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명부(5)
“종말의 신화로 향해 가는 하나의 길…….”
누구도 생각한 적이 없었고 불가능이라 여겼던,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불가능의 과업이었다.
“…….”
유진하는 자세한 계획을 들려줬고, 바리데기는 가만히 듣다가 말이 없어졌다.
염라궁 곳곳에 켜진 촛불은 고요히 실내를 비추고 있었고, 염라대왕은 상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 보자는 거지? 정말 말도 안 되는 방법이기는 한데…….”
바리데기는 하얀 머릿결을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외모의 소녀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염라대왕을 비롯해 십 대왕을 낳은 어머니였다.
나이도 상당히 많을 터였고 그만큼 지혜로운 신좌였다.
“불가능에 가까운데… 확실히 아무도 못 한 방법이야. 어쩌면 종말의 신화를 열 수 있을 것도 같아.”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바리데기와 염라대왕이 협조한다는 모습이 되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도와주시는 건가요?”
“일단은… 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바리데기 역시 종말의 신화 자체는 원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속한 전원이 라그나로크 신화에 얽매여 있기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도 여기서 그만 벗어나고 싶어. 매일 죽은 녀석들만 보고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대체 뭘 하겠어?”
“그렇긴 하네요.”
바리데기를 비롯해 지옥도의 신좌들은 허울뿐인 명분으로 평생 이곳에 갇혀 지겨운 일을 반복해야 했다.
최상위 성운의 신좌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 같은 곳에서 일만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성운전의 본질이었다.
“빈부격차 같은 느낌이네요. 신좌들끼리도 공평하지가 않고요.”
유진하의 생각은 정확했다.
“맞는 말이야.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올림푸스에서 꿀이나 빨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잖아.”
푸념을 늘어놓는 바리데기에게 신좌의 체면 같은 건 없었다.
“나 같은 신좌들은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어쩔 수 없이 굴러다니는 거지.”
염라대왕조차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을 정도로 솔직한 표현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현이지만 바리데기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렇군요.”
신좌들 사이에는 알력이 있고, 권력 싸움과 다툼이 있다.
그것이 유진하가 파고들 틈이었다.
“그런데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어요.”
“뭐지?”
바리데기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는 종말의 신화로 알려져 있어요. 그 얘기는 신좌만이 아니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거든요.”
라그나로크 신화.
‘신들의 황혼’은 여러 지하 세계의 신좌들이 아스가르드의 신좌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시공간 세계마저 멸망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초의 무로 돌아가는 신화라고 들었어요.”
“그렇긴 해.”
바리데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마치 자신의 발아래 허공의 세계가 펼쳐진 듯이 잠자코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어.”
바리데기 역시 신좌였음에도 종말의 신화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저 위에 최상위 신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좌들끼리 빈부격차.
사는 곳의 통제.
정보의 제약.
그들이 성운전의 법칙을 만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윽고 바리데기는 하얀 머릿결을 손으로 넘기며 중요한 한마디를 남겼다.
“신좌들의 말을 전부 믿지 마. 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은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형.
회귀자 유성하가 하던 말이었다.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
그 책의 가장 마지막에 있던 구절이 떠올랐다.
1000번째 방법.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설령 그것이 신일지라도.
“형의 마지막 말.”
그 말이 가장 마지막에 있어서 언제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혹시 그건 바리데기 님의 생각인가요? 아니면…….”
“…….”
바리데기는 하늘색 도포를 들며 얼굴을 살짝 가렸다.
“내 생각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이기도 해.”
유성하.
바리데기의 입에서 형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형은 이곳에 수도 없이 왔었고.
당연히 바리데기 역시 수없이 만났을 거라는 것을…….
“형과 자주 만났나요?”
“매번 그랬지.”
역시 유성하는 지옥도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바리데기를 만났다.
그리고 같은 말을 했던 것이었다.
‘신좌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을 믿지 마라.’
그 말을 곱씹어서 생각하면서 숨겨진 진실을 깨달아갔다.
“유성하는 대단한 사람이야. 집념도 있고 실력도 훌륭하지.”
바리데기가 팔짱을 끼며 대답하는데 그 모습에서 형을 경외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귀자.
포기하지 않는 자.
하지만 정말 시간을 되돌아가 살아난다고 해도, 절망적인 죽음을 반복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은 어땠나요?”
“여기서 많이도 죽었지. 그래도 오뚝이처럼 다시 돌아왔어.”
바리데기의 눈빛이 촉촉하게 된 것을 보아, 아마 과거의 감상에 잠긴 듯했다.
“그는 끝내 여기서 우승하고 나갈 만큼 성장했어. 우리는 매년 벌어지는 대회에서 우승해도 절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너희들은 종말의 신화에 엮인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죠, 우승하거나 우승 팀에 속하면 이곳에서 즉시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요.”
“너희는 우리랑 달라.”
성운전 법칙에 따라 지옥도의 신좌들은 갇혀 있어야 했다.
‘종말의 신화를 해방하라.’
그래야 지옥도의 신좌들은 자유를 얻는다.
“형은 성운전의 마지막에 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잠재된 종말의 신화를 열지 못해 진정한 끝을 보지는 못했겠죠.”
“회귀자는 끝에 갈 수 없다. 그것도 성운전의 규칙이야.”
“그래서 저도 생각이 달라졌어요.”
유진하의 다짐은 간결했다.
“성운전의 끝, 이 무대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끝까지 가고 싶어요.”
“…….”
성운전의 끝에 간다.
이 모든 대결의 마무리를 짓겠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회귀자 유성하가 해내지 못한 과업을 하나씩 이뤄 나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거인족을 구해 냈다.
두 번째 시험에서 천공의 성을 파괴했다.
세 번째 시험에서 에어리스의 어머니, 시오를 구해 냈다.
회귀자가 이루지 못한 길을 개척해 나갔다.
지금은 네 번째 과제를 앞두고 있었다.
유성하가 이뤄 내지 못한 과업은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 잠재 신화를 깨우는 거였다.
하지만 그 신화는 종말의 이야기.
최상위 신좌들뿐만 아니라 멸망을 예언하는 과제였다.
잘못 일으켰다가는 성운 전체의 파국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종말의 신화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어.”
바리데기는 손을 가슴에 올리며 떳떳하게 밝혔다.
“나 역시 그 신화에 얽힌 운명이지만 절대로 모두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종말의 이야기.
신들의 황혼은 결국 구성원이 중요했다.
이 신화를 일으키는 존재들은 지옥도의 신좌들이고, 결국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터였다.
“나는 멸망의 신화를 일으키더라도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아.”
바리데기.
명부의 십 대왕을 낳은 어머니.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 저승의 명부까지 다녀온 여인.
가장 먼저 회귀자 유성하가 만났던 신좌답게 굳건한 의지를 보였다.
“알겠습니다.”
유진하는 믿기로 했다.
“지금부터 중요해요.”
바리데기는 지옥도 성운에서도 몇 손가락에 들어가는 강자고, 명부에서 염라대왕을 능가하는 강자였다.
그녀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라그나로크는 마경대전에서 시작할 거예요.”
대계획의 무대는 이미 마련했다.
이제는 배우들이 필요했다.
첫 번째 배우로는 바리데기를 선택했고 다행히 그녀도 받아들였다.
“아직 3개월이 남았어요. 그때까지 명부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한테? 그럼 뭘 해 주면 될까?”
“남은 시간에 마경대전을 준비해야 해요. 명부에는 죽은 자들이 갇혔다고 들었어요. 살아 있을 적에 꽤 강했던 자들도 많겠죠.”
무슨 말인지 냉큼 알아들은 바리데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기로 보내 달라는 거야? 가서 수련할 상대를 데려와 달라는 거네.”
“네, 그거예요.”
뒤에서 잠자코 듣던 염라대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옥의 판관답게 죄인들의 징벌도 담당하지만 그들의 관리도 중요했다.
함부로 규칙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건 무리다. 죄인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엔 생자인 자네가 갈 수 없어.”
염라대왕이 준엄하게 반대했다.
바리데기도 명부의 규칙만큼은 건드릴 방법이 없어서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염라대왕의 말이 맞아. 나도 명부의 규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일단 저는 초대를 받은 거잖아요.”
명부의 역사상 살아 있는 존재가 초대를 받아 들어온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안 된다는 규칙도 없었다.
“규칙에는 반드시 빈틈이 있는 법이거든요. 성운전에서도 반드시 그걸 찾아야 하고요.”
그동안 유진하는 숱한 위기의 순간마다 당황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내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초대를 받았으면 구경이 가능하잖아요.”
“구경이라고?”
“참관이라고 해도 되고요.”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들어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유진하와 일행들도 성운전의 참가자 자격이 없었거나 아테나의 관문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절대 <아비규환의 지옥도>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옥도에 들어왔다는 건, 명부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가 되죠.”
살아 있는 자는 들어오지 못하나, 초대받아 들어온 사람은 예외였다.
“만약 죽은 자만 들어올 수 있다면 애초에 저희를 초대하지 말았어야 하거든요.”
듣고 있던 염라대왕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미 명부의 초대를 받았다고 공인된 상황.
이제 와서 거부할 수 없었다.
“초대를 받아서 ‘명부의 특별 손님’이 되었어요. 그럼 내부를 참관할 수 있고. 가벼운 대련도 해 볼 수도 있잖아요.”
“하하하하.”
가만히 듣던 바리데기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초대를 받았다는 말이 단순한 임기응변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몇 수 뒤를 예측한 결과였다니.
‘영리하면서도 교묘하게 규칙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왔네?’
만약 다른 신분으로 왔다면 명부의 법칙에 걸려 거절당했을 수도 있는데, 명부의 특별 신분이 되어 참관한다는 명목이 세워졌다.
오히려 명부의 법칙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네. 명부의 특별 손님으로 왔다는데 쫓아낼 수는 없잖아.”
“흐으음.”
긴 탄식을 쏟아 내던 염라대왕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명부의 특별 손님이 되었으니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영리한 유진하가 마음에 들었는지 바리데기는 다가와서 어깨를 토닥여 줬다.
“원하는 대로 참관해도 괜찮아. 내가 같이 안내해 줄게. 대신에 내 말을 꼭 따라야 해.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아 위험에 처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명부의 지옥에서 수련하기로 합의가 됐다.
죄인들은 불과 얼음이 뒤섞인 곳에서 수많은 고통을 받는다.
지독한 장소였다.
“…알겠어요. 저희 모두 함께 가겠습니다.”
유진하는 감수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은 형이 겪었던 고난의 과정이기도 했을 테니까.
그제야 명부의 특별 손님으로 구성된 명부 지옥의 원정대가 꾸려졌다.
리더 유진하.
에어리스, 레다, 유나.
조커, 이소민.
안내는 바리데기가 맡았다.
그렇게 명부에서의 수련이 시작될 즈음.
<아비규환의 지옥도>에는 하나의 소문이 퍼져 가고 있었다.
‘팔 하나를 잃은 여자에 대해서.’
혼자서 앞길에 마주치는 악마와 괴수들을 전부 척살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퍼졌다.
<신멸의 구도자>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