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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88화 (188/229)

188화 명부(3)

“내 이름은 ‘바리데기’라고 해.”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염라궁 진입 작전을 막아 버렸다.

“너는 누구지?”

“…….”

대답하려고 해도 소녀의 손이 주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 가해졌다.

“아, 미안. 너무 세게 눌렀구나.”

그제야 하얀 머리의 소녀가 슬쩍 힘을 뺐다.

“유진하라고… 해요.”

“유진하? 처음 듣는 이름이네.”

겨우 숨통이 트였으나, 소녀가 엎드린 유진하의 등으로 냉큼 올라타며 다시 막혔다.

“으악!”

“잡아 두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렴.”

소녀가 순식간에 밧줄을 꺼내 포박했다.

방어진을 구축했다가 조커에게 기습을 당한 장군들도 정신을 차려 다시 태세를 정비했다.

이내 무수한 창과 검에 의해서 조커는 완전히 포위됐다.

“이 녀석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들어온 거냐. 전부 포박하라!”

“아, 저도요?”

일행이 아닌 척 딴청을 부리던 이소민도 단숨에 밧줄에 묶였고, 성문 쪽에 있던 에어리스와 레다에게도 추격병이 가려고 했다.

“아아, 저쪽도 내가 맡도록 하지.”

하얀 머리의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여유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자세로 움직였다.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네. 팔팔한 기운도 좋고.”

푸른 번개의 아우라를 머금은 에어리스와, 천둥 번개의 별자리를 발현한 레다가 정문에 있었다.

“어디 좀 더 볼까?”

소녀가 살짝 상체를 숙이고 두 다리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몸은 빠르게 나아갔다.

<전광석화> 에어리스

<천둥 번개의 별자리> 레다.

두 사람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누구……?”

에어리스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녀의 손이 뻗어 나갔다.

손에서 뿜어지는 바람은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매서운 느낌도 있었다.

<바람의 운율>

소녀의 아우라는 에어리스와 레다의 번개를 지우고, 육체마저 허공에 띄워 버렸다.

“아앗!”

마치 둥실거리듯이 레다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에어리스의 상황도 같았다.

마치 몸이 제어를 잃은 듯이 공중에 떠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요!”

허공에 고정된 인형처럼 자신의 육체를 제어할 수 없어 풍선처럼 흔들렸다.

바람의 아우라를 머금은 하얀 머리의 소녀가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바리데기’라고 해.”

바람을 다스리며 일행들을 순식간에 잡은 소녀의 이름은 바리데기.

염라궁의 무수한 장군들을 아우르는 존재였으며, 순식간에 에어리스와 레다가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그쪽의 동료들은 이미 잡혔어.”

“아, 그런 거 같네요.”

에어리스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빙그르르 돌고 있는 채로 대답했다.

“지금은 좀 어지럽고요.”

“자꾸 움직이니까 계속 몸이 돌아가는 거야. 가만히 있으렴.”

바리데기는 자애로운 말투로 에어리스를 지긋이 다독였다.

그 목소리는 편안하면서도 마음을 녹여 주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바람이 주변을 감싸듯이 불어오자, 염라궁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윽하면서도 자애로운 눈을 가진 소녀.’

바리데기는 몸집은 작았지만, 염라궁에서 사실상 가장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 신좌였다.

“하암, 끝났구나.”

기지개를 쭉 켠 바리데기는 한가하다는 듯이 하품했다.

염라궁의 작은 소란이 마무리되었다.

* * *

탕탕탕.

“그대의 죄는 타인의 물건을 훔치고 괴롭힌 것.”

염라궁의 법정에는 항상 무수한 재판이 열린다.

그곳은 숱한 망자들의 영혼을 심판하는 장소였다.

“그대의 죄에 따라 독사지옥으로 보낸다. 100년 형.”

독사들이 끝없이 물어뜯는 지옥.

밤낮없이 고통스러운 형벌을 부여받게 되는, 독사지옥행에 처한 영혼은 벌벌 떨며 선처를 부탁했다.

“으아아,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죄를 지을 때는 몰랐겠지.

하지만 상대는 염라대왕.

지옥의 심판관이라 불리는 신좌답게 거대한 체구와 단호한 눈매를 가졌다.

그는 항상 정갈하게 다린 검은 관복을 입은 채로 판결의 망치를 두드렸다.

“아니, 안 들어줘. 돌아가.”

“흐악!”

판결에는 어떠한 자비도 용서도 없었다.

단호하면서도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는 신좌.

그것이 염라대왕이었다.

“그대는 입으로 죄를 지었으니 발설지옥으로 보낸다. 150년 형.”

“그대는 남의 것을 탐하고 베풀지 않았으니 화탕지옥으로 보낸다. 200년 형.”

망자의 영혼들은 살아생전에 지은 죄를 처벌받았다.

그리고 그 줄에는 유진하 일행이 꽁꽁 묶인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 엄청나네요. 저렇게 판결을 하는구나.”

꽁꽁 묶인 에어리스가 소곤거리면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위엄이 넘치는 염라대왕의 판결은 속전속결이었다.

거침없이 명쾌하게 법정을 진행했다.

“몸도 크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하고.”

“엄청 시끄럽다는 소리지.”

마찬가지로 밧줄에 묶인 이소민이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아까부터 손목이 아렸고, 계속 꿇고 있으려니까 무릎이 저려서 불평이 많아졌다.

“아이, 언제까지 이러고 기다려야 하냐?”

옆에서 감시하던 보초가 조용히 헛기침과 눈치를 주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였다.

“네, 네.”

기어 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이소민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기다리다 지루해져 졸고 있을 즈음에 간신히 유진하 일행의 차례가 되었다.

“자, 너부터 판결을 받아라.”

보초가 다가와 손으로 툭툭 찔러서 한 명을 지목했다.

구석에서 쭈그리고 졸던 유나가 화들짝 놀라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나부터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보초에게 이끌려 법정에 들어섰다.

“자, 다음 영혼이 왔군.”

염라대왕은 거대한 상석에 앉아 우람한 풍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태산처럼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위압감이 대단한 신좌였다.

“저기, 나는 판결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상관없다.”

“에?”

“굳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영혼이 숨기려는 생전의 모습은 무엇이든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염라대왕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영체의 시안>

눈동자로 상대의 기억을 살필 수 있다.

“네가 살아 있던 생전의 모습을 살펴봤다.”

“와, 무슨 신통력 같네?”

“자꾸 말을 꺼내서 시간을 끌지 말도록 주의하라. 이쪽은 남은 판결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염라대왕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스스로 알아서 판결하는 경지에 오른 자이니 유나도 어쩔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네 인생은 어둡기만 하군.”

“그야 지하에 있었으니까.”

“특별한 내용이 없어. 정말 엄청 깨끗하구나.”

유나는 처음부터 자신의 육체가 없었다.

잠시 에어리스의 육체에 있던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 영혼 상태였다.

염라대왕의 눈은 생전의 기억만 잡아내지, 영혼이 되어 빙의된 경우에는 잘 잡지 못했다.

때문에 염라대왕이 볼 수 있는 유나의 기억은 한정적이었다.

“완벽하게 깨끗하다. 무죄 방면.”

염라대왕은 판결의 망치를 들더니 쾅쾅쾅 세 번을 내리치면서 선포했다.

오래간만에 나온 무죄.

지켜보던 보초와 간수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죄 하나씩은 짓기 마련인데 완전한 무죄라니.

인생이 티 없이 맑은 수준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무죄 소식을 듣자 장내가 수군거렸다.

“죄가 없다는 거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던 유나는, 이내 환한 표정이 되어 펄쩍 뛰었다.

“역시 잘 살아야 하는 거구나.”

곧바로 밧줄이 풀렸다.

자유롭게 해방된 유나는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만 돌아가라.”

“와, 명판결이였어.”

유나가 자리로 돌아가자 다음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는 이소민이었다.

“그대에게는 죄가 있군.”

“크억?!”

이소민이 깜짝 놀라자 염라대왕은 하나씩 죄를 일컬어 줬다.

“다른 성운에 침입하여 물건을 많이도 훔치고 다녔어.”

“아이, 사람을 도둑놈 취급하네.”

“무력은 떨어져서 몬스터를 제대로 공격하지는 못했군. 이건 사소하다.”

“큭!”

마치 이소민의 약점을 전부 들춰내는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빚도 많이 졌는데 갚지를 않았고, 과거의 남자 친구와는…….”

“저기, 염라대왕님. 그건 너무 개인 프라이버시잖아요.”

이소민은 숨기고 싶은 과거마저 사방에 까발려지자 당황하여 크게 소리쳤다.

과거의 실수나 비밀이 죄목이라는 이름으로 다 밝혀지고 있었다.

“그만 알았어요! 그냥 죗값 받을 테니까 말하지 말아요. 여기 애들이 다 듣잖아!”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이소민이 바락바락 소리치자, 염라대왕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법정에서 소란 피우지 말아라!”

정신력이 뛰어난 이소민답게 겁이라고는 당연히 없었고, 염라대왕을 향해서도 당당하게 소리치며 맞섰다.

“이소민 언니, 대단하네요.”

“그러게.”

구석에 있던 에어리스와 유진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싸움을 지켜봤다.

불독이 서로 으르렁거리듯이.

앙숙처럼 살벌한 말을 주고받으며 맞섰다.

“조금 지켜볼까 했는데 그만 말려야겠다.”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유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에어리스는 천천히 걸어 나가는 유진하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진하,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 잘 될 테니까.”

성큼성큼.

발걸음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저기, 염라대왕님.”

난데없는 유진하의 등장에 염라대왕은 골머리를 앓듯이 이마를 짚었다.

“넌 또 뭐야? 다음 차례라면 기다려라. 여기 골치 아픈 여자부터 얘기를 끝내야하니.”

“잠깐만요. 제가 반론을 하나 제기할까 하거든요.”

당돌한 대답이었다.

으르릉거리는 이소민도, 인상을 쓰던 염라대왕도 고개를 돌려 동시에 쳐다봤다.

“반론이라 그랬나?”

“네, 애초에 이 재판은 성립할 수가 없어서요.”

“무슨 소리지?”

“생각해 보세요. 염라국의 재판은 죽은 망자의 영혼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지.”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예요.”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장내에 퍼져 나갔다.

미처 그 부분을 놓쳤다는 듯이 염라대왕도 으으음 소리를 내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재판에 세울 수 없습니다.”

깔끔한 반론이었다.

우리는 살아 있으니 너희가 심판할 권리가 없다.

“좋은 지적이다. 그건 인정하지.”

염라대왕도 헛기침을 하며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곳 염라국에 불법 침입한 죄는 물을 수 있다.”

“불법 침입이 아닌데요?”

“뭐라고?”

“저희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유진하를 제외한 모두가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침착하고 근엄했던 염라대왕조차 이 말에는 크게 발끈했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는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어.”

“있습니다.”

“억지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나와 재판을 조롱하려는 건가?”

“제가 어떻게 염라대왕님에게 그러겠습니까? 증거가 있어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증거라니.

대체 염라궁의 초대를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인간, 유진하라고 했지?”

하얀 머리에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소녀, 바리데기가 장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염라궁을 침입한 죄인들의 판결에 관심이 있어서 참관했는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초대를 받았다는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유진하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염라국이 초대했다는 증거가 천천히 그의 손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그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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