞서가지.”
원래부터 제일 선봉에서 싸웠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
쌍단검을 챙긴 조커가 빠르게 나아가며, 먼저 앞서가던 이소민을 금방 따라잡고 역전했다.
“우앗!”
“너는 뒤로 물러나라. 선봉장은 내 역할이니까.”
순식간에 나아간 조커는 지하 1층의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누군가의 짧은 비명이 몇 차례 울렸다.
에어리스가 경계심을 내비치며 대검을 움켜쥐었다.
“진하,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 같아요.”
“…괜찮을 거야.”
에어리스와 레다가 조커를 지원하러 나가려고 하자 유진하는 두 사람을 제지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어느새 잠잠해진 언저리에서 조커가 이미 죽은 괴물의 머리를 몇 개 들고 왔다.
툭.
“자기가 사냥꾼일 줄 알더군.”
이들은 전방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정을 판다는 건 상대를 먹잇감으로 우습게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적을 정면에서 압도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정면 대결로 압도할 자신이 있다면 함정 같은 것을 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적들이 파 놓은 함정을 보자마자 조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지 않다.’
그래서 자신도 속임수를 파 역으로 이용해서 전부 죽일 계략을 세웠다.
계산은 적중했다.
바닥에 깔아 둔 함정에 빠진 척 연기를 하자, 숨어 있던 세 명이 고개를 내밀고 나타났다.
“어리석은 녀석들이었다.”
조커는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쑥 내민 그들의 머리는 단칼에 베어 버렸다.
“72악마급이 아니라면 이곳의 적들도 상대할 만해.”
“그런 거 같네요. 다만, 함정을 파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주의해야 해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다듬던 조커가 여유를 되찾았다.
지하 1층부터 어딘가에는 72악마가 있을 터였다.
그때를 위해 힘을 아껴 둘 필요가 있었다.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요.”
72악마 중 누가 악마의 신인지 알아내려고 했으나, 이미 그자는 자신의 진정한 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진하, 어떻게 할까요?”
“분산해서 72악마를 잡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뭉쳐야겠어.”
작전이 바뀌었다.
에어리스의 어머니, 시오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것을 위기 신호로 해석했다.
‘강대한 적의 존재를 인정하고 힘을 모은다.’
유진하는 마경대전에 참가하기 전, 시오에 견줄 실력자들을 포섭해 놨다.
명부의 바리데기.
헬헤임의 헬라.
올림푸스의 아테나.
명계의 하데스까지 영입한다면 이쪽의 멤버도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악마들의 주인이 근처에 있어.”
바리데기와 헬라도 각각의 장소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경계심을 올렸다.
그즈음.
움직임이 유독 적은 쪽이 있었다.
격돌은 그곳에서 벌어졌다.
* * *
“당신은?”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는 잃었던 왼팔과 날개를 회복하며 모든 힘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자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69서열 데카라비아…….”
여성향 악마.
데카라비아는 길쭉한 다리를 내밀고, 손등으로 턱을 받치는 매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악마의 이마에 솟아오른 붉은빛의 뿔이 정전기처럼 찌릿거렸다.
“그쪽은 올림푸스가 자랑하는 전쟁의 여신이네?”
올림푸스의 12신좌라면 최상위 성좌였다.
72악마라고 해도 평범한 신좌급에 불과하니 원래라면 물러서야 정상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테나 정도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는데?”
물론 아테나도 불멸이었다.
종말의 신화가 발동하지 않은 이상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배후에… 누가 있군요.”
아테나는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무훈을 달성한 여신이었다.
아레스도 전쟁의 신이지만 아테나 역시 전쟁의 여신을 맡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려운 상대는 없었다.
“69서열 데카라비아의 육체에 강림한 그대의 정체를 드러내십시오.”
아테나는 신좌의 격을 발산했다.
여신이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내도 데카라비아는 그윽한 눈빛으로 일관했다.
여유로웠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이죽거리는 입가.
아까처럼 몸을 비비 꼬던 데카라비아는 서서히 자세를 풀면서 당당한 모습이 되어 갔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69악마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시공간을 밀어 버리듯이 허공을 툭 건드리자,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놓듯 공중에서 막대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크윽!”
<정의와 신념의 여신> 아테나의 신격조차도 그 위력에는 똑바로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평범한 악마의 힘이 아니야. <근원적인 어둠의 존재>가 발휘하는 신격이라면……?”
소문으로만 들었다.
악마들의 신, 마신이라 불리는 자는 끝이 없는 무저갱으로 육체를 빨아들이듯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블랙홀이 무수히 펼쳐진 듯.
온몸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대체 이건……?!”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
그 아테나조차 절망적인 듯이 무릎을 꿇고 절망을 맞이하고 있었다.
72악마들의 신.
마신이라 불리는 그는 수하의 육체에 강림할 수 있었다.
진정한 본체가 아니라 부하의 육체를 빌렸음에도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올림푸스의 신좌 하나가 정면으로 맞설 상대가 아니었다.
“크윽!”
어둠 같은 소용돌이가 서서히 아테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사라져 가는 잔재처럼.
시오에 이어 아테나마저 어둠의 저편에 잠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