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명부(6)
아무나 갈 수 있는 명부의 지옥 여행이 아니었는데도, 일행의 발걸음은 의외로 가벼웠다.
“죄를 지은 망자들이 처벌을 받는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기지개를 켜던 이소민은 두 팔을 내리면서 하품했다.
긴장감이 없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에어리스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 망자의 영혼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어깨를 으슬으슬 떨었다.
“이소민 언니는 별로 무서워하는 거 같지가 않네요. 저는 좀 무서운데.”
“나는 죽은 것도 아니고. 여기에 손님으로 왔잖아.”
살짝 달라붙는 에어리스를 달래 줄 여유도 있을 정도였다.
굉장히 덤덤한 반응이었다.
“자, 여기가 지옥불이다.”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바리데기는 나풀거리며 공중에 둥둥 떠서 이동했다.
그녀는 둥둥 떠다니며, 유황과 불길이 가득한 지옥불의 세계를 안내하고 있었다.
“여기는 제2지옥. 화탕지옥이라고 불려.”
안내를 맡은 지옥시왕의 어머니.
바리데기가 나타나자 명부의 모든 관원들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대우해 줬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처벌받는다.’
명부의 교훈은 간단했다.
물론 우리 세계에서 이런 지옥은 없었지만.
‘우리 세계와는 달라서 다행이다.’
악마의 형상처럼 움직이는 불의 지옥을 둘러보면서 유진하는 솔직한 소감을 남겼다.
그는 지옥의 존재 의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우리는 명부의 지옥이 없어. 다행스럽게도…….’
“진하?”
에어리스가 멈칫했다.
수많은 성운과 시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거인족의 공간.
천공의 성.
그 많은 곳을 지나온 지금.
<아비규환의 지옥도>는 철저하게 지옥이란 저승 신화의 세계가 집대성된 시공간이었다.
그렇기에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한 공포의 세상이었다.
너무나 슬픈 느낌이었다.
‘다른 성운에서 잡아 온 죄인들을 모아 두는 곳. 협약을 맺어서 죄인들의 영혼을 이곳에 모아 두는 거야.’
‘성운의 협약’.
최상위 신좌들끼리 맺은 계약은 법칙으로 만들어졌다.
‘여기는 신좌들이 말 그대로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 곳이야.’
성운은 신좌들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아비규환의 지옥도>에는 분명 숨겨진 이면이 많을 것이었다.
-최상위 신좌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종말의 신화를 숨겼다.
-최상위 신좌들은 하위 성운끼리 전투를 붙여 서로 멸망해 가는 과정을 놀잇감처럼 구경했다.
-최상위 신좌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있는 죄인들을 ‘지옥도’에 보냈다.
“신좌들은 종말의 신화와 죄인들을 모아 놓기 위한 장소 필요했어. 그래서 명부와 지옥을 서로 뒤섞어 놓은 거야.”
<아비규환의 지옥도>는 죄인들을 모아서 격리시킨 감옥과도 같았다.
“이제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
최상위 신좌들이 교묘하게 자신들의 우위로 설계한 세계관이 성운전의 본질이었다.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에어리스 언니…….”
영혼체로 있던 유나가 슬쩍 에어리스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지옥의 광경을 보더니 소름이 돋아서 전신을 살짝 떨었다.
“무서운 곳이네. 어머니가 날 지하에 넣어 둔 이유가 있었구나.”
길 잃은 영혼이 잡히면 무조건 지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유나는 지하에 숨어 있었고 지옥에 끌려가지 않았다.
“여기서도 끌려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어리스가 동생 유나를 살짝 어루만져 주며 달랬다.
“응.”
둘은 서로를 위로하듯이 꼭 껴안았다.
삶과 죽음으로 갈라지는 운명.
모든 성운들은 그 문제에 대해 각자의 방식을 만들었다.
쌍둥이의 맏언니인 레다는 불의 지옥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가졌다.
“어머니가 살던 세계에도 지옥 같은 건 없었어.”
유진하도 동의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곳이 지옥이라는 세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이 사는 지구를 창조한 마스터는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 세계는 망자의 영혼이 지하에 고이 잠든다고 들었어요. 환생의 시간을 기다릴 뿐. 누구도 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푸른 단발머리의 마스터가 떠올랐다.
그녀는 빅뱅 폭발로 우리의 시공간을 창조한 ‘공간의 주인’이었다.
인간들의 자유를 우선시했고, 수십억 년을 기다리며 절대 세상에 간섭하지 않았다.
“지옥은 마스터의 성향과 맞지 않았으니까요.”
세계를 만든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신좌들은 자신의 영원불멸과 다른 세계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스스로 세계의 주인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스터의 생각이 달랐다.
‘내가 만들었더라도 모든 것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라고 모든 걸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
유진하도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모든 존재에게 위아래가 있는 건 아니니까.”
지옥도의 가장 아래.
이곳부터 저 하늘까지 바라보며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다 보았겠지?”
불타는 화탕지옥.
산이 통째로 타오르는 이곳에서 하얀 머릿결을 휘날리던 바리데기가 두 팔을 벌렸다.
“명부의 지옥을 수련장으로 삼는다는 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거란다.”
초대받은 원정대를 바라보는 바리데기의 눈빛이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죄인들은 모두 생전에 한가락 하던 녀석들이야. 다시 일시적으로 육체를 주면 예전처럼 강해지지.”
“원하던 바예요.”
유진하와 원정대 전원이 처음부터 각오한 부분이었다.
“죽을 수도 있어. 그러면 너희들은 여기 갇힐 거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다.
에어리스가 긴장한 낯빛으로 대검을 꺼냈다.
“저는 수련을 시작할 준비가 됐어요.”
조커는 백가면을 쓰며 번쩍이는 단검을 꺼냈다.
“원하던 바야. 당장 받아 주지.”
레다는 생환검을 꺼내 들었고, 이소민은 방어구를 이것저것 챙겨입으며 대비했다.
그 모습을 본 바리데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이기면 지옥에서 내보내 준다는 조건을 걸었어. 아마 죽어라 싸우겠지.”
죄인들의 전투 의지가 팍팍 올라갔다.
망자들의 영혼에게는 흙으로 만든 임시 육체가 제공됐다.
진흙으로 만들었어도 사흘은 버틸 만한 정도는 되었으니,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일곱 대죄인을 불러 줄게. 아마 명부의 지옥에서도 괜찮은 수준일 거야.”
건너편에서 진흙의 육체를 받은 원혼들이 불길하고 암울한 아우라를 드러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살의와 악의.’
지옥의 불길과 고통 속에서 악에 받친 죄인의 원혼들은 오로지 승리만을 원했다.
그들에게서 비슷한 냄새를 맡았는지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기세가 마음에 드는군. 죽여도 되는 놈들이라 더 좋아.”
조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쌍단검을 움켜쥐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 특성을 발휘했다.
휘몰아치는 기운 속에, 전신에 아우라를 휘감은 분신이 걸어 나왔다.
조커의 곁에 한 사람이 또 나섰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이어서 에어리스가 <뇌명의 참격>을 발휘하며 수십 개의 푸른 번개와 함께 나아갔다.
<별자리에서 태어난 자>를 발현한 레다도 달려들었다.
육체가 없는 유나도 싸우고 싶었다.
“나도 저런 몸을 빌리고 싶어!”
언니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잠자코 있지 못했다.
카앙, 캉
격렬하게 부딪치는 칼의 소리.
사방에 진동하는 충격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도통 싸우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싸우고 싶다. 나도 언니들이랑 싸우고 싶어!”
유나가 손을 번쩍 들고 크게 소리쳤다.
간절한 부탁을 담은 눈망울이 되어 애처롭게 바리데기를 쳐다봤다.
“너도 수련하고 싶다는 거니?”
“꼭! 그러고 싶어!”
“좋아. 너는 특별히 몇 달 정도 쓸 수 있는 육체로 줄게. 엄청 튼튼한 걸로…….”
바리데기는 순순히 부탁을 들어줬다.
“와아! 드디어 영혼에서 탈출이다!”
진흙으로 만든 임시 육체였지만, 간만에 영혼에서 벗어난 것에 유나는 크게 기뻐했다.
툭툭.
유나는 새로운 육체를 이리저리 어루만졌다.
딱딱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흙으로 만든 몸이라 조금 뻑뻑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네. 누가 내 검 가지고 있어?”
레다가 품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던졌다.
보랏빛 궤적으로 날아오는 영류검.
영류검이 원래 주인인 유나에게 돌아왔다.
“흐아압!”
유나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지옥에서 엄선한 죄인들과 대결했다.
바리데기는 접전이 벌어지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꽤 엄선한 죄인들임에도 원정대의 실력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다들 제법이네?”
묵묵히 전투를 지켜보던 바리데기가 옆에 남은 한 사람을 응시했다.
유진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같이 사투를 거친 동료들이거든요.”
팔짱을 낀 채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에 끼지 않았다.
“너는 안 가니?”
유진하가 잠시 웃었다.
“더 강한 자들이 있잖아요.”
“호오, 알고 있었나 보구나?”
사실 이 녀석들은 워밍업에 가까운 상대였는데, 그 사실이 냉철한 전략가의 눈에 쉽게 걸린 듯했다.
유진하는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곧 끝날 거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쌍둥이 세 자매 가 완벽한 호흡을 보였다.
별자리의 아우라.
푸른 번개의 아우라.
대지의 아우라.
이들이 조합을 죄인들은 버텨 낼 수 없었다.
“정말이네?”
부서지는 진흙 인형을 지켜보면서 바리데기는 새로운 기분을 맛봤다.
문득 유진하의 원정대를 너무 약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강한 죄인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붙여 주지. 이번에는 신좌급에 육박한 녀석들이야.”
성운의 지배자 격인 존재.
지금은 죄인으로 이곳에 잡혀 있지만, 한때는 세상을 공포를 뒤덮었던 자들이다.
“살아 있을 때는 사왕이라고도 불렸던 녀석들이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거인처럼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신좌급 거인체 네 명을 앞에 두고 원정대는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제 가 볼게요.”
<빛의 한계를 초월한 자>
빛의 아우라를 머금은 유진하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합류했다.
* * *
“젠장.”
71위 단탈리온.
72악마에 속한 그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밀려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어떤 적에게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적은 없었다.
만약 일반적인 신좌였으면 이 일격으로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72악마는 불멸의 존재였다.
‘나는 종말의 신화에 엮인 존재이기에 죽지 않는다.’
성운전의 법칙.
라그나로크 종말의 신화가 시작되지 않으면, 여기에 연관된 신좌들은 죽지 않는다.
법칙에는 72악마도 포함되었다.
‘이곳은 영원한 싸움터였기에 매년 마경대전을 벌일 수 있었다.’
신화에 얽매여 죽지 않는 존재끼리의 싸움이었다.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옥도의 신좌들은 서로 필사적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젠장, 왜 열심이지?”
상대는 달랐다.
자신의 몸통을 반 토막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는, 서슬 퍼렇던 살기가 몸에 남을 정도로 강인한 적이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신좌들을 죽이는 자…….”
귀혼검을 쥔 외팔의 검사.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신멸의 구도자>라 불리는 수식언에 어울리게 강렬한 기세를 발휘했다.
“시오.”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온 적이 없었다.
신좌들을 죽이는 초월좌의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만, 지옥도의 신좌와 72악마들은 그런 것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소리였다.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알아. 종말의 신화를 열지 않으면 너희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시오의 눈빛이 번뜩였다.
“알면서 방금 그 일격은 뭐였지? 그런 식으로 덤볐다가는 네가 당할 수도 있었어.”
“그럴 일은 없어. 네 실력으로는 나한테 닿을 수 없으니까.”
시오는 악마를 조롱하고 있었다.
비웃음을 듣자 71악마 단탈리온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반 토막이 된 육체로는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재생하나, 그때까지는 잠자코 있어야 했다.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 그게 내가 가진 목표다.”
시오는 악마들을 척살하고 눈에 보이는 신좌를 말살할 생각이었다.
“너희에게 재앙이 될 거야.”
<신멸의 구도자>는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신좌와 초월좌, 악마급을 상대하면 그녀의 능력이 강해지는 특성이 있기에 두려울 상대는 없었다.
“젠장.”
71악마 단탈리온은 힘의 격차를 느끼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죽지는 않았으니 도망간 건가.”
시오의 곁에는 헬라가 있었다.
아스가르드 사상 최악이라 불리는 지옥의 신좌가 사방으로 삐친 머릿결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경대전에서 어떻게든 라그나로크 잠재 신화를 일으켜야 해. 그래야 저런 녀석들을 없앨 수 있어.”
<신멸의 구도자> 시오.
<지옥의 이름을 가진 자> 헬라.
그들은 종말의 신화를 위해서 힘을 합쳤고, 이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회귀자가 오면 어떨까?”
시오가 멈칫했다.
“녀석이 나타나면 우리와 무슨 일을 벌일까.”
헬라는 묘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시오는 귀혼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때였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군가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영원한 회귀자의 동생’이라고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