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89화 (189/229)
  • 189화 명부(4)

    “초대를 받았다는 증거는 이 종이입니다.”

    유진하는 한 장의 종이를 손에 쥐었다.

    펄럭이는 하얀 종이.

    염라대왕을 비롯해 모든 관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 종이는 염라궁으로의 초대장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정적이 흐르다가, 이윽고 옆에 있던 관원 하나가 흐흐흐 웃기 시작했다.

    “초대장이라? 그 누릿한 종이가 말입니까?”

    “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염라궁의 모든 공식 문서는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관원은 두루마리로 만들어진 서류첩을 펼쳤다.

    “이것은 오늘 심판을 받을 자들의 명단이고.”

    두 번째 서류첩도 촤라락 열었다.

    “이거는 내일, 다음은 모레.”

    두루마리 서류첩이 하나둘 펼쳐져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어디를 봐도 유진하가 내민 종이 한 장은 있지 않았다.

    “위조한 초대장이라면 아주 재밌는 꼼수지만, 염라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랍니다.”

    웃음으로 일관하는 관원을 보면서 염라대왕도 의기양양해진 태도로 심판의 망치를 굳게 쥐었다.

    “그대는 무단 침입에 이어 법정까지 모독할 셈인가?”

    불타는 눈동자.

    죄인을 압박하듯이 그 괴이한 눈빛은 마치 사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아니요, 초대장은 진짜입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경계심을 드러내는 염라대왕과 관원들을 상대로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오로지 말과 전략으로 상대하겠다고 분명히 정했다.

    “무슨 말이지? 그 종잇조각으로 본좌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염라대왕의 단호한 눈동자가 이글거렸고 완고한 콧수염이 거세게 흔들렸다.

    죽은 죄인의 심판관.

    그는 어떤 악랄한 죄인조차 압도할 만큼 거대한 기세를 발휘하는 지옥의 판관이었다.

    “이걸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요.”

    의외의 말에 장내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폭탄이 터지기 직전처럼 모두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유진하는 한마디 말로 염라궁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에어리스와 레다, 이소민이 오히려 표정이 하얘질 만큼 당당한 자세였다.

    “뭘 하려는 거지?”

    이소민이 귓속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에어리스는 또렷한 눈빛으로 유진하를 바라봤다.

    “믿어 볼게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무엇이든 해내던 사람.

    절망과 패배의 순간에도 완벽한 전략과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모두를 구해 내던 사람.

    에어리스는 유진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믿고 있었다.

    “이 종이는 저 사람이 준 겁니다.”

    유진하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상대는 염라대왕도 아니고 관원들도 아니었다.

    “나?”

    지목받은 그녀가 자신을 가리켰다.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소녀.

    ‘바리데기’였다.

    “내가 너한테 초대장을 줬다고?”

    “그럼요. 당신의 옷자락에 그 종이가 있거든요.”

    바리데기는 깜짝 놀라 자신의 품을 살폈다.

    그러자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이걸 언제? 어라?”

    머릿속에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군들이 펼친 방어진이 흐트러지자 바리데기가 직접 유진하를 막아 냈다.

    그 빛의 아우라를 한 손으로 짓눌러 잡아내던 때였다.

    “그때였나?”

    얌전히 붙잡힌 줄 알았더니 그 틈에 몰래 종이 한 장을 끼워 놓았을 줄이야.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종이가 있네요.”

    기지를 발휘한 유진하가 웃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염라궁의 법정에 무사히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체 작전에서 만반의 대비를 해 놓는 터라, 붙잡혔을 때의 계산도 해 놓는다.

    “그것이 저에게 준 초대장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바리데기는 손에 든 종이를 보고 당황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장내가 침묵 속에 빠졌다.

    아까 서류첩을 펼쳤던 관원이 서둘러 바리데기에게 다가가 종이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제가 종이를 확인하겠습니다.”

    “잠깐.”

    바라데기는 바람처럼 움직이며 관원을 지나쳤다.

    스르륵 움직이는 잔상의 흐름을 누구도 잡을 수 없었다.

    바람처럼 움직인 그녀의 손길이 유진하의 어깨를 잡았다.

    차분하면서도 어쩌면 따스한 손짓.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초대장은 내가 보냈어.”

    구석에서 나타난 바리데기가 뜻밖의 말을 선언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릴 즈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관원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초대장을 보내셨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야. 내가 깜빡하고 잊은 거였어.”

    하얀 머리를 휘날리던 소녀 같은 외모의 바리데기가 삐죽 혓바닥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진 관원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손을 뻗어 종이를 뺏으려고 했다.

    “어디 확인해 봅시다.”

    “무엄하네?”

    바리데기가 살짝 기세를 발휘하자 달려들던 관원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쿠웅.

    어마어마한 아우라가 순식간에 장내로 뻗어나갔고, 공기가 무거위지며 모든 분위기가 바뀌었다.

    염라대왕의 분노조차 저 기운에는 완전히 묻힐 만큼, 바리데기의 아우라는 강대했다.

    “초대장은 확실해.”

    바리데기는 종이를 꾸겨 버리더니 불에 태워 버렸다.

    이제 종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보증하는 거야. 저 녀석은 내가 초대한 사람이다.”

    상황은 반전되었다.

    의기양양했던 관원은 완전히 주저앉아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어느 누구도 바리데기의 말에 반박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증거는 사라졌어. 내가 초대했다고 인증해 줬고. 자, 어때? 더 할 말 없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염라대왕도 노여움을 거두고 심판의 망치를 치며 서둘러 판결을 종료했다.

    “무죄…….”

    기분이 언짢은지 한 번에 판결을 선고하고 종료했다.

    “돼, 됐네요?”

    결과가 나오자 에어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소민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바리데기와 유진하.

    대체 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옥의 염라궁.

    무수한 거인 장군들이 지키는 곳.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성역과도 같은 곳을 대담하게 침입하고 설득하다니.

    대체 어떤 전략인지 알 수 없었다.

    “이야기는 끝났어. 그럼 다들 잠시 객실로 보내 줘.”

    바리데기가 명령하자 관원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뜻을 받들었다.

    딱 한 명.

    유진하만 자리에 남겨 놓고.

    저벅저벅.

    에어리스, 이소민, 조커는 관원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진하…….”

    에어리스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혼자 남아 있는 유진하를 바라봤다.

    유진하는 저 멀리 혼자서 어떤 비밀을 가진 듯이 침착하게 있었다.

    무슨 생각일까.

    항상 궁금했던 그의 전략.

    처음부터 그가 가졌던 가장 큰 장점이 뛰어난 작전과 전략이었기에, 지금은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다들 나갔네.”

    하얀 머릿결을 손으로 넘긴 바리데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유진하는 곁눈질로 다른 한 명을 의식했다.

    “아직 한 명이 남았어요.”

    커다란 단상에 앉은 염라대왕을 가리켰다.

    거인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는 마치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어쩔 수 없어. 지옥의 판결을 내리는 판관이라서 항상 이곳에 자리해야 하거든.”

    아까부터 불쾌한 듯한 염라대왕 대신에 바리데기가 웃으면서 답변했다.

    그녀는 슬쩍 하늘로 날아가서 염라대왕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여유도 보였다.

    마치 염라대왕을 아껴 주는 보호인 같았다.

    “언제 죄인들이 더 들어올지 몰라 항상 대기하는 게 대견하다. 일에 너무 빠져 있지 말고 좀 쉬기도 해.”

    “…됐어요.”

    바리데기가 해 주는 격려가 싫었는지 염라대왕은 어깨를 슬쩍 빼 버렸다.

    팔을 휘두르거나 더 거칠게 할 수도 있는 데, 굉장히 소극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가벼운 반항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에구, 그럼 그렇게 삐진 채로 있든가.”

    바리데기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염라대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존재였다.

    “여기서 그냥 얘기하자. 다른 곳으로 가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못 숨길 거야.”

    유진하는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염라대왕은 믿을 수 있겠죠? 당신의 아들이니까?”

    바리데기의 눈빛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알고 있었나 보네?”

    “들어 본 적이 있거든요. 당신의 신화에 대해서요.”

    <바리데기 신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 저승에 간 이야기였다.

    바리데기는 저승 세계로 가서 모진 고생을 했고, 그 과정 중에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훗날 명부의 십 대왕이 되었다.

    염라대왕도 그 아이 중 하나였다.

    “알고 있었구나. 염라대왕과 다른 왕들은 전부 내 아이들이란다.”

    커다란 체구의 염라대왕이 귀엽다는 듯이 바리데기는 손가락으로 볼을 쿡쿡 찔렀다.

    어머니는 아들을 볼 때마다 항상 아이처럼 보듯이 말이다.

    “어머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요.”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유진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하긴 어차피 곧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일 테니까.

    그건 유진하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아까 적은 쪽지는 정말 사실인 거냐?”

    바리데기가 염라대왕에게 있다가 서서히 내려왔다.

    진짜 용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네, 맞을 겁니다.”

    “정확해야 해. 네가 종이에 적어서 몰래 알려 준 내용을 봤거든. 그래서 일단 맞장구를 쳐 준 거고.”

    초대장처럼 보인 종이에는 메시지를 적어 놓았다.

    유진하는 바리데기의 신화를 떠올렸고, 염라대왕이 아니라 염부의 실제적 주인이 그녀라는 걸 깨달았다.

    실세는 바리데기였다.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던 쪽지였는데 이왕이면 당신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보낸 거예요.”

    “내가 실세라는 걸 알았다는 거구나.”

    “어머니를 이길 수 있는 아이는 없잖아요. 그건 염라대왕도 마찬가지일 테고.”

    자기 이름이 불린 염라대왕은 멈칫했다가 이내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지옥의 판관답게 입이 무거웠다.

    “유진하라고 했지? 너는 종이에 적었잖아. 신들의 황혼 잠재 신화를 시작하는 방법을 안다고.”

    이곳은 <아비규환의 지옥도> 성운.

    명부의 염라대왕.

    명계의 하데스.

    지옥의 악마.

    헬하임의 헬라.

    지하 세계에서 여러 신화들이 뒤얽혀 매년 ‘마경대전’을 벌이며 영원한 전투에 살아갔다.

    끝없는 전투와 전쟁.

    이곳은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고, 성운전에 소속된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당신들이 여기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라그나로크 신화를 시작해야 해요.”

    “맞아. 그걸 발동해야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 성운과 결판을 낼 수 있으니까.”

    최정상 성운인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는 종말의 신화를 숨겨 놨다.

    그들을 이기려면 ‘종말의 신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 신화가 없다면 최상위 신좌들은 불멸의 영생을 가질 수 있었다.

    ‘회귀자가 실패하는 이유.’

    유성하는 끝내 이 신화를 열지 못했다.

    그랬기에 결국 헛된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무한의 회귀 속에 빠지고 만 것이다.

    “정말 네가 종말의 신화를 여는 방법을 안다는 거냐?”

    “아마 맞을 거예요.”

    “짐작이라는 거지?”

    “거의 확실한 수준이에요.”

    1000번이 넘는 회귀를 하고도 열지 못했다는 것은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제 형은 유성하, 회귀자예요.”

    “그래. 나도 봤지.”

    신좌들은 회귀자가 겪은 시간의 흐름을 전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유성하의 패배와 절망은 그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헛된 몸부림이 아니었다.

    “형이 실패한 방법을 제외하면 한 가지 가설이 나올 수 있어요.”

    “가설?”

    바리데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은 마경대전에서 우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종말의 신화는 열리지 않았어요.”

    “맞아. 그랬지.”

    “다른 사람들이 우승하거나 아니면 우승자가 없거나. 그것도 아니었어요.”

    “우리끼리 우승자가 바꿔 가면서 해 본 적도 있지. 그래도 안 되더라.”

    회귀자 유성하가 겪은 실패의 과정은 바리데기 같은 이곳의 신좌들도 해 봤던 실패법이었다.

    그 방법들을 전부 소거법으로 제외하면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했다.

    “딱 하나.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방법이 있습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절대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

    그것이 종말의 신화를 여는 ‘열쇠’가 될 터였다.

    “종말의 신화를 여는 하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