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명부(7)
수백 개가 넘는 봉우리에 끼어 있는 안개는 천연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멋진 곳이야.”
하얀 코트를 입은 사람이 그 봉우리 중 하나에 올라가 있었다.
희미한 안개 너머에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꿋꿋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
금발의 머릿결과 사라진 왼팔의 옷자락을 휘날리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곤 다른 봉우리에 올라서서 하얀 코트를 입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하라고 했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3회전에서 만났던 여인.
에어리스의 어머니이자 스승인 그녀는 초월좌의 능력을 갖췄다.
“<신멸의 구도자>라는 수식언답게 지옥도를 헤집고 다닌다고 들었어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이 달랐고, 공유할 감정도 없었기에.
“다른 분도 오셨네요?”
남아 있는 봉우리에서 검은 안개가 스르륵 흘러나왔다.
삐죽거리는 머릿결을 가진 헬라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헬라를 직접 마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 재밌는 녀석이네?”
그녀의 눈빛이 뱀의 눈처럼 변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순식간에 움직이더니 유진하의 곁에 다가왔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보구나?”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목소리.
허공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짓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볼을 스칠 때마다 한기가 느껴졌고, 이전에 받은 적 없던 서늘하고도 차디찬 기세가 전신을 휘감았다.
“또 다른 수식언은 <죽음의 안내자>이거든.”
잿더미처럼 흩날리는 헬라의 검은 안개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알갱이들이 뭉친 미세 먼지 같은 안개였고, 검은 알갱이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안개에 닿은 존재를 자기 멋대로 지워 버릴 수 있었다.
“회귀자 유성하가 너의 형이라며? 만약에 널 죽이면 녀석은 어떻게 할까?”
섬뜩한 기운이 흘렀다.
“화가 나서 날 죽이려고 올까?”
온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것도 좋을 거 같아. 분노에 가득 차서 날 죽이려고 달려들면 진짜 기분이 좋을 거 같다고.”
죽음의 사신이 있다면 헬라가 분명했다.
살의에 미친 자.
죽여도 죽여도 만족하지 않는 자.
<죽음의 안내자>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
수식언에 걸맞은 신좌였다.
‘진짜 죽일 셈이야.’
허언이 아니었다.
살벌하게 몰아치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반쯤 죽음을 머금은 듯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잘못해도 죽는다.
“저를 죽여도 형은 오지 않을 겁니다.”
헬라의 살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용암처럼 꿈틀거리며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날름거렸다.
“왜? 꼭 올 거 같은데.”
“형은 회귀자죠.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1000번이 넘은 회귀에서 헬라의 손에 무수하게 죽어 왔다.
그만큼 헬라를 잘 알 터였다.
저 괴팍한 성격의 여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하면 죽는지 경험으로 체험했으니까.
“형은 당신을 괴롭히는 법을 알고 있어요.”
유성하의 실패담은 레다에게 전해졌고, 그녀를 통해서 유진하에게 알려졌다.
덕분에 이 제멋대로인 여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날 괴롭힌다? 그것도 좋지.”
헬라는 자비가 없었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죽이곤 하지만, 아직 이성적인 면모까지 잃지는 않는다.
“날 괴롭히는 법이 뭘까? 궁금하네.”
헬라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방금까지 폭발적으로 내뿜던 살기는 어느새 잠잠해졌고, 겨누고 있던 손끝은 땅으로 내려갔다.
“어서 말해 봐.”
마치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유진하를 쳐다보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승부를 받아 주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을 괴롭히는 법이에요.”
“아하, 내가 널 죽여도 유성하는 안 온다는 거네?”
“절대로 오지 않을 겁니다. 그게 헬라,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니까요.”
헬라는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종속된 신좌였다.
이 지옥의 성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고, 발목에 묶인 족쇄처럼 자유가 없었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
잠재된 신화를 발현시키거나, 유성하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만날 방법이 없었다.
“후후, 날 자극하다니 정말 재밌네.”
정곡을 찔린 헬라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분노의 감정이 담긴 아우라를 강하게 발산했다.
‘날 죽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남아 있는 이성이 지옥의 여신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있었다.
죽이고 싶다.
그런데 참아야 해.
그랬다가는 유성하가 영원히 이곳으로 오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
살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봉우리에 드리웠던 검은 안개가 삽시간에 소멸됐다.
“죽이지 않을 거야.”
토닥토닥.
유진하의 목을 노렸던 그녀의 손이 어깨를 툭 잡아 줬다.
차갑고 스산한 기운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까 내 살기를 버텨 낸 것만으로도 칭찬해 줄게.”
당장 유진하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헬라의 눈매가 계속 꿈틀거렸다.
“저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악의가 진정된 헬라를 상대할 기회는 자주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저는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나는 남을 도와주지 않아.”
역시 까칠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헬라가 쉽게 양보할 리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저는 잠재 신화를 발현시킬 생각입니다.”
“라그나로크를?”
놀랍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었다.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신들의 황혼. 잠재 신화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거든요.”
침착하게 대응했다.
상대의 호기심과 욕망을 끌어내야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기에.
유진하는 점점 자신의 영역으로 헬라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하다?”
호기심을 느낀 듯한 헬라가 되물었다.
“저는 라그나로크 신화를 여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결정타였다.
이거라면 헬라는 반드시 미끼를 물 것이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찰나의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어떻게?”
마침내 미끼를 물었다.
이제 헬라의 관심은 유성하가 아니라 종말의 신화로 향할 터였다.
“자세한 방법은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미리 알려지면 잠재 신화가 개방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재밌는 녀석이네. 날 끌어들이는데 정보를 숨기겠다?”
기분이 상했는지 헬라의 입꼬리가 크게 좌우로 올라갔다.
아까까지 잦아들었던 살기가 순식간에 다시 뿜어져 나왔다.
“지금 알려 주면 실패할 테니까요.”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저 살기에 집어삼켜진다.
미끼를 물었으면 조심스레 끌어당길 필요가 있었다.
“이미 바리데기와 염라대왕에게 협력을 구했거든요.”
익숙한 이름을 듣자 헬라의 자세가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허공에 누운 듯이 상체를 뒤로 눕히고 팔짱을 꼈다.
“명부의 녀석들이랑 얘기를 했다는 거네.”
바리데기는 헬라의 라이벌이었다.
명부의 시왕을 낳은 어머니, 바리데기는 헬라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자였다.
“괜찮은 배후를 두었구나. 그래서 당당했고.”
협력을 구하는 과정이었다.
헬라는 결코 만만한 신좌가 아니었다.
“바리데기에 이어서 나까지 필요하다라…….”
곰곰이 생각에 잠긴 헬라가 공중에서 그대로 빙그르르 돌았다.
거꾸로 뒤집힌 헬라의 얼굴은 골똘히 궁리하고 있었다.
가시처럼 쏟아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뒤집힌 미역처럼 보여 웃겼으나, 진짜로 웃었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젠장.”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헬라가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괴성 한 번에 봉우리가 그대로 무너졌다.
빛의 아우라를 발휘한 유진하.
초월격의 아우라를 드러낸 시오.
죽음의 아우라를 휘감은 헬라.
세 사람은 무너진 봉우리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밌네. 빛의 힘도 다룰 줄 알고.”
“그냥 가진 힘이죠.”
“정말 자신은 있는 거야? 라그나로크는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는 신화야.”
“가능성은 있어요. 종말의 신화는 이미 여러 번 개방된 적이 있으니까요.”
신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듯 종말의 신화는 하나가 아니었다.
숨겨진 잠재 신화로 얼마든지 존재한다.
“티타노마키아, 기간토마키아.”
그 이름을 듣자 헬라의 눈빛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이 신화들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첫째는 멸망의 신화라는 것.”
“다음은?”
“둘째는 잠재 신화였다가 개방된 신화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이 신화가 끝나면 세계는 크게 변화한다는 거죠.”
‘티타노마키아’의 성공으로 제우스는 올림푸스를 건설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였다.
이어진 ‘기간토마키아’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았으나, 올림푸스는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번개의 신좌> 제우스가 직접 비밀 병기를 준비한 것이었다.
‘신과 인간의 영웅.’
헤라클레스였다.
상대는 올림푸스의 12신좌를 가장 경계해서 그들만 노렸으나, 예상치 못한 인간 영웅의 활약에 허를 찔려 패배했다.
‘기간토마키아’ 신화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라그나로크는 어떻게 될까요?”
유진하가 꺼낸 한마디는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제야 헬라는 이 대화의 진의를 깨달았다.
‘잠재된 종말의 신화를 발동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 신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된 과업이라는 걸…….’
멸망 신화를 이루려는 자.
막아 내려는 자.
양측은 사력을 다해서 힘과 두뇌를 사용해 싸울 터였다.
“종말의 신화는 반드시 개방할 겁니다. 상대는 그것을 막으려고 할 테고요.”
“후후, 준비를 잘해야겠네.”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헬라도 종말의 신화에서는 당사자 입장이었기에, 신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게 설득할 포인트였다.
“좋아. 네 생각에 따르기로 하지.”
바리데기에 이어 헬라까지 협력을 약속받았다.
저 막강하고 성질이 더러운 헬라에게서 순순히 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때, 헬라가 근처에 있던 시오를 바라봤다.
하얀 도복을 입고 기다란 귀혼검을 옆에 찬 그녀는 에어리스의 어머니이자 냉정한 초월좌였다.
사실 헬라는 이미 시오와 협력을 약속했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여신>이 순순히 유진하와 연합을 맺은 이유는, 어쩌면 시오와 먼저 협력했기에 더 쉽게 설득된 건 아닐까.
“하지만 이건 알아 둬라. 라그나로크 신화는 신좌만이 아니라 시공간 전체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
시오도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잠재된 종말의 신화 중에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라그나로크’였다.
“이 신화가 열리면 재앙이 펼쳐진다. 알고 있지?”
“…….”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종말의 신화가 열리면 어떤 미래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종말의 신화는 원형과 다르게 진행될 겁니다.”
신좌들의 죽음부터 세상의 멸망까지.
어느 것 하나 종말의 신화 원형처럼 진행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할 건데?”
헬라의 눈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신화는 바꿀 수 있어요. 이미 ‘헤라클레스’가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려 줬거든요.”
“…….”
종말의 신화를 일으킨다.
동시에 종말의 신화에 거역한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 종말의 신화를 바꾼다.’
그것이 유진하가 세운 계획이었다.
수많은 최상위 신좌들과의 대결은 감수하더라도,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막아 낼 생각이었다.
“정말 웃기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는 거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웃던 헬라가 비로소 유진하를 똑바로 쳐다봤다.
“유성하의 동생, 너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유진하라고 해요.”
“기억해 둘게. 그리고…….”
검은 안개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헬라의 자취가 사라지면서 마지막 말을 귓가에 스치듯이 남겼다.
‘내 자리는 꼭 남겨 놔라. 가장 좋은 상석에서 신들의 종말을 지켜볼 수 있도록 말이야.’
헬라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남았다.
“나도 마경대전에 참가한다.”
3개월 후.
염부의 바리데기.
헬헤임의 헬라.
염계의 하데스.
72악마.
그 외의 존재들까지 참가하며 역대 최대의 ‘마경대전’이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